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민소스토리] 명동 8평 사무실의 추억
현석훈 기자 radio@vop.co.kr
입력 2010-02-18 14:51:06 수정 2010-02-26 12:48:48
<민중의소리>가 창간 10년을 맞이합니다. 오는 5월 15일이 되면 <민중의소리>는 열 살이 됩니다. 여지껏 저희들은 '자랑'하는 것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를 앞세우기 보다 몸을 낮추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10년이 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저희를 너무 궁금해 하십니다. '도대체 밥은 어떻게 먹느냐'부터 시작해 '진보진영 배후조종하는 세력 아니냐'는 과분한 억측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저희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이야기가 있듯 <민중의소리> 10년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기억할 만한 10가지를 골랐습니다.
8평은 생각보다 좁았습니다. 어른 걸음으로 네 걸음 반, 정사각형 모양의 사무실은 아담하다 못해 힘겨웠습니다. 겨울에는 손이 얼어 자판을 치지 못했고, 여름철은 숨 쉬기 어려울 정도의 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정사각형의 사무실은 어떻게 구성을 해도 넉넉한 공간을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계단은 성인 한명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었고, 화장실은 어깨가 벽에 닿을 만큼 좁았습니다.
한 면에만 나 있는 창문은 찬 공기를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언 손을 엉덩이에 깔고 녹여가며 기사를 작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창문을 열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덩치 좋은 어린아이만한 커다란 실외기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름에는 이 창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더운 열기가 사무실에 가득차 오히려 닫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
민중의소리는 이 불편한 사무실을 잊지 못합니다. 선배 기자들에게는 추억의 장소, 후배 기자들에게는 전설이 된 명동의 추억을 적어볼까 합니다.
수 많은 특종과 명품 동영상
민중의소리는 이 곳에서 많은 특종을 쏟아냈습니다. 실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던가 취재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특종'이 된 셈입니다.
2002년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비도 많이 왔습니다. 폭우는 없었지만, 취재를 가는 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습니다. 의정부는 멀었고, 노트북과 인터넷 환경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조건에서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수첩은 늘 젖어있었고, 너무 많은 비 때문에 필기를 포기하고 기사를 '암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사무실로 복귀해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나마 기사는 영상에 비하면 나은 편에 속했습니다. 영상을 찍고, 컴퓨터로 옮긴 다음 인터넷에 올리기 위해 랜더링(Rendering)을 걸어두면 20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지금처럼 고사양 컴퓨터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상을 만드는 작업은 무척이나 고됐습니다.
행여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할까봐 걸어두고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소주 한잔 기울이며 랜더링이 끝나기를 기다려 영상을 송고하고 그대로 잠자리에 드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잠자리는 돗자리에서 냉장고 박스로 업그레이드 됐지만 PC를 업그레이드 할 만한 형편은 못되었습니다.
미선이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에 미군 당국에 직접 항의하고자 훈련중인 장갑차를 막아세웠던 학생들을 담은 '장갑차 언니의 눈물' 편도 이 때 제작됐습니다. 총 다섯편인 이 영상은 편집에만 꼬박 4박 5일이 소요됐습니다. 이 영상은 민중의소리 서버를 번번히 다운시켰고,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꼭 좋은 장비가 좋은 영상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이때 배웠습니다.
ⓒ민중의소리 자료사진(영상 캡쳐)
2002년 8월 대학생들이 여중생 압사사건에 항의하며 훈련중인 미군 장갑차 위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김도균 기자는 꼬박 2박3일을 기다려야 했다.
'); }개발자? 디자이너? 기자?
가진것도 없었고, 돈을 벌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쓰지 않는 것을 쓰겠다는 열정은 남 부럽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쉽게 인터넷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돈을 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부담됐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직접 만들 수 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소리 기사시스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판매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스템은 돌아가긴 돌아갔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여기저기 꼬여있는, 하지만 구현은 되는 시스템을 최근까지 사용했습니다. 편집국장은 개발하고 부국장은 디자인을 입혔습니다. 웹사이트 개편도 마찬가지 입니다. 낮에는 기사를 쓰고, 밤에는 개발을 하면서 민중의소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물론 여러 사람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민중의소리 기사시스템은 '십시일반' 프로젝트로 진행됐습니다.
굳이 비용으로 따지자면 수천만원이 들었을 사업입니다. 사람의 열정은 정말 많은 것을 가능케 합니다. '왜 기자가 개발을?', '왜 기자가 디자인을?' 이런 질문은 지금도 민중의소리에서 통용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합니다. 지금도 민중의소리는 계급장을 내세우지 않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동의 '계란차'
추위와 더위에 무용지물인 얇은 유리창이 방음이 될 리야 없겠지요. 민중의소리는 명동에서 현재 노동방송의 모태가 된 라디오 뉴스와 방송을 제작했습니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마이크와 헤드폰, 컴퓨터가 전부였습니다.
'계란차'는 꼭 아나운서들의 녹음시간에 나타났습니다. 지나갔나 싶으면 오토바이가 지나갑니다. 자동차 경적은 그나마 애교에 속했습니다. 간혹 취객의 노래소리가 녹음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곤욕스러웠던 일은 '재채기'였습니다. 사무실의 인구밀도가 높다보니 모든 사람들의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녹음시간에는 모두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 했고, 녹음이 끝날 때 까지 계단에서 속삭여야 했습니다.
견공(犬公)은 또 다른 고민거리 였습니다. 어디서 짖는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견공을 원망하느니 복날을 기다리는게 낫겠다 싶어 포기하고 그냥 녹음한 일도 있습니다.
8평 남짓한 명동 사무실이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당시 구성원들이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낌없이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뉴스'는 방송국으로 성장했고, '명품 영상'은 영화 '저 달이 차기전에'를 탄생시켰습니다.
민중의소리가 진화하는 이유, 그것은 폭염도 꺾지 못한 '열정'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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