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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사람의 ‘직업’은 무엇일까. 때로는 이것이 궁금해진다.
김성진 SJ뮤지컬 대표는 많은 직업을 가졌었고 지금도 많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뮤지컬 배우와 연출, 뮤지컬 강사, 창조성 수업 강사, 록밴드 보컬 그리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

“초등학생들 시간표를 보면 월요일은 체육, 화요일은 음악, 수요일은 산수......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잖아요. 색연필로 노랗게 빨갛게 줄이 처져 있는 예쁜 시간표. 그런데 어른이 되면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똑같잖아요. 그런 것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멀티잡'에 대한 변이다.

영어교사에서 뮤지컬 배우로

그가 가장 처음 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 했던 일은 영어교사였다. 그는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서 교수들이 ‘영어는 세계화의 수단’이라고 말할 때 이미 ‘개구라’라는 느낌이 있었어요.(웃음) 영어라는 게 동네 깡패 같다는 생각을 그 때도 했지요. 그래서 영어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큐빅 공연 후 배우, 안무와 함께

뮤지컬 '큐빅' 서울공연 후 배우, 안무와 함께. 가운데가 김성진 대표.



그의 집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이른바 ‘네이티브 스피커’와 영어 레슨을 할 수 있었다. 그 때는 일본어나 프랑스어 등 어떤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외국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영어교육과에 입학한 후에도 다른 동기들보다 영어 구사력에서 앞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라는 게 이미 공평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또 왜 영어를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해야 하느냐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요. (영어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하고요.) 그러면서도 영어로 먹고 살아야 제일 잘 먹고 살 것 같다는 생각, 영어를 누구보다 잘 하고 싶다는 욕망도 한편으론 있었지요.”

영어는 그에게 불편한 ‘애증의 존재’였다.

그는 이러한 갈등 속에 영어교사를 때려치우고 뮤지컬을 배우는 늦깎이 학생이 되었다. 열정적으로 뮤지컬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편으로 어려움도 느꼈다.

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한 교수에게 용기를 내어 ‘제가 가장 고칠 점이 뭔가요’ 라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 그 교수는 “너는 여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다’에서 아이다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페임

뮤지컬 '페임'에 출연했던 모습.

“제가 20kg쯤 살을 뺀다고 해도 여주인공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조언이 당시로선 유쾌한 충격이었지요.”

또한 그는 “배우가 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섹시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섹시한 외모도 아닌 데다 ‘왜 섹시해야 하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관객 중에 여성관객은 없나?’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됐지요. 너무 많은 것을 이미 보고 와서 힘들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뮤지컬 기성판에 뛰어들고자 했을 때 다시 한 번 좌충우돌하게 됐다.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계속 보는 일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보다 상처를 얻는 일에 가까웠어요.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경험 정도는 한 번 울고 탁 끝내버릴 담대함이 직업적으로 요구된다고 할까요. 그런데 당시 저는 마음이 연약하고 예민해서 그 과정이 힘겨웠어요.”
오디션을 몇 번 보지도 못했다고 할 정도로 그 과정은 견뎌내기 쉽지 않았다.

그는 그 때만 해도 아직 막연했지만 ‘순수창작’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 창작집단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함께 할 만 한 곳을 쉽게 만나지 못했다.

창조성 회복, 그리고 SJ뮤지컬

그러는 사이 그는 영어 강사로서 ‘먹고 살아가는’ 일을 한 축으로 이어가면서 다른 한 축으로 ‘창조성 수업’을 시작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와 도움을 줬던 책이 ‘아티스트 웨이’였어요. 처음 저자 서문 한 페이지만 읽고도 너무 기뻐서 집 안을 뛰어다닐 정도였지요. 누구나 원한다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어요.”

그 책에서 실행해보길 권한 일들을 하나씩 실행하면서 스스로 변화하고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한 그는 ‘기적’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창조성 수업’을 시작했다. 수강자들과 함께 이 책의 ‘실행 과제’를 하나씩 실행해보고 경험을 공유하는 수업이다.
기적 같은 '창조성 회복'의 과정이 좀 더 알고 싶다면 당장 서점으로 뛰어가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를 읽어보시길 권한다.

