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별명, 더듬이.
말수가 적은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몸으로 아니 정확히는 손으로 표현한다. 학창시절에 남자 선후배들을 더듬기 좋아하여 더듬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 요즘 같으면 참으로 위험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민중의소리
황중환씨가 815 통일대회 장소에서 어색하지만, 사람좋게 웃고 있다
'); }폭염이 내리쬐는 815 통일행사 현장에서 황중환(35)씨를 만났다.
충북 옥천의 농민이자 5살 재민이와 18개월 된 재윤이 남매의 아빠인 중환씨는 특유의 온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사람 좋은 웃음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경북 포항의 농촌에서 나고 자라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학과에 들어온 그는 문학회에 가입한 것이 인연이 되어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1, 2학년 때는 이른바 ‘택(지시)’이 떨어지면 바로 출동을 하는 ‘5분 대기조’였다.
“세보니까 제가 1, 2학년 때 각종 긴급한 투쟁을 나간 것이 20여 차례더라고요.”
94년은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UR)를 명분으로 협상도 하기 전에 쌀 수입개방을 하겠다고 나선 해였고 95년은 분단 반세기를 넘기지 말자는 ‘통일원년’이었다. 그는 ‘데모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중환씨는 97년 초 갑작스럽게 군입대를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연말에 고향에 갔는데 1월 4일자 입대영장이 나와 있었다.
“형이랑 삼촌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동지들을 떠나 마음이 무거웠다. 운동을 포기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99년에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학교는 이미 이전의 학교가 아니었다. 한총련은 97년 이적단체가 되고 학생회장과 간부들은 학교 안에 피신해 있거나 이곳저곳 숨어 다녔다.
중환씨는 후배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복학도 하기 전에 단과대 일을 시작했고, 2001년에는 부총학생회장이 되었다. 부총학생회장으로 추대된 이유를 물었더니 “학교에 사람이 없더라”며 웃었다. 티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중환씨가 부총학생회장으로는 적격이 아니었을까?
중환씨에게는 96년 입대 전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과에 동기인(둘 다 재수를 해서 나이도 동갑이다) 장윤성씨도 동아리와 학생회 활동을 같이 했으나 중환씨가 제대할 즈음엔 활동을 접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환씨가 복학하고 부총학생회장 출마할 때 윤성씨는 반대했단다.
“학생운동 하던 당시에는 왠지 시간 내서 따로 만나면 안 될 것 같고 연락도 안하고 무심했어요. 다시 그런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싫어했죠.” 중환씨의 말이다.
윤성씨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환씨가 군대에 있는 동안 더 자주 만나고 편지 주고받았다고 한다. 중환씨의 빡빡하고 조금은 경직된 생활이 보이는 듯하다.
사실 사람 좋은 중환씨지만 원칙에서는 늘 ‘칼’이었다. 중환씨 2학년 때 농활 규율부장을 맡았었다. 농활 중간에 다들 지치고 마음이 갈라져서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함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20명이 넘는 사람이 1인당 소주 뚜껑 한 잔씩 마시는 것에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이 그였다. 금주가 규율이었기 때문에.
헤어질 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중환씨가 앞으로 잘 하겠다고 싹싹 빌고 실제로 배려하는 노력을 하면서 윤성씨가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2002년 학교를 정리하며 중환씨에게는 새로운, 아니 오래된 꿈이 있었다.
그는 한국농업전문학교(지금의 한국농수산대학, 약칭 한농대)에 입학했다. 중환씨는 “제대로 배워서 농사를 잘 짓고 싶었다”고 한농대에 들어간 이유를 말했다.
한농대 입학으로 진로가 농민운동으로 정해졌는데 두렵거나 싫지는 않았을까? 중환씨는 “대학 들어오면서부터 앞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땀 흘려 농사짓는 농민들을 존경했고, 살던 곳이 농촌이라 막연하게 농촌이 좋았단다.
윤성씨는 어땠을까? 다 늙은 예비역이 학교를 다시 들어가고, 그것도 졸업하면 농사를 짓겠다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향이 서울 신설동인, 전형적인 도시 아가씨 윤성씨가 ‘농사꾼 아낙네’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윤성씨는 연애할 때부터 중환씨가 농민운동 할 것을 알았다. 또 윤성씨도 운동을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월급 하나 바라보는 ‘영혼 없는 삶’을 살다가” 차라리 농촌으로 간다니 좋았단다. 이런 걸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하는 걸까?
