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해외 문화교류는 ‘정대세’다”
통일동요음반 ‘길동무’ 낸 문화기획자 이철주
정지영 기자 jjy@vop.co.kr
입력 2010-07-23 11:03:21 수정 2010-07-23 14:20:10
세상엔 참 ‘돈 안 되는 일’, 또는 ‘손해 보는 장사’를 즐겁게,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일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일동요음반 ‘길동무’를 낸 문화기획자 이철주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도,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도, 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남북문화교류사업에 매진한다.
최근 남과 북, 해외 동포가 함께 만든 국내 최초의 통일동요음반 ‘길동무’가 출시(로엔엔터테인먼트)됐다. 이철주 씨가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산하 동요창작단체인 ‘겨레동요애호회’와 함께 만든 이 음반에는 북녘에서 작곡한 동요 12곡과 재일조선인이 작곡한 동요 12곡, 통일을 주제로 한 동요 11곡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곡들엔 평생 재일조선인 문예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해온 김아필 선생의 가사가 담겨 있다. 작곡과 노래, 반주 녹음은 북쪽 예술가 단체와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했다. ‘피바다가극단’과 ‘영화및방송음악단’ 주연들이 직접 노래했고 학생 합창단으로 이름난 ‘평양률곡중학교 합창단’이 참여했다.
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십니까?
“한 장 낼 때마다 3천원 정도씩 손해를 봅니다.”
이 음반의 '진실'은 이렇다. 왜. 왜. 그는 이 ‘손해 보는 장사’를 계속 하는 걸까. 그 사연을 들어보았다.
대학 때 탈패 등 문예운동을 했던 그는 문화기획자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면서 살다가, 1999년 남북문화교류 민간 공연인 남북평화음악회를 담당하게 되면서 처음 이쪽 분야에 발을 디뎠다. 그 때만 해도 반공교육의 잔재로 북측 문화예술에 대한 선입견이 컸던지라 직접 북쪽의 예술을 접해보니 “우리의 음악, 미술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꽤 괜찮게 갖고 있었던” 것에 문화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알고 싶다’,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5년 북측의 유일한 국립해외예술단인 총련 산하 금강산가극단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이 분야에 발을 푹 담그게 됐다. 특히 이들은 북쪽이 아닌 동경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일본 전역을 20번 이상은 따라다니면서 보고 공부했다고 한다.
개인사적인 배경도 있다.
“십수년 전 이산가족 찾기로 전국이 눈물바다가 됐을 때, 저도 남과 북을 오가며 편지 전달도 해봤어요. 통일부의 승인을 받고 북측에 사시는 함경도 분의 편지를 받아 제주도에 사시는 친척에게 전달했지요. 저 자신도 이산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면서 뭉클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는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교류가 남북의 동질성을 찾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번 음반을 만들게 된 과정은 특별했다.
“2006년부터 북측의 음반을 꾸준히 냈어요. 대중음악, 클래식, 관현악단 등 시리즈별로 7가지 음반을 냈지요. 공연기획도 많이 했지만 공연은 일회성이어서 사회적인 여파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뭘까. 손이 닿을 곳에 있는 음반이 남북문화교류의 저변을 넓히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남북문화교류사업을 지속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게 해외동포 사업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상 남북 직접교류가 활발해진 2000년대 들면서, 그 전까지 갈라진 남과 북의 오작교 역할을 해왔던 해외동포들에 대한 인식이 수그러든 게 사실이다.
“북측의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고 남북교류협력법에도 규정돼 있는 총련 산하 문화예술인 모임 문예동 분들과 많이 교류를 해왔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일제시절에 일본으로 넘어가신 1세대 분들이 거의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술은 예술가가 돌아가시면 같이 사라지는 운명이거든요.”
그 분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통일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고, 통일에 대한 희망이라도 품고 가실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을 후학으로서 하게 된다는 그.