한편 그는 이 무렵 밴드의 보컬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 곳에서 사람관계의 큰 상처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컬로서 혹독한 트레이닝 과정”이었던 것은 남은 자산이다.
뮤지컬의 경우엔 한 작품 내에서 여러 배우들이 각자 맡은 부분을 소화해 내지만, 밴드 보컬은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만큼 보컬로서 전문성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래는 그가 가진 강력한 '기술' 중 하나. 그는 지금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연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회 같은 장소에서 노래를 한다. “좋은 뜻으로 집회를 여는 분들에게 노래로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하고 있는 일이다.

홍대앞 공연

밴드 보컬을 하던 당시 홍대앞과 신촌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



자신의 창조성을 회복하고 이를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을 거쳐서, 그는 1년 8개월 전 구로의 “황량한” 지하 연습실을 얻어 SJ뮤지컬의 문을 열었다. SJ뮤지컬은 뮤지컬학원이자 창작집단이다.

“아직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한 주부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해요. 어찌 보면 영어 선생님으로 살아온 삶의 흔적이랄 수도 있고, 생계용일 수도 있고, 제가 가진 기술 하나가 사장될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그는 여전히 ‘애증의 존재’인 영어가 삶의 한켠에 살아 있음을 고백하며 슬며시 웃는다.

SJ뮤지컬에서 그의 일상은 연습실에서 개인 레슨도 하고, 연출을 하거나 대본 쓰는 작업도 하면서 흘러간다.

“SJ뮤지컬의 컨셉은 배우가 아닌 사람도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으면 무대에 멀쩡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이랄까요. 제가 가장 소질 있는 부분이 연기를 안 해 본 사람들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감동도 주고(웃음), 모든 것을 동원해서 무대에 세우는 것, 그것만큼은 탁월하다고 생각해요.”

배우였을 때와 연출로서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류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어떤 한 인물이 되기 위해 겪는 과정에서 농도는 배우가 훨씬 더 짙은 것 같아요. 연출은 굉장히 바쁜 직장인과 비슷한 직업 같달까요. 전화 받느라 하루가 다 가기도 하고. 탐구하는 느낌보다는 현장을 통제해야 하고, 미팅도 하고, 인간관계의 능력이나 실무능력을 요구하지요. 예술성은 배우에게서 더 빛이 나는 것 같아요.”

SJ뮤지컬의 첫 공연은 영어 뮤지컬이었다. 사실 전문배우도 아닌 이들이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공연을 한다고 하니 다들 ‘우스꽝스러우면 어쩌죠’라고 걱정하며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는 ‘무시할 만한 공연이 아니었다’는 것. “이 때부터 연출력에 대한 자신감, 창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게 ‘큐빅’이란 작품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지하철 1호선

인디극단 시절 연출했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 모습.



10년이 흐른 뒤...

이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현재로서’ 가장 클라이맥스는 ‘큐빅’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하나 더 소개해야 할 것이 있다. 굳이 규정하자면 ‘그는 어쩌다 늦깎이 운동권이 됐을까’에 대한 이야기랄까.

“홍대를 다닐 때 풍물패를 했어요. 그런데 보통 선배들이 후배들을 꼬셔서 운동을 처음 시작하잖아요? ‘내일 어디 같이 가자’ 하고 불러내고 무조건 전경이랑 한 번 뛰어보면서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야’ 하고, 학습도 하고......(웃음) 근데 저는 입학하자마자 스스로 집회에 나가서 ‘무슨 얘기 하나’ 듣고 있었거든요. 그 때 이미 뭔가 가슴에 울컥하는 게 있었어요. 근데 선배들이 저는 안 꼬시더라구요. 나중에 들어보니 제가 무서웠대요.”

그는 1학년 때 집회도 따라다니고 하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지금도 일찍 그만둔 데 대해 미안하고 창피하고 후회도 있고, 여러 감정이 있어요.” 그렇지만 어렸던 그 때 그는 “세상이니 동지니 하는 것을 감당하기에 개인적으로 너무 불행했고, 결정적으로 운동이란 게 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창조성을 회복하는 자신만의 길을 걷다가, 10년이 흐른 뒤에 다시 ‘운동’을 만났다.

바로 ‘촛불’이었다.

“(광우병 파동이 났을 때)처음에 룸메이트에게 ‘왜 사람들이 대통령을 이렇게 싫어하는 거야?’ 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나요.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서로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정말 잘 몰랐다’면서 민망해 한다. 하지만 ‘광우병’은 달랐다.

