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모르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길거리 맥도널드 매장 앞에서 웬 여자가 울면서 노란 머리 외국인을 붙잡고 물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어느 누가 이 상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 영어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지금 영어를 안 하면 미칠 것 같아요.”
ⓒ민중의소리 양지웅 기자
영화배우 조성은
'); }이 여자가 태어난 곳은 한국인데,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줄곧 인도네시아에 있었다. 단지 태어난 곳만 한국이었다.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서 살던 엄마는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나야지’라는 생각에 잠시 출산을 위해 귀국했다가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여자와 5살 위 오빠, 엄마, 그리고 아빠 4명의 단란한 가족은 5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엄마는 염창동에 약국을 열었고 오빠는 학교에 들어갔다. 할머니 손에 키워진 여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다시 미국으로 간다. 아빠가 무역일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가족 모두 미국으로 가게 된 것. 그리곤 고등학교 때까지 미국생활을 했다. 초중고 모두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여자는 사실상 ‘미국 청소년’으로 성장해갔다. 국기는 ‘성조기’였고 나랏말은 ‘미국말’이었다. 가족들과 한국말을 썼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에서 쓰는 말은 영어였다. 별 탈 없이 여자는 성장했다.
“카 디자이너가 꿈이었죠. 초등학교 때 렉서스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차를 그렸는데, 꿈이 돼 버린 거에요.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돼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수강신청이 늦어서 어쩔 수 없이 정신지체.장애 전담 선생님의 보조역할을 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많은 걸 배웠거든요.”
여자의 지금 직업은 영화배우다.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용의자들의 미군 변호사 역을 맡았던 조성은(25)씨. ‘아빠는 여자를 좋아해’에서 섹시한 여배우 역할을 했고 드라마 ‘두 아내’와 ‘남자이야기’에 출연했던 신인여배우다.
잠깐, 여기까지 보면 조성은은 최근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교포2세’로 생각될 수 있겠다. 오해는 빨리 푸는 게 좋은 법. 조성은의 진짜 스토리는 이제 시작된다.
ⓒ민중의소리 양지웅 기자
영화배우 조성은
'); }성은은 2001년 말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당연히 미국 대학이었다. 등록금까지 다 냈던 성은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다. 영주권은 물론 비자도 안 나온다는 것이다. 911테러 때문에 심사가 엄격해졌기 때문. 500명 중 1명에게 생길까 말까 하는 일이란다. 성은은 원피스 하나 달랑 입고 한국에 왔다.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그 때만 해도 성은은 한국에 ‘놀러 오는 줄’ 알았다. 대사관에서 오빠가 화를 냈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어떻게 대학을 한국에서 가라는 거냐.”
아버지와 오빠, 성은은 터덜터덜 대사관을 나왔다. 아버지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오빠의 한 마디만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우리 미국에 못간데.” 하늘이 노래졌다. 성은은 그렇게 한국에 눌러앉게 됐다. 초등학교를 한국에서 보낸 오빠는 한국말도 능숙했고 한국에 초등학교 친구들도 있었지만 성은은 달랐다. 성은에게 한국은 ‘낯선 땅’이었다.
대학을 가야했다. 언젠가 미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성은은 한국외대 스페인어과를 선택했다. “제가 살던 LA에 멕시칸이 많이 살고 있어서 스페인어를 배워두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대학생활이 시작됐지만 도통 즐겁지가 않았다. 우선 한국말이 서툴렀다. ‘심한 본토발음’을 쓰는 영어 때문에 놀림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왜 싫어할까.’ 활달한 성격도 바뀌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을 만나기도 두려웠다. 무엇보다 영어를 쓸 수 없는 생활이 너무 답답했다. 10년 동안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영어로 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벙어리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우울증까지 겪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길거리를 지나는 외국인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을까.