그러던 중 그는 평생 민족음악 교육사업을 해 온 김아필 선생을 가족모임에서 만나게 됐다. 이 자리에서 ‘남과 북, 해외가 함께 동요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1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음반 기획을 시작했다.
“원래 음반 3개로 나누어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100곡 정도 선정된 곡 중 거르고 걸러서 35곡밖에 남지 않았지요.”
이것이 분단된 남과 북의 현실이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단어나 메시지 등이 ‘검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음반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이 동요를 함께 들으면서 아이들의 정서가 같아진다면 아이들이 큰 30년 후, 60년 후에는 훨씬 서로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길동무’가 상업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지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동요를 듣나요? 요즘 꼬맹이들도 아이돌 가수 노래 부르던데......”
그는 “우리 사회가 동요를 안 듣지요. 오죽 안 들으면 방송에서 매년 행사를 하겠어요”라면서 “북측도 마찬가지랍니다. 물론 민족교육을 많이 하니까, 상대적으론 더 낫겠죠”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달’이나 ‘고향의 봄’처럼 명곡은 살아남잖아요. 이런 곡들이 본질적인 민족 정서의 기초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동요란 게 일체 치하에서 계몽적 성격으로, 미래의 희망을 위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더 지킬 이유가 잇고 더 질긴 생명력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이들이 이 노래를 길거리에서 흥얼거린다면..."
이번 음반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측에 가서 오랜 기간 머물며 작업을 할 수 없다보니, 한 곡씩 따로 따로 받아서 음반으로 엮어야 했다.
그는 “하나씩 받아오니 음질의 수준이 중구난방이었어요. 남측에서 보면 약간 불안정한 음원이 ‘북한은 못 사니까 그렇다’는 선입관을 줄까봐 고민도 됐어요”라면서도 “앞으로 좋은 기회가 생기면 북측 예술가들이 직접 와서 녹음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아쉽긴 하지만 작업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음반을 발매하는 시점도 고민이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이 적기라고 생각했지만 때마침 천안함 사건으로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언제까지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6.15 10주년 남북해외공동행사가 무산되는 것을 보게 됐다. 그는 “6.15 10주년을 기념해 ‘이 음반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도 성과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6월에 내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음반에는 특별한 의미도 담겨 있다. 일본에서도 점차 민족학교가 줄어들고 이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지고 있어서, 학교들에 음반을 기증하는 것을 동기이자 목적으로 만들게 됐다는 것. 음반 표지그림도 민족학교 어린이들의 전국 미술대회 입상작들이다.
그는 “정세가 좋아지면 음반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뜻을 좋게 봤는지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이 음반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기사가 마치 직접 만난 적도 없는 그와 인터뷰를 한 것처럼 나온 모양이다. 그는 “주변에서 그 기사에 대해 걱정을 하더라구요”라면서 “그만큼 남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이구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됐지요”라고 말했다.
이번 동요음반이 남쪽 사람들에게 생경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동요’에는 남과 북 따로 없는 민족의 정서가 배어있어서 반응이 좋다고 한다.
“아기 있는 친구들이 주로 반응이 많았어요. ‘깜짝 놀랐다. 가사가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다’는 반응이 주로 나오지요. 북측 우리말이 시대적으로 좀 더 옛말이에요. 발랄하고 경쾌하고...... 역시 동요구나, 세월이 가도 크게 단절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 음반을 가장 권해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다.
“이 음반은 사실 어린이들에게 제일 들려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취사선택을 할 위치가 못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음악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 다음엔 부모님 세대에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고요. 길거리를 걷다가 이 노래를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다시 살려야죠.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음반을 내면서 겪었던 우여곡절처럼 그는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힘든 일들이 많았다. 그 동안 추진해왔던 사업도 다 중단돼있는 상태다.