“내가 10년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을 쳐 왔는데 ‘광우병’은 내 행복을 심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싸워볼 엄두가 났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4대강 반대니, 민영화 반대니, 그 때만 해도 잘 몰랐어요.”

뮤지컬 큐빅

창작뮤지컬 '큐빅'에서 '명박산성에 맞선 시민들의 광화문 시위'를 표현한 대목.



그렇게 ‘촛불 지킴이’가 되어 매일 광장에 나서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인터넷 상의 촛불들과 교유하면서 그는 ‘스스로 학습’을 해 나갔고, 표면적인 문제에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로 점차 접근해갔다.

그러다가 존경하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어떻게 전직 대통령이 이렇게 죽느냐, 우리나라는 정말 엄청나게 가짜”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후의 제 모습,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그는 창작뮤지컬 ‘큐빅’을 만들게 됐다. 쉽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충격에 휩싸여 만날 눈물만 났고, 대본을 쓰려고 앉으면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아이디어만 떠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울며 불며 써내려간 작품 '큐빅'을 다행히 노 전 대통령 1주기에 맞춰 경남 김해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1주기에 맞춰서 올릴 수 있게 됐으니 기쁘면서도 참 아이러니했다.”

‘큐빅’은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를 외치던 시위에서 경찰 곤봉에 맞아 숨을 거두었던 대학생 류재을 사건을 도입부에서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97학번인 그에게 자연스러운 모티프일 터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후, 1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서울 시내에 쏟아져 나온다.

“운동권이라는 말 자체가 촌스럽다고 느껴지던 시대에 100만이 거리에 나왔잖아요. 그 때까지 10년의 시간의 흐름을 조명하는 작품이에요. 그 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두 남녀의 관계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요.”

이 작품은 고등학교 동창인 수현과 영진, 대학시절 '운동권 동아리'인 율동패에서 만난 수현과 지호가 90년대 후반을 지나 2010년까지 20대의 전부를 던져 살아온 과정을 그간 있었던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 속에서 그려낸다.

그는 이 다소 묵직한 작품의 주제에 대해 "2008년의 광화문 촛불, 2009년의 연이은 국가적 애사들을 겪으면서 삼십대란 나이를 살아내는 것은 다시 한 번 사춘기를 경험하는 것과 비교해봐도 더욱도 혼란스러운 과정이었다"면서 이러한 자신의 혼란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녹여냈다고 소개했다.

처음부터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배우와 스탭도 '무보수'로 참여했다. 그는 "다행히 수준 높은 배우와 스탭이 함께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창작뮤지컬 큐빅

창작뮤지컬 큐빅 김해공연 포스터.

특히 그는 작품 안에서 ‘명박산성에 맞선 100만 군중의 시위’를 뮤지컬 안무로 구성해낸 부분을 자랑할 만한 부분으로 꼽는다.

그리고 2010년 7월 어느 날에 서있는 그는 이제 무엇을 하려고 할까.

“9개월 동안 ‘큐빅’이란 작품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이 작품이 더 유명해졌으면 하는 꿈이 있고, 스스로 충전하고 싶기도 하고. 이 시기를 겪은 후의 모습은 아직 설정하지 못했어요.”

그는 “최근에 이 공연을 후원해주겠다는 기업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큐빅’이 더 대중화하고 수익이 나서 사람들 월급도 줄 수 있으면 좋긴 하지요. 그런데 그게 나의 목표인가, 고민이 들어요. 큰 후원이 올지 모른다는, 한탕주의 같은 부추김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론은 이제까지처럼 또 시작하는 것밖에 없겠지요. 대본 쓰고 학생들 가르치고, 더디게만 보였던 그 일을 다시 하는 것밖에...... 앞으로 제가 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며 웃는다.

정말로 궁금해졌다. 이 사람의 10년 전이, 그리고 현재가, 그리고 또 10년 후의 모습이.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졌다. “사실은 요즘 뮤지컬보다 통일문제에 더 흥미가 많은 때도 있어요”라고 한 마디 슬쩍 덧붙이는 그를 보면서. 이 사람 안의 순수한 열정이 식지 않는 이상, 그의 직업은 앞으로 수도 없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을 품어본다.

<정지영 기자 jjy@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 2010-07-12 08:51:24
  • 최종업데이트 : 2010-10-10 2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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