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주면 돌려준다던 '약탈품', 아직도 프랑스에..

140년 지나도 못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

조태근 기자
taegun@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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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강화도 고려궁지 내 외규장각ⓒ 민중의소리



임진왜란과 구한말 시기를 거쳐 일제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미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문화재를 약탈 등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겨 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약탈돼 20여개국에 유출된 문화재는 집계된 것만 7만 6천여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으며 민간 단체들은 실제 정확한 수량이 그 10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140여년 전 프랑스에 빼앗긴 조선 최고의 문화재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는 그 방대한 양에 있어서나 내용의 측면에서도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문화재로 꼽힌다. 그렇다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이 왜 중요하고, 아직까지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66년(고종 3년) 10월 중국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군함 7척과 180여명의 군대를 동원해 강화도를 침략했다. 천주교 선교활동을 벌인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자 보복 차원에서 한 일이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양민을 학살했는데, 조선군의 반격을 받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점령 25일 만에 퇴각했다. 중국 주둔 프랑스군의 공격은 프랑스 정부의 공식 명령에 따른 것도 아니었고, 일개 개인 부대가 일으킨 보복차원의 침략이었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된 서책을 불태우고 약탈해 갔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6천 1백 권의 도서가 소장돼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5천 8백권을 태워버렸고, 서책 340종 중 299권의 '왕실의궤집'을 가져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프랑스에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라 부르는 것들이다.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먼저 '의궤'란 왕위 계승, 왕실의 관혼상제를 비롯해 왕실의 모든 행사의 규칙과 격식, 진행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화보 의례집으로,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이자 유교문화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의궤는 조선 왕조 초기부터 제작됐으나 임진왜란에서 모두 소실되고 당시 외규장각에 소장돼 있던 의궤는 1601년 인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의궤는 1종마다 3~8부씩 제작해 한양의 규장각과 춘추관, 예조, 그리고 외규장각 등 4대 사고에 분산 보관돼 있었다. 현재 약 1천종 3천여책이 남아 있는데, 이중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191종 297권이 보관돼 있다. 4대 서고 중 외규장각에 소장됐던 의궤는 다른 의궤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궤는 왕이 직접 보는 '어람용 의궤'와 왕이 친람하지 않는 '비어람용 의궤'로 나뉜다. '어람용 의궤'는 특급 재질의 종이인 '초주지'를 사용해 제작됐는데, '초주지'는 오늘날에는 제작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특별한 종이다. '어람용 의궤'는 이 '초주지'에 글씨와 그림을 넣고 녹색 비단으로 싸서 놋쇠 경첩으로 묶어 제작됐는데, 이는 세계 출판 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한 제본 방법이다. 왕이 친람하지 않는 비어람용 의궤 역시 최고의 닥나무 종이로 제작됐는데 그림은 목판 도장을 찍고 채색하는 방식이었다. '어람용 의궤'는 왕의 친람이 끝나면 외규장각에 영구 보존됐다.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300여권은 '어람용 의궤'였던 것이다.

우리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게 아니었다. 약탈된 의궤들은 프랑스로 옮겨져 약탈된 이듬해인 18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 이후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재불 교포 박병선 박사가 찾아낼 때까지 110여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에서 '중국 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방치돼 있었다. '발견' 이후 80년대 박병선 박사에 의해 두 차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해제가 발표됐고, 국내 학자들도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울대가 91년 정부에 도서반환 추진을 요청한 후 92년에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도 나서게 됐다.

미테랑

93년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 중 '휘경원원소도감' 1권을 건네줬다.ⓒ 민중의소리



특히 우리는 90년대 고속철도 사업자로 프랑스 떼제베(TGV)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약탈된 도서를 반환받을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됐다. 일본의 신칸센, 독일의 이체(ICE)와 경쟁하던 프랑스는 한국의 고속철도 사업 수주에 '국운'을 걸다시피 했고,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93년 9월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외규장각 의궤 중 '휘경원원소도감' 1권을 건네줬다. 양국은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교류 방식에 의해 영구 대여'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를 두고 한국 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전부 돌려받기로 했다고 발표해 버렸고, 우리 국민들은 미테랑 대통령의 '결단'에 감복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떼제베는 고속철도 사업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미테랑 대통령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양국의 실무교섭에서는 프랑스 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10년 기탁 후 5년 단위로 자동 연장하는 방식, 즉 사실상 영구기탁하되 한국이 의궤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고서를 프랑스에 기탁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조건없는 '영구 대여'에서 사실상 '등가 교환'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가치(등가)를 가진 문화재가 국내에 존재할 수 없다, 설사 등가의 문화재가 있다고 치더라도 이를 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합의는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는 합의였다. 한국 측은 외규장각 의궤를 '영구 대여'하는 대가로 94년우리 문화재 도서 중 337권을, 95년에는 471권의 고도서를 프랑스에 기탁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한국의 도서가치가 낮다며 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 측 다시 97년 279권의 도서와 370점의 중국동전을 3차목록으로 제시했지만, 프랑스측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 대신 다른 문화재를 내주는 데 대한 국내 여론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르몽드