2007년 11월, 12월께 합의를 마치고 서명까지 한 사업만 해도 평양국립민족예술단의 춘향전 최초 내한 공연, 평양 소재 국립조선미술관 소장품 내한전 등이다. 또 북측 영화 15편 정도를 추려서 영화제도 하려고 준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대북정책이 바뀌면서 남북교류가 단절됐고 진행해오던 프로젝트도 모두 멈춰있다.
그는 “현 정부의 남북관계를 대하는 시각이 과거 정책과 달라요. 결과는 단절 또는 대립이지요”라면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3년의 단절 이후 다시 교류를 정상궤도에 올리는 데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어와 민족, 정서가 같은 우리에게 물리적 단절은 한계가 있을 거예요. 특히 우리는 단절을 겪었다가 교류를 맛 봤던 세대 아닌가요” 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중단된 사업들을 다시 살려야죠.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요.”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문화예술 교류를 계속 해가는 이철주 씨.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
“제 마지막 꿈은 부모의 통일, 할아버지의 통일입니다. 형제로, 이웃으로, 선후배로 만나자는 것이죠. 제도, 국가, 정치, 군사 분야의 통일에 대한 관심 보다는 사람의 통일, 이웃의 통일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가 하는 사업이 당장 남북해외의 문화적 차이를 좁혀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교류사업이 서서히, 밑바닥에서부터 정서적 일치성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5년 동안 7장 음반이 1500장 나갔어요. 음반 하나를 내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지요. 들불같이 이러한 의미가 번져나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1장의 음반을 들은 전문 아티스트가 천명이 모인 공간에서 연주를 해 준다면, 그렇게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는 예를 들어 ‘심장에 남는 사람’을 중국의 조선 음식점에서 부르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남쪽 사람들 입에서 흥얼거려졌던 경우처럼, 서로의 깊은 곳에 있는 ‘민족성’ 때문에 그렇게 서로의 문화예술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위해 문화예술 교류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남측이 더 나은 게 기술력과 자본력입니다. 북도 인정하는 장점이지요. 북의 경우엔 예술 자체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개인의 기량이 뛰어납니다. 지금 세계 공연예술, 미술의 대세는 자신만의 정체성이에요. 음악으로는 ‘월드음악’이라 지칭되는 것이 있듯 말이죠. 남과 북은 바탕에 민족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장점을 결합한다면 세계가 인정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 나올 거라고 봐요.”
그는 남북해외가 함께 하는 작품으로 세계무대에서 ‘사고 한 번’ 치는 게 꿈이다.
“북 교예단이 세계 1, 2, 3등 하는데 만약에 ‘태양의 서커스’ 연출자가 포장했다면, 이미 세계적인 작품이 됐을 거예요. 그런데 당장 이러한 프로젝트를 만들려면 3~4년 같이 합숙하고 그러기 어렵잖아요. 그런 부분을 일본 동포예술가들이 해 주면 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작품 하나를 만들고 싶어요.”
그는 “북측에 무용음악 조곡이라는 장르가 있어요. 무용소품을 나열해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인데, 선율이 우아하고 좋아요”라면서 “여기에 남측이 대본 쓰고 북측 안무가가 기본 안무 짜고, 북측 무용수가 무용하고 남측이 의상, 소품 지원하고. 북 무용수들이 365일 다닐 수 없으니까 총련계 출신 무용수들이 함께 해주고...... 저 같은 남측 사업자가 기획해서 애든버러 같은 데 보내는 거죠”라고 말한다.
이처럼 남과 북, 해외가 각자의 장점을 살려 만들어진 작품을 세계에 선보이는 것. 그에겐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꿈”이다.
그는 남북해외 문화교류에 대해 “정대세”라고 표현했다. “정대세는 조선적이고 일본 조선대학교 최고학부 나왔죠. 힙합 디제잉 하고 랩 좋아하죠. 한국에 자주 오고 팬 카페도 있고요 일본 친구도 많고요. 남북해외를 한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대세’ 아닐까요”라는 설명이다.
