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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지키자" 22년만에 다시 모인 '국본'

6.10범국민대회 준비위, 정치-시민사회-종교-지식인 총망라...상설기구로 발전 전망

김동현 기자 mailto@vop.co.kr

입력 2009-06-09 14:27:02 l 수정 2009-06-10 09:04:28

87년 6월 항쟁의 주인공은 전국에서 시위에 나선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항쟁은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다른 여타의 항쟁과 확연히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항쟁 초기부터 각계를 망라하는 조직이 구성된 점이다. 바로 ‘국본’이라 불리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다. 이 조직은 재야와 야당, 종교계를 아우르는 ‘정권에 맞서는 가능한 최대한 범위의’ 조직이었다.

국본은 항쟁이 본격화됐던 6월 10일 범국민대회 직전인 5월 27일 전격적으로 결성됐다. 2191명의 발기인에는 종교계가 683명, 지역대표 353명, 재야단체 343명, 정치인 213명, 노동 39명, 농민 171명, 도시빈민 18명과 각계 인사 317명 등이 참여했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은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국본에 참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원진은 고문 8명과 공동대표 65명, 상임공동대표 10명, 집행위원 506명, 상임집행위원 29명으로 구성됐다.

국본의 구성은 크게 재야세력과 종교계, 야당으로 이뤄졌다. 정치적 지향에서 ‘동일’하지 않은 각계의 세력들이 ‘4.13 호헌조치’로 현실화 된 독재정치에 맞서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당시에도 종교계와 정치권이 ‘같은 조직’을 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당도 재야 시민사회 세력이 손을 잡는 것을 꺼렸었다. 월간말 97년 6월호 부록 <실록 6월 항쟁>에서 인재근(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의 부인)씨는 기독교 측이 야당과의 공동기구 결성에 한 때 반대했었고 야당도 재야와의 연대를 망설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6월항쟁 야전사령탑 국민운동본부의 모태는 고문공대위

국민운동본부는 재야와 야당을 포괄하는 반독재연합전선이었다. 6월 10일 아침 상공회에서 회의를 하는 계훈제, 김명윤, 김병오, 이규택, 진관, 지선, 박형규, 양순직 등 공동대표와 집행위원



국본의 출발은 각계 원로들의 농성으로 비롯됐다. 함석헌, 계훈제 등 재야 인사 28인이 ‘폭력호헌 저지와 민주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을 염원하면서’ 성명을 발표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3~40대 재야 활동가들이 범국민적 연대기구를 만들자는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했고 광범위한 세력을 결집시킨 것이다.

6월항쟁 야전사령탑 국민운동본부의 모태는 고문공대위

국민운동본부는 6월 1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한승헌 변호사 제공

공동기구를 구성하기로 한 각계 대표 및 실무자들은 5월 20일 우이동에 모여 조직의 성격과 실천목표를 정헀다. 이들은 단기적으로 끝낼 ‘사안별 연대기구’도 정치적 통일성을 지닌 ‘상설 조직’도 아닌 ‘국민운동본부’로 조직 성격을 규정했다. 국본이 내건 구호는 ‘호헌철폐’ ‘민주쟁취’ ‘독재타도’였다.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하며, 대다수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의 조직과 구호를 내건 것이다. 국본은 결성과 동시에 10일 ‘호헌철폐 국민대회’ 준비에 착수한다. 6.10대회는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 다발로 진행됐다.

6.10대회는 자연스레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졌고 국본은 투쟁의 방향과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지도부 역할을 하게 된다. 대학생, 종교계, 정치권이 독자적으로 각종 시위와 종교행사, 집회 등을 열었고 국본은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등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각계의 활동을 존중하면서도 계층을 뛰어넘는 집중 집회를 제시하면서 ‘항쟁’을 이끌어 간 것이다.