“무엇이든 네가 행복한 것을 해라. 그럼 나도 힘닿는 대로 돕겠다” 윤성씨가 당시 중환씨에게 건넨 말이다. 터프하면서도 깊은 정이 느껴진다. 이 말대로 윤성씨는 일가족이 농촌으로 내려가 자리 잡는 동안 살림살이에 퇴직금을 다 쏟아 부었다. 그래도 후회가 없단다.
ⓒ민중의소리
중환씨, 윤성씨 부부의 웃는 모습만 봐도 두 사람의 성격을 알 것 같다
'); }중환씨가 입학한 한농대는 좀 특수한 학교다. 3년제 국립학교로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고, 2학년 때는 10개월 정도 농촌으로 직접 현장실습을 나간다.
당시엔 현장 실습과 기숙사 생활에서 비인격적인 대우가 만연했다. 40만원 받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슴처럼 일하는 현장실습에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학생들이 단체행동을 한 끝에 지금은 인격적인 대우가 많이 좋아졌단다.
중환씨가 한농대를 다니던 때에는 WTO 무역개방을 막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이 정점에 오를 때였다. 역시 그는 ‘데모운’이 따랐다.
1학년 때는 이경해 열사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하셔서 친구들과 공항까지 나가 운구를 맞이했고 장례식도 같이 참가했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한농대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워낙 ‘예비농민’인 한농대 학생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3학년 때는 경찰의 농민대회 과잉진압으로 전용철 열사가 돌아가셨다. 사건이 미궁에 빠질 뻔 했으나 민중의소리 사진 한 장으로 경찰의 폭력 타살임이 드러난 것으로 유명하다.
“2박 3일 동안 친구들과 노숙농성을 하며 지하철에서 대시민 선전전을 했어요” 중환씨와 친구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허준영 경찰청장이 사퇴했다.
한농대를 졸업하면서 시골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미 중환씨가 3학년 때인 2005년에 결혼을 하여 재민이를 낳아 식구도 셋이었다. 중환씨는 왜 고향 대신 타지를 선택했을까?
“부모님이 기껏 대학 보내놨더니 농사짓는다고 반대가 심하셨어요” 중환씨의 말이다. 하긴 고향 내려간다고 집이며 땅을 쌓아놓고 기다리는 형편도 아니었다.
한 해를 헤맨 끝에 충북 옥천에 자리 잡았다. 젊은 부부가 농사짓고 살아보겠다는 뜻을 좋게 보고 땅과 집을 좋은 조건에 알아봐준 분을 만난 것이다.
중환씨는 이제 옥천에서 4년째 농사를 짓는다. 다들 그렇듯 논농사에다 감자, 옥수수, 밀 등을 조금씩 한다. 농민으로서의 성적을 물었다. “아직까지는 그때그때 쓰는 정도밖엔 안 된다”며 “그래도 빚은 별로 없다”고 웃는다. 사실 영농자금을 빌리려 해도 중환씨네는 한도액이 높지 않아 빚도 많이 질 수 없단다.
옥천으로 농활을 다녀온 덕성여대 남영화(문화인류학과 4)씨는 중환씨를 보더니 덥석 ‘형님’이란다. 그녀에게 옥천군 농민회 연대사업부장이기도 한 중환씨에 대해 물어보았다.
“학생들 잘 챙겨주면서도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고 농민, 학생 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다”고 말한다. 물론 그보다는 “국토대장정할 때 쌀 100kg과 막걸리에 간식까지 보내준” 것이 그들이 형님을 좋아하는 더 큰 이유일 것 같긴 하다.
중환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윤성씨에게 물어도 대답은 비슷하다.
“사람 좋고 예의바르고 성실한 농사꾼이고 좋은 아빠예요” 그러면서 윤성씨는 아마 중환씨는 태어나기 전에 농사꾼으로 딱 정해져 있는 사람 같단다.
기자가 보기에 윤성씨는 태어나기 전부터 농사꾼 아내로 딱 정해져 있는 사람 같다. 9년의 연애 끝에 농촌으로 가자고 한 사람에게는 스스럼없이 좋다고 나선 사람이 꼭 맞춤이다.
진짜 농사꾼 티가 확 나는 중환씨가 농사와 농민회 활동과 가족의 행복까지 3모작을 잘 짓기를 기대한다.
<고희철 기자 khc@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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