적응하기로 했다. 친구도 사귀고 학과 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성은을 챙겨주는 선배들도 생겼다. 성은의 스토리를 알고 나서 성은을 굳이 ‘왕따’ 시킬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한국생활 6년 동안 성은은 스페인, 일본, 싱가폴 곳곳에 가봤다. “이상하게 미국에 안 가봤어요. 신기하죠.” 성은이 미국을 다시 찾은 건 최근의 일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친구들보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죠.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10년동안 미국에 살면서 당연히 ‘국기’라고 생각했던 성조기가 왜 그렇게 어색했던지. 성장과정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정작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열아홉살, 스무살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고 꿈을 한국에서 키워서 그런지 저는 천성 ‘한국사람’이더라고요.”
데뷔작이 ‘이태원 살인사건’이었다. 인터뷰도중 ‘조중필 사건’은 물론 ‘윤금이 사건’ ‘미선효순 사건’ 등에 대해 설명해줬다. 성은은 놀랐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요. 주권 국가가 말이죠. 미국이 그런 짓을 하는 나라였다니.”
성은이 ‘이태원 살인사건’을 택한 사연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오디션을 보는데 ‘영어’가 많아 성은에게 해석을 부탁했던 것. 성은은 자기도 오디션을 보게 해 달라고 졸랐다. 나중에 성은이 따낸 ‘낸시’역에는 혼혈인을 캐스팅할 예정이었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던 성은은 미국에서 살다온 혼혈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오디션을 봤다. 일부러 화장도 하지 않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애써 혀를 굴려가며 ‘교포 흉내’를 냈다가 결국엔 실토를 했다. 하지만 배역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성은의 정성이 통했는지 캐스팅됐다.
ⓒ민중의소리 양지웅 기자
영화배우 조성은
'); }이제 20대 중반인 성은은 부모님께 돈 받는 게 싫다고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고 저녁에는 연기학원에서 공부를 한다. 사실 성은은 통역일로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데다 방송 경력으로 프리젠테이션이나 각종 론칭쇼에서 발휘할 실력까지 갖고 있다.
성은은 오는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될 LG전자의 모바일 런칭쇼에서 통역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를 진행하는 엑스오비스라는 회사에서 성은은 직원들 영어수업까지 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성은의 꿈은 여전히 ‘연기자’다. 갑자기 섭외가 들어오면 곧바로 미팅을 해야 되는 ‘신인배우’ 입장에서 성은은 회사에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신인연기자들은 정말 힘들어요. 결과라는 게 보이지 않으니까. 월급이 없으니까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하고. 부모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새벽부터 일어나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는 응원을 해주시는 편이에요.”
사실 연기자라는 직업은 ‘노력’만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분야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때를 잘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 대학시절부터 연기자를 위해 노력해 온 성은도 졸업하면서는 고민이 많았다. 어학을 공부했고 이런 저런 경험을 토대로 취직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길도 보였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탑이 안되면’ 누가 알아주고 수고했다고 얘기해줄까. 그런데 말이에요. 매일같이 괴롭고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탑’이 되면 그게 행복한 삶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거예요.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죠.”
ⓒ민중의소리 양지웅 기자
영화배우 조성은
'); }인터뷰는 밤 9시가 넘어서 진행됐다. 11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성은과 매니저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성은은 보이그룹 2PM의 준수와의 에피소드, 배우 오광록과의 스토리, 박용하와의 이야기 등 ‘연예 뉴스’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줬다. 하지만 ‘신인배우 조성은’의 인생 자체가 영화인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자신의 삶을 자신 있게 내보일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빛난다. 성은의 눈빛도 빛났다. 오늘을 위한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오늘을 즐겁게 살아가는 청춘 조성은. 세상이 그를 기억해 줄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덧붙임:‘조성은’이라는 사람을 사전 조사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환경 조성은’이라는 내용이 너무 많았다. 예명은 생각 안 해보셨냐고 물었더니 미국에서 쓰던 이름을 쓸까, 예명을 지어볼까 하다가 그냥 자기 이름을 쓰기로 했단다. 참 불리한 케이스다. 그래도 검색하면 연기자로 이름이 먼저 뜨니 다행은 다행이다.
<김동현 기자 mailto@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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