“우리 문화 유산의 주요 부분인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지 않으면 한국인은 잠들지 못한다.”, 2007년 3월 7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실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촉구 전면광고. 당시 광고는 문화방송 '느낌표'와 시민단체인 문화연대의 합작품으로 광고에 나온 책은 93년 미테랑 대통령이 돌려준 '휘경원원소도감'이다.ⓒ 르몽드

그러는 사이 미테랑 정권이 우파인 시라크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정부 차원의 협상이 안 풀리자 정부는 2001년 민간 협상단을 내세워 재차 '등가 교환'방식에 잠정 합의했지만 결과는 90년대와 다르지 않았다.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정부가 다시 반환 협상의 전면에 나섰으나 현재까지 외규장각 도서중 30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제외하고 반환에 대해서는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대해 국내 여론은 단순히 약탈된 우리의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감상적 비판에 머물러 있다. 물론 제국주의 시기 약탈해 간 문화재를 내놓지 않고 있는 프랑스의 국수주의적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프랑스 유력 인사들은 제국주의 시절 약탈해 간 문화재를 "보편주의 관점에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프랑스에 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는 벤츠, 푸조, 도요타 등 명품 자동차를 모두 수집한 자동차 도둑이 이미 푸조와 도요타를 갖고 있으므로 벤츠만을 가진 원래 주인보다 더 다양한 자동차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서 반환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다. 또한 옮겨온 지 오래됐기 때문에 '귀화 문화재'로 봐야 한다거나,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유물을 모두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 하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도 반환 거부의 단골메뉴다. 심지어 이들은 "프랑스의 약탈 덕분에 문화재가 잘 보존되고 관리됐다"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문화재 관리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기 문화재를 약탈해 자국의 박물관들을 채운 영국.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불거졌던 '배신감' 차원(이른바 '떼제베 먹튀')의 비판적인 국내 여론과는 별개로 정부 차원의 치밀하고 끈질긴 반환 노력은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일례로 90년대 최초 반환요청 때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정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외규장각 의궤의 정확한 내역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박병선 박사의 해제에만 의지하고 있었다.(한국 정부의 실사는 2002년에야 이루어졌다) 반환받아야 할 문화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놓으라고 소리친 격이었다. 93년 당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확실히 약속받지 못한 상태에서 미테랑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덜컥 떼제베를 고속철도 사업자로 선정한 것도 잘못이었다. 또한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바뀌면서 외교부 등 정부 차원의 노력도 지지부진했다. 문화재 환수에 앞장서야 할 문화재청도 문화재 환수 담당 인력 1명에, 예산은 2007년에 최초로 편성된 이후 줄곧 2억원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열강에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오늘도 주인 없이 여전히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가깝게는 조선 최고의 그림인 '몽유도원도'가 일본에 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밖에도 수천점의 이름없는 문화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일례로 140년 동안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프랑스의 연구는 전무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 이들을 모두 찾아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경우처럼 드문 기회가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비록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여전히 기회는 살아 있다. 민간 단체인 문화연대는 2007년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2년여 동안 준비해 온 반환소송을 시작했으며 지난해 부터 파리 행정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내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을 적극 활용해 치밀한 반환노력을 재개해야 한다. 역사 드라마에서만 봐오던 조선시대 왕실의 모습을 보기 위해 후손들까지 프랑스로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해 9월 주한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열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소송 관련 기자회견

지난해 9월 주한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열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소송 관련 기자회견ⓒ 민중의소리



<조태근 기자 taegun@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 2009-09-28 11:44:36
  • 최종업데이트 : 2009-10-03 10: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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