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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장로호'라는 일제 전투기가 있었다

개인 뿐 아니라 장로교단 전체가 부일에 적극 협조…국방헌금 일제에 바치기도

주재일 기자/뉴스앤조이

입력 2005-05-20 07:53:41 l 수정 2005-05-20 08:07:18

친일 교육 기관을 통해 목회자가 양성되는 동안 장로교는 적극 부일에 협력했다. 신사참배를 교회의 친일행각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일의 경우 훨씬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단체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경향을 띄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천원을 걷었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애국기(愛國機·전투기) 한 대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 열린 제42회 총회 보고를 보면, 교회종 1540개 유기 2165점을 모아 12만여 원을 마련해 일제에 바쳤다.

이러한 친일 부역이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를 비롯한 일부 목회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로교의 헌신(?)에 자극받은 감리교는 한술 더 뜬다. 1944년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를 보면, 애국기(감리교단호) 세 대 값인 21만원을 헌납하기로 했다. 모금은 '선도의 헌금 전액과 본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을 택하고,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부역한 목사들, 기소유예로 풀려

이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집회에 연사로 나서고,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같은 친일 잡지에 글을 써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하도록 부추긴 기독교 인사들도 많았다. 또 구약 전체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폐지하고 나중에는 복음서만 성경으로 사용한 교회, 하나님나라 재림 심판 종말과 관련된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 교회, 예배마다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를 실시한 교회도 있었다. 그래도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홍택기 목사)는 발언 정도는 삼가야 했다.

그러나 홍 목사 같은 이들의 반발로 해방 후 출옥교인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내부의 회개운동은 무산되었고(<복음과상황> 제158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외부의 역사청산 움직임도 '기독교 정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반민특위에 연행된 목사는 장로교의 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전인선,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 친일 부역한 목사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길창 목사는 적산을 불하받아 동아대학교 이사장, 학교법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사학재단 네 곳을 설립했고,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다. 그는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의 각종 단체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일생'을 보냈다.

전필순 목사는 출옥 후 1957년 총회장이 되고,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분열될 때 예장통합의 중심 인물로 깊게 관여했으며, 1961년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반면 정인과 목사는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뒤에 교계로 복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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