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늘 바빴다. 지난 1월 용산참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를 하루 앞두고 인터뷰를 하려 했을 때도 얼마나 바빴는지 중간에 약속시간과 장소를 몇번이나 변경해야 했다. 당시 추모제를 하루 앞두고 있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지만 용산 남일당 건물, 순천향대병원, 명동성당 등 세차례 이상은 옮겨 다녀야 했던 기억이 있다.
빈곤사회연대 조직국장 김도균씨. 1970년 12월생. 우연인지 기자와 이름이 같다. 김씨를 처음 본 건 지난 2005년 12월 WTO각료회담 반대투쟁이 벌어진 홍콩에서다. 당시 국내 농민.노동자 단체들이 홍콩에 건너가 시위를 벌였는데 김도균씨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중국어 통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자랑하며 현지 취재진과 참가자들 사이에서 인터뷰를 도와주기도 하고 길안내를 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농민들 맨 앞에 서 있었다. 당시 그는 기자가 홍콩시민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선뜻 나서 통역을 해주기도 했었다.
그런 그를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종종 집회 현장 등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궁금증이 생겼다. 중국어는 언제 배웠을까? 결혼은 했을까? 직업은 뭘까?
ⓒ민중의소리
지난 5일 김도균 빈곤사회연대 조직국장이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추모주간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대만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그는 1970년 12월 1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이 당시 대구였는데 초중고교는 서울에서 다녔다고 한다.
김도균씨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다.
"원래 제 출생 예정일이 12월 20일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월남전 떠나기 전에 아이를 꼭 보고 가시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머니 배를 갈라 저를 꺼냈다더군요."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그는 1991년 전문대에 입학했다. 군대에 다녀온 뒤 복학을 해서는 총학생회 활동을 했다. 그는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면셔 자신을 "보수적이면서도 정의감 넘치는 그런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언젠가 한총련 학생들과 안양지역의 안대협 학생들이 농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반대가 심해 문제가 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학장을 찾아가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죠. 당시 학장은 직접 학장실로 찾아온 저를 보고는 꽤 당돌하다면서 칭찬 아닌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한총련과 같이 농활을 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공산주의자', '빨갱이'하며 욕을 해댔죠"
김씨는 "학장님의 그 말을 듣고는 오히려 운동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운동권이 된 것도 학장님 덕분"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던 그는 학교를 졸업을 하기도 전에 중국으로 날아갔다. 아들의 미래가 불안하셨던지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 중국 유학을 보내셨다.
"중국 장춘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중국어를 배운거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있었는데 영화 '마지막황제'에 보면 일본군에 끌려간 푸이가 살던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생활했습니다. 공부를 못해 좀 오래 있었죠."
중국에서 7년여간 생활을 한 그는 2002년 한국으로 돌아와 중국어 학원강사로 일을 했다. 처음에는 여유도 있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해보자 싶어 밤에 야학에 나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야학에 다니면서 그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거기서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다.
"거기서 야학을 1년 넘게 했죠. 지금은 나가진 않고 있는데 가끔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가서 도와주기도 해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진보적 친구들이 많아요."
2005년 홍콩에 갈 당시에는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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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홍콩 소고 백화점 앞에 선 두 김도균. 당시 통역을 맡은 김도균(사진 오른쪽)씨와 기자 김도균(사진 왼쪽)이 홍콩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 }2005년 당시에는 백수였다. 당시 빈곤사회연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직업적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빈곤사회연대는 주거권.생활권 확보를 위한 운동, 공적 사회서비스를 확보하는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평소 제 꿈은 제가 남들보다 잘 하는 중국어로 국제연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저한테 중요하고 제가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당시 민중의소리에 광고가 난 걸 봤습니다. 통역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는 "홍콩 현지에서 중국어를 하면서 인기를 좀 끌었다"고 말했다.
홍콩에서는 영어를 많이 쓴다지만 현지 기자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건 아니더라구요. 같이 간 영어 통역들도 저한테 많이 물어보고. 당시 농민단체 회원들과 움직이며 통역을 했는데 그 분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취재기자들이 상황이 급하니까 저한테 일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통역이 얘기해서는 안될 계획까지 물어오는 기자들도 있었죠."
그런 일이 있다보니 같이 간 농민들에게서 오해도 사고 혼나기도 했다. 그는 "통역이 항상 주변에 기자들을 끼고 있으니까 너는 스타 되려고 여기 왔느냐고 욕도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런 오해를 날려버리게 된 건 당시 컨벤션 센터 진격투쟁을 하면서다.
"컨벤션 센터 진격투쟁을 하는데 행진 대열 맨 앞에 서서 통역을 하면서 최루가스를 다 맡고, 경찰 몽둥이에 얻어 맞고 하는 걸 농민들도 보신거죠. 아, 저 놈도 가만 보니 우리편이구나 싶었는지 너도 그냥 통역이 아니구나 하시더라구요."
당시 현장에 취재기자들이 많아 행진이 어려울 정도였는데 김씨가 메가폰을 들고 길을 비켜달라고 한마디 하면 기자들이 길을 터주곤 했다. 이런 장면을 본 농민들은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며 좋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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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 3주기 추모문화제가 강남 삼성 본관 앞에서 열렸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대만 활동가 아폴레옹(오른쪽)씨와 통역을 맡은 김도균(왼쪽)씨가 기념촬영을 했다.
'); }그는 연기도 제법 했다.
중국어 학원강사 시절, 친구들을 따라 최저임금투쟁 현장에 간 적이 있는데 우연찮게 즉석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자본가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럴싸하게 연기를 한 모양이다. 어릴 적 교회에서 공연 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는 그는 "자본가 연기를 너무 잘해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한테 맞을 뻔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무대 공포증이 없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고향격인 빈곤사회연대를 찾아가 직업적 운동을 계속하길 원한다고 했더니 빈민해방 철거민연대 상근자리를 소개시켜 주시더라구요. 거기서 월급받는 상근자 일하며 좋은 경험을 했죠. 용역깡패들에게 맞아도 보고 집회 사회 봤다고 150만원 벌금도 맞아보고, 간혹 철거 문제로 뒷거래가 이뤄지는 안좋은 모습을 보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얼핏보면 그는 꽤 정돈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일관되게 도시빈곤문제를 연구 중이었고 중국어를 통한 국제연대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비록 빈민운동에 몸담고 있지만 중국어 통역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네요. 덕분에 각계의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구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 물론 부수입도 올리고 (웃음) 앞으로는 보다 전문적인 통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찾아주길 희망한다"면서 "전문성을 키워 국제연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찾아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도균 기자 vnews@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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