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켜보면 김준모(40) 청솔노인요양센터 대표의 삶에는 이런저런 굴곡이 많았다.
안동대 90학번인 그는 대학때는 만날 데모만 했다. 대학 2학년때인 91년에는 단짝 친구가 분신을 했다. 집회 나갔다가 잡혀가 감옥도 갔다 왔다. 졸업 후에는 농사 짓는 선배 집에서 머슴(?)을 살며 시골에 정착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래 연애를 한 연인과 결혼을 못할 것 같아 다시 도시로 나와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갑갑한 일상이었다. 마침 그의 결혼 주례선생님이셨던 양재덕 전국연합 인천연합 의장의 요청으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일을 돕게 됐다. 그렇게 사회복지쪽 일을 접하게 됐고,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하고 싶어 뒤늦게 대학에 편입해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그후 인천남동자활후견기관에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간 일했다. 그리고 현재의 청솔노인요양센터를 만들고 2년째 꾸려가고 있다.
ⓒ추주형 월간 전문기자
김준모 청솔노인요양센터 대표
'); }대략 정리한 김 대표의 20년간의 인생 약사다. 딱 봐도 굴곡이 많다. 고비고비마다 새로운 선택을 하는 그를 보며 그의 친구들은 "참 어려운 결정을 했구나"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친구들의) 그런 말이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나는 흘러가는대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지향하는 일정한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갈림길은 있었지만 내가 가려는 길에서 길이 보이면 가는 거죠. 그리고 생활이면 살아지는 거잖아요."
분신한 친구에 대한 부채 의식
김준모 대표의 인생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변곡점은 안동대 민속학과 동아리 '민속문화연구회'와 그곳에서 만난 대학 동기 김영균의 죽음이다. 민속문화연구회는 90년에 1학년이었던 김영균과 김준모 등 몇몇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다. 모임 창립은 고등학생때부터 전교조 지지운동을 했던 김영균이 주도했다.
"김영균 그 친구가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면서 풍물을 좋아하는 얘한테는 풍물을 중심으로 할 거라고 하면서 꼬시고, 책 읽기를 좋아한 나한테는 독서토론 중심으로 활동을 할 거라고 꼬시고, 그러면서 모임을 만들었죠. 그러다보니 그런 활동을 다 하게 됐죠. 또 민속연희 중에 마당극이 있으니 그걸 해보자고 해서 마당극도 하고. 당시 마당극이라는 거는 주로 시위하는 현장에서 극을 하다 연행되고 그랬죠."
자연스럽게 민속문화연구회 멤버들이 모두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운동권에겐 교과서와도 같았던 변증법적 유물론,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등도 같이 읽고 토론했고, 그러면서 소위 빨간물이 들었다. 민속문화연구회 멤버들은 수업시간 외에는 항상 붙어다녔다. 학술토론, 마당극, 풍물, 여기에 매일 저녁 술자리까지, 함께 도모하는 일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91년 5월 1일 그의 친구 김영균이 분신했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였다고 한다. 김영균은 이틑날 숨을 거뒀다. 당시는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무자비한 곤봉과 군화발 세례로 숨지고 나서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지던 때였다.
"그 친구 분신하고 나서 분신 배후설이 나돌고, 선배들이 안기부에 잡혀가서 분신배후 수사를 받았어요. 결국 분신배후는 안 나오니까 조직사건을 만들었죠. 사실 당시 저는 운동에서 발을 빼볼까 이러고 있었는데, 책에서만 읽었던 사회모순 이런 거를 실제로 당하다보니까 발이 완전히 묶여 버렸죠. 친구가 죽은 부채의식, 그게 상당히 컸을 거예요."
김준모 대표는 현재까지도 죽은 친구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른 부채는 돈을 갚으면 되는데, 이런 부채는 갚을 대상이 가 버리고 없으니 얼만큼 갚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채의식으로 그는 그가 발을 빼려고 했던 운동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생활이니까 살아지는 거죠. 소박한 꿈도 있고요"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 더불어 잘사는 꿈을 꾼다는 것은,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다소의, 아니 실상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김준모 대표도 "제일 어려운 것은 생계 문제다. 애들이 커 가면서 교육비도 많이 들어가고 전세도 탈출해야 하고, 그런데 이쪽 일이 들이는 공력에 비하면 급여는 너무 적은 게 현실"이라며 "아무래도 어렵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게 제일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분야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생활이기 때문에 살아지는 것"도 있지만, 일종의 소명의식도 있고, 여전히 꿈도 있기 때문이다. 김준모 대표의 소박한 꿈은 우선 청솔노인요양센터의 규모를 키워서 요양보호사들 입장에서 센터를 좋은 일자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요양 서비스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아가서는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 장애인과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게 꿈이라면 꿈이다.
"사실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보호사 분들의 일이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최소한 다른 센터 처럼 스트레스를 주거나 부당한 대우를 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준모 대표는 고생하는 요양보호사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하는 한편, 센터 운영에서도 편법없이 정공법으로 승부하고 있다. 일례로, 휠체어 등 복지용구 같은 경우 정부 부담 85%, 본인부담 15% 룰을 이용해 장사꾼식으로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본인부담금이 없는데, 이를 이용해 복지용구 사업자가 수급자에게 10만원 짜리 휠체어를 주고는 정부에는 50만원짜리 휠체어를 수급자에게 지급했다고 하고 비용을 청구하는 식이다. 그래서 1년 전에는 아예 복지용구 매장을 센터 한 켠에 직접 오픈했다.
"복지부에서 장기요양제도를 도입하면서 복지용구 매장 진입장벽을 낮춰놨어요. 인천 남동구만 해도 요양보호사들이 가정에서 환자를 돌보는 재가장기요양기관이 100여 개가 넘는데, 시장이 과열되다보니까 장사꾼 식으로 하는 곳이 많죠. 저희는 매장을 차리기 전에는 (수급자 등 필요하신 분에게) 매장을 연결해 드렸는데, (연결해 주면) 커미션을 준다는 데도 있었어요. 그래서 커미션은 안 받으니 정 주고 싶으면 5% 적립해서 (수급자분들한테) 돌려 쓰는 방향으로 하던지 알아서 하라고 하기도 했죠."
인터뷰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네 청솔입니다. 지금 환자분 상태가 어떠신데요?"
"현재 뇌병변이세요? 어떻게 발생했는데요? 수술 후유증인가요?"
"혹시나 장기요양 신청해 보신 적 있으세요? 뇌병변은 65세 되기 전에도 신청 가능하거든요."
김준모 대표가 친절히 상담을 해줬다. 그는 박봉의 사회복지 관련 일을 계속 해 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가족도 등한시 하고, 불친절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이래서 그러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준모 대표의 소박한 꿈에 응원을 보낸다.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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