정대세. 그렇다. 그는 수많은 정대세를 위해서, 오늘도 ‘돈 안 되는 일’에 열성이다. “통일장사꾼은 되지 말자”는 각오를 가슴 한 켠에 새기면서......
통일동요음반 ‘길동무’를 낸 문화기획자 이철주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도,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도, 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남북문화교류사업에 매진한다.
최근 남과 북, 해외 동포가 함께 만든 국내 최초의 통일동요음반 ‘길동무’가 출시(로엔엔터테인먼트)됐다. 이철주 씨가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산하 동요창작단체인 ‘겨레동요애호회’와 함께 만든 이 음반에는 북녘에서 작곡한 동요 12곡과 재일조선인이 작곡한 동요 12곡, 통일을 주제로 한 동요 11곡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곡들엔 평생 재일조선인 문예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해온 김아필 선생의 가사가 담겨 있다. 작곡과 노래, 반주 녹음은 북쪽 예술가 단체와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했다. ‘피바다가극단’과 ‘영화및방송음악단’ 주연들이 직접 노래했고 학생 합창단으로 이름난 ‘평양률곡중학교 합창단’이 참여했다.
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십니까?
“한 장 낼 때마다 3천원 정도씩 손해를 봅니다.”
이 음반의 '진실'은 이렇다. 왜. 왜. 그는 이 ‘손해 보는 장사’를 계속 하는 걸까. 그 사연을 들어보았다.
ⓒ이철주
통일동요음반 '길동무'를 기획한 이철주 대표.
'); }대학 때 탈패 등 문예운동을 했던 그는 문화기획자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면서 살다가, 1999년 남북문화교류 민간 공연인 남북평화음악회를 담당하게 되면서 처음 이쪽 분야에 발을 디뎠다. 그 때만 해도 반공교육의 잔재로 북측 문화예술에 대한 선입견이 컸던지라 직접 북쪽의 예술을 접해보니 “우리의 음악, 미술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꽤 괜찮게 갖고 있었던” 것에 문화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알고 싶다’,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5년 북측의 유일한 국립해외예술단인 총련 산하 금강산가극단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이 분야에 발을 푹 담그게 됐다. 특히 이들은 북쪽이 아닌 동경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일본 전역을 20번 이상은 따라다니면서 보고 공부했다고 한다.
개인사적인 배경도 있다.
“십수년 전 이산가족 찾기로 전국이 눈물바다가 됐을 때, 저도 남과 북을 오가며 편지 전달도 해봤어요. 통일부의 승인을 받고 북측에 사시는 함경도 분의 편지를 받아 제주도에 사시는 친척에게 전달했지요. 저 자신도 이산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면서 뭉클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는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교류가 남북의 동질성을 찾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번 음반을 만들게 된 과정은 특별했다.
“2006년부터 북측의 음반을 꾸준히 냈어요. 대중음악, 클래식, 관현악단 등 시리즈별로 7가지 음반을 냈지요. 공연기획도 많이 했지만 공연은 일회성이어서 사회적인 여파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뭘까. 손이 닿을 곳에 있는 음반이 남북문화교류의 저변을 넓히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남북문화교류사업을 지속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게 해외동포 사업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상 남북 직접교류가 활발해진 2000년대 들면서, 그 전까지 갈라진 남과 북의 오작교 역할을 해왔던 해외동포들에 대한 인식이 수그러든 게 사실이다.
“북측의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고 남북교류협력법에도 규정돼 있는 총련 산하 문화예술인 모임 문예동 분들과 많이 교류를 해왔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일제시절에 일본으로 넘어가신 1세대 분들이 거의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술은 예술가가 돌아가시면 같이 사라지는 운명이거든요.”
그 분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통일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고, 통일에 대한 희망이라도 품고 가실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을 후학으로서 하게 된다는 그.
ⓒ이철주
국내 최초의 통일동요음반 ‘길동무’가 출시됐다.
