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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자, 나이는 42살. ‘유명’한 ‘자’라고 외우면 이름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은 그녀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꽤 유명하다. 언론에도 많이 비춰졌으니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도 해도 무방하겠다.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인 그녀는 재능교육 본사 건물이 멀찌감치 보이는 이곳에서 벌써 1,000일 가까이 끈질긴 ‘원직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

유명자 재능교육지부장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1,0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이름값을 하느라 ‘원직복직’ 싸움으로 ‘유명’해진 유명자씨는 충남 온양이 고향이라서 느긋할 때는 한없이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다. 얼굴은 보지도 않고 며느리감으로 데려간다는 남동생을 하나 둔 셋째 딸.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녀는 아직 노처녀다.

“엄마 말에 의하면 당신께서 아프면 아픈 원인 중의 하나가 다 나 때문이래요.”

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학습지 교사가 되고 나면 좀처럼 결혼하기 쉽지 않다”고 직업 탓(?)을 했다. 매일 같이 밤 9시나 10시가 되어 끝나는 직업이니 평일은 평일대로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자연스럽게 녹초가 돼서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고 싶기 마련. 학습지 생활 10년에 그냥 노처녀가 되어 있더란다. “결혼했으면 벌써 (직장에서) 쫓겨났겠죠”라며 허전한 웃음을 덧붙이기도 했다.

‘만민보’가 중매쟁이 역할을 톡톡히 했으면 하는 바람에 글머리에 결혼 이야기부터 꺼내봤다.

“꿈이 조금 바뀌긴 했는데 제일 처음 외국어고 다니면서 통역사가 되고 싶었어요.”

청소년 시절 유씨는 꿈도 많았다. 제일 처음 통역사가 되고 싶었다. 원래 어문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불어를 전공했는데 불어가 참 매력적인 언어이기도 했지만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남자 선생님의 모습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

유명자 재능교육지부장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1,0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

그 다음 꿈은 인테리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보도사진도 찍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종군기자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넘어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는 없는 것. 유씨는 대학의 문턱에서 자연스럽게 인테리어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어문계열 학과에 낙방하며 재수를 피하기 위해 한양여대 응용미술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전공으로 사진학을 챙겼다.

그렇게 해서 유씨는 충무로에서 사진이란 것을 3년 정도 찍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현실의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버티기에는 조금 버거운 위계질서와 학연에 의한 차별은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여자로서 성공하기도 쉽지 않은 직업이었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경제적 뒷받침이 안 되다보니 어느새 상업사진에 물들어있었다.

“카메라 좋은 걸 구입해서 내 사진 한번 찍어보자.”

그래서 유씨는 학습지 교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학습지 교사 수입이 짭짤하다는 소리에 한 1년 정도 돈을 벌어서 “카메라 좋은 걸 구입”하려고 했다. 그녀는 “사진을 더 하고 싶어서 학습지 들어온 것”이라서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도 차 트렁크에 늘 사진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유씨가 학습지 교사가 되고 1년 반 정도 지나면서 시나브로 차 트렁크에서 아끼고 아끼던 사진기마저 사라져 버렸다. 새 사진기를, 그녀의 표현대로 “카메라 좋은 걸 구입”하기는 커녕 말이다.

“뭐 이런 회사가 다 있어.”

유씨는 학습지 교사가 되고나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가 되자마자 지국장과 싸우기 일쑤였다. 선배들은 기존의 체계에 젖어들어 회사에 대드는 그녀를 오히려 만류했다. 아마 그녀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에서 파업을 했다면 동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재능교육=노조탄압

유명자 재능교육지부장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1,0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

유씨가 “회사를 나가느냐 마느냐” 고민하던 중 파업이 시작됐다. 그녀는 불합리한 것은 고쳐야지 하는 마음이 더 컸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 물밑으로 교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펀지처럼 그녀도 빨려들어 갔다. 수업을 마치면 밤늦게까지 노조 결성 모임에 참여하고 다음날 돌아와서 지국의 동료들과 내용을 공유했다.

“이렇게 (재능교육에) 오래 있고 노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하는데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로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이도 30대를 지나 40대로 접어들었다. 해고돼 길거리에서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을 한 지도 1,000일 가까이 된다. 얼마나 더 오래 싸워야 할 지 알 수도 없다.

“(이런 일을) 왜 꼭 내가 앞장서서 해야 하지?”

지금도 유씨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재능교육의 투쟁현안을 가지고 싸우는 “부담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다”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재능교육측과 대화를 하거나 투쟁을 할 때 어느 누구보다 가장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잇따른 투쟁과 긴장된 일상의 연속.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싸우다보니 그녀의 차 트렁크에서 사진기도 사라졌을 것이다. 단순한 카메라가 아닌 한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아주 오랜 그녀의 꿈도 아득해져 갔을 것이다.

“정말 빨리 아이들을 만나서 수업을 하고 싶어요.”

이제 유씨의 꿈도 조금은 바뀐 듯 하다. 허긴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우선 그녀는 현장에 빨리 돌아가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녀는 “유명자를 버린 것은 재능교육측의 최대 실수”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해고되기 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선생님 처음”이라며 학부모들에게 칭찬을 들으면 들었지 크레임 한 번 받아본 적 없다는 자랑이다.

재능교육=노조탄압

유명자 재능교육지부장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1,0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유씨는 “교사의 꿈은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가져본 적이 있지 않냐”며 대안학교에 관심을 보였다. 대안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노동자 의식이나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다는 이야기다. 분명 노조활동을 통해 스스로 체득한 인생관이다.

그렇지만 유씨의 어릴 적 사진작가의 꿈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싸움에서 승리하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10년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멀어져간 사진작가의 꿈을 떠 올렸다.

“제주도에서 토속적인 올레길을 무념상태로 돌아다니며 편안하게 풍경사진도, 예쁜 사진도 찍고 싶어요. 딱 한 달 동안만이라도...”

그녀가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면 무조건 하고 싶은 일”이란다. 그러고 보면 재능교육측은 유씨의 정든 일터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그녀의 어릴 적 꿈마저 빼앗아간 셈이다.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1,000일 안에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는 모습을 간절히 그려본다. 아울러 제주도 올레길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도 상상해 본다. 그녀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올레길 위에 서 있는 그녀의 곁에 멋진 남자하나 같이 했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히 가져본다.

<장명구 기자 jmg@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 2010-07-12 11:59:43
  • 최종업데이트 : 2010-10-10 21: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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