국본은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 농촌까지 망라된 조직이었다. 각 지역은 전국 동시다발 집회를 함께 치르는 것은 물론 지방마다 독자적인 시위를 벌여갔다. 지역마다 국본 중심의 항쟁 지도부가 구성됐고 계층별 행동과 지역 집중 집회가 함께 진행되면서 항쟁의 규모는 더욱 커져갔다.

22년 후, 국본의 후예들 다시 모이다

국본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이후 각계로 퍼져나갔다. 재야단체들은 각종 사회단체들을 잉태해냈고 90년대 들어서는 시민단체들이 급격히 늘어갔다. 재야출신 정치인들은 90년대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여년 동안 시민사회와 종교계, 정치권은 상당히 분화됐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훨씬 복잡해졌다. 김대중 정부 이후 각 세력은 대립하거나 의견을 달리하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야당은 여당이 됐었고 진보세력과는 대척점에 서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은 ‘중립’을 자기 위치로 규정짓기도 했다.

6월항쟁계승·민주회복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식

야4당과 범진보사회세력이 손을 잡고 6월항쟁 22주년을 맞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오는 10일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5일 20여 년 동안 흩어져 있던 ‘국본의 후예’들이 다시 모였다. ‘6.10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 22년 전에 비해 그 규모와 범위는 훨씬 커지고 넓어졌다.

6.10준비위에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야4당, 개혁진보진영이 망라된 민생민주국민회의(준), 중립적 시민단체까지 포괄된 시민단체연대회의, 4대 종단, 문화계, 학계 등이 총망라됐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네티즌으로 일컬어지는 일반 시민들도 직접 참여하고 있다. 6.10준비위 실무를 맡고 있는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국장은 “이름 한 번 들어봤던 시민단체들은 모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6.10준비위는 한국에서 커질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조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6.10 준비위의 결성 전후로 각계에서 ‘시국선언’을 봇물 터지듯 발표하고 있다. ‘이명박 국정 기조 변화’를 내걸고 있는 각계의 시국선언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구호로 모아지고 있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각계, 정치세력간에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6.10준비위는 ▲대통령 사과와 근본적 국정기조 전환 ▲검경 앞세운 강압통치 중단, 반민생-반민주 악법 철회 ▲부자편향 정책 중단, 서민 살리기 정책 우선 시행 ▲남북간 교전 반대 및 평화적 관계 회복을 4대 요구안으로 내걸었다.

6.10준비위 상설 기구로 발전 전망

안 국장은 “87년이 민주쟁취를 구호로 내걸었다면 지금은 민주회복이 구호가 되고 있다”면서 “6.10대회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적 투쟁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10준비위는 10일 범국민대회를 범 민주.진보.개혁 세력의 연대를 다짐하는 장으로 규정했다.

22년전 6월 서울시청 광장이 '민주쟁취' 함성이 가득했다면 10일 서울시청 광장은 '민주회복' 함성이 가득할 전망이다.

22년전 6월 서울시청 광장이 '민주쟁취' 함성이 가득했다면 10일 서울시청 광장은 '민주회복' 함성이 가득할 전망이다.



6.10준비위는 10일 범국민대회를 치른 후 상시적 기구로 전환하는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난해 촛불정국을 거치면서 시민사회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반MB연대’ ‘반MB전선’을 위한 상시적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됐었다. 시민단체들과 진보단체들이 함께 만든 민생민주국민회의에 야당들이 참여한 것은 이 같은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6.10준비위는 민생민주국민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시민단체들은 물론 종교계가 참여하고 학계와 전문가 그룹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명실상부한 ‘범국민적 기구’로 평가되고 있다. 10일 범국민대회가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준비되는 만큼 준비위도 전국에서 결성되고 있다.

안 국장은 “준비위 결성 당시에 범국민대회 이후 기구 전환을 위한 논의에 들어간다고 합의했었다”면서 10일 전국적으로 진행될 범국민대회의 규모와 성공 여부가 향후 6.10준비위가 전환할 조직의 규모와 영향력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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