'); }“원래 음반 3개로 나누어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100곡 정도 선정된 곡 중 거르고 걸러서 35곡밖에 남지 않았지요.”
이것이 분단된 남과 북의 현실이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단어나 메시지 등이 ‘검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음반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이 동요를 함께 들으면서 아이들의 정서가 같아진다면 아이들이 큰 30년 후, 60년 후에는 훨씬 서로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길동무’가 상업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지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동요를 듣나요? 요즘 꼬맹이들도 아이돌 가수 노래 부르던데......”
그는 “우리 사회가 동요를 안 듣지요. 오죽 안 들으면 방송에서 매년 행사를 하겠어요”라면서 “북측도 마찬가지랍니다. 물론 민족교육을 많이 하니까, 상대적으론 더 낫겠죠”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달’이나 ‘고향의 봄’처럼 명곡은 살아남잖아요. 이런 곡들이 본질적인 민족 정서의 기초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동요란 게 일체 치하에서 계몽적 성격으로, 미래의 희망을 위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더 지킬 이유가 잇고 더 질긴 생명력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이들이 이 노래를 길거리에서 흥얼거린다면..."
이번 음반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측에 가서 오랜 기간 머물며 작업을 할 수 없다보니, 한 곡씩 따로 따로 받아서 음반으로 엮어야 했다.
그는 “하나씩 받아오니 음질의 수준이 중구난방이었어요. 남측에서 보면 약간 불안정한 음원이 ‘북한은 못 사니까 그렇다’는 선입관을 줄까봐 고민도 됐어요”라면서도 “앞으로 좋은 기회가 생기면 북측 예술가들이 직접 와서 녹음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아쉽긴 하지만 작업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철주
2009년 겨울 중국 출장 때의 모습.
'); }이번 음반에는 특별한 의미도 담겨 있다. 일본에서도 점차 민족학교가 줄어들고 이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지고 있어서, 학교들에 음반을 기증하는 것을 동기이자 목적으로 만들게 됐다는 것. 음반 표지그림도 민족학교 어린이들의 전국 미술대회 입상작들이다.
그는 “정세가 좋아지면 음반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뜻을 좋게 봤는지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이 음반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기사가 마치 직접 만난 적도 없는 그와 인터뷰를 한 것처럼 나온 모양이다. 그는 “주변에서 그 기사에 대해 걱정을 하더라구요”라면서 “그만큼 남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이구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됐지요”라고 말했다.
이번 동요음반이 남쪽 사람들에게 생경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동요’에는 남과 북 따로 없는 민족의 정서가 배어있어서 반응이 좋다고 한다.
“아기 있는 친구들이 주로 반응이 많았어요. ‘깜짝 놀랐다. 가사가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다’는 반응이 주로 나오지요. 북측 우리말이 시대적으로 좀 더 옛말이에요. 발랄하고 경쾌하고...... 역시 동요구나, 세월이 가도 크게 단절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 음반을 가장 권해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다.
“이 음반은 사실 어린이들에게 제일 들려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취사선택을 할 위치가 못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음악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 다음엔 부모님 세대에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고요. 길거리를 걷다가 이 노래를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다시 살려야죠.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음반을 내면서 겪었던 우여곡절처럼 그는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힘든 일들이 많았다. 그 동안 추진해왔던 사업도 다 중단돼있는 상태다.
2007년 11월, 12월께 합의를 마치고 서명까지 한 사업만 해도 평양국립민족예술단의 춘향전 최초 내한 공연, 평양 소재 국립조선미술관 소장품 내한전 등이다. 또 북측 영화 15편 정도를 추려서 영화제도 하려고 준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대북정책이 바뀌면서 남북교류가 단절됐고 진행해오던 프로젝트도 모두 멈춰있다.
그는 “현 정부의 남북관계를 대하는 시각이 과거 정책과 달라요. 결과는 단절 또는 대립이지요”라면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3년의 단절 이후 다시 교류를 정상궤도에 올리는 데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어와 민족, 정서가 같은 우리에게 물리적 단절은 한계가 있을 거예요. 특히 우리는 단절을 겪었다가 교류를 맛 봤던 세대 아닌가요” 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중단된 사업들을 다시 살려야죠.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요.”
ⓒ이철주
금강산가득단 무용부.
');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문화예술 교류를 계속 해가는 이철주 씨.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
“제 마지막 꿈은 부모의 통일, 할아버지의 통일입니다. 형제로, 이웃으로, 선후배로 만나자는 것이죠. 제도, 국가, 정치, 군사 분야의 통일에 대한 관심 보다는 사람의 통일, 이웃의 통일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가 하는 사업이 당장 남북해외의 문화적 차이를 좁혀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교류사업이 서서히, 밑바닥에서부터 정서적 일치성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5년 동안 7장 음반이 1500장 나갔어요. 음반 하나를 내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지요. 들불같이 이러한 의미가 번져나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1장의 음반을 들은 전문 아티스트가 천명이 모인 공간에서 연주를 해 준다면, 그렇게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는 예를 들어 ‘심장에 남는 사람’을 중국의 조선 음식점에서 부르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남쪽 사람들 입에서 흥얼거려졌던 경우처럼, 서로의 깊은 곳에 있는 ‘민족성’ 때문에 그렇게 서로의 문화예술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위해 문화예술 교류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남측이 더 나은 게 기술력과 자본력입니다. 북도 인정하는 장점이지요. 북의 경우엔 예술 자체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개인의 기량이 뛰어납니다. 지금 세계 공연예술, 미술의 대세는 자신만의 정체성이에요. 음악으로는 ‘월드음악’이라 지칭되는 것이 있듯 말이죠. 남과 북은 바탕에 민족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장점을 결합한다면 세계가 인정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 나올 거라고 봐요.”
그는 남북해외가 함께 하는 작품으로 세계무대에서 ‘사고 한 번’ 치는 게 꿈이다.
“북 교예단이 세계 1, 2, 3등 하는데 만약에 ‘태양의 서커스’ 연출자가 포장했다면, 이미 세계적인 작품이 됐을 거예요. 그런데 당장 이러한 프로젝트를 만들려면 3~4년 같이 합숙하고 그러기 어렵잖아요. 그런 부분을 일본 동포예술가들이 해 주면 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작품 하나를 만들고 싶어요.”
그는 “북측에 무용음악 조곡이라는 장르가 있어요. 무용소품을 나열해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인데, 선율이 우아하고 좋아요”라면서 “여기에 남측이 대본 쓰고 북측 안무가가 기본 안무 짜고, 북측 무용수가 무용하고 남측이 의상, 소품 지원하고. 북 무용수들이 365일 다닐 수 없으니까 총련계 출신 무용수들이 함께 해주고...... 저 같은 남측 사업자가 기획해서 애든버러 같은 데 보내는 거죠”라고 말한다.
ⓒ이철주
쟁강춤 공연 장면.
'); }이처럼 남과 북, 해외가 각자의 장점을 살려 만들어진 작품을 세계에 선보이는 것. 그에겐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꿈”이다.
그는 남북해외 문화교류에 대해 “정대세”라고 표현했다. “정대세는 조선적이고 일본 조선대학교 최고학부 나왔죠. 힙합 디제잉 하고 랩 좋아하죠. 한국에 자주 오고 팬 카페도 있고요 일본 친구도 많고요. 남북해외를 한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대세’ 아닐까요”라는 설명이다.
정대세. 그렇다. 그는 수많은 정대세를 위해서, 오늘도 ‘돈 안 되는 일’에 열성이다. “통일장사꾼은 되지 말자”는 각오를 가슴 한 켠에 새기면서......
ⓒ이철주
2007년 공연 참석자들.
'); }정지영 기자jjy@vop.co.kr
Copyrights ⓒ 민중의소리 & vop.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