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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불운, 사후의 영광

<월간말>[유재하 추모20주년] 유재하의 삶

임진모 / 음악평론가

입력 2007-10-25 11:06:01 l 수정 2007-10-30 16:26:03

생전의 불운, 사후의 영광

유재하ⓒ월간 말


1960년대 당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미국의 루 리드(Lou Reed)라는 음악가는 30년이 흐른 1990년대에 가서야 마법처럼 부활해 제대로 된 평가와 대중의 인정을 획득했다. 그가 과거에 몸담았던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1967년 첫 앨범을 냈을 때 비틀스와 밥 딜런의 음악도 따라가기 바빴던 그 시절의 대중은 그들의 존재를 새까맣게 몰랐어도 평단과 뮤지션은 앨범의 우수성을 알아봤다. 때문에 그 앨범을 두고 누군가가 던진 다음과 같은 한마디는 지금도 새롭다. “그 앨범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 음반을 산 사람들은 모두 밴드를 결성했다.”

만약 이 말을 우리의 음악가에 적용한다면 그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1987년, 스물다섯의 새파란 나이에 못다 핀 꽃 한 송이처럼 세상을 떠난 유재하라는 이름의 음악가가 될 것이다. 그는 딱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그해 11월 1일 술 취한 친구의 차를 타고가다 택시와 충돌하는 사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 한 장의 유작 앨범은 당시 우리가 기억할 만한 인상적인 반응을 결코 얻지 못했다. 하지만 루 리드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이 그랬듯이 새로운 시도와 창의로 가득한 이 앨범의 진가를 음악가들은 즉각적으로 알았으며 또 놀라움에 넋을 잃었다. 앨범을 들은 후배 음악지망생들은 일제히 자신도 ‘유재하와 같은 음악’을 하기를 꿈꾸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앨범 뒷면에 ‘작사, 작곡, 편곡, 유재하’라고 써있는 것에 일대 충격을 받았다.

작사, 작곡을 혼자서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쓰는 것 외에 그 곡을 평면적인 악보로 옮기는 실제 작업, 즉 편곡까지 혼자서 해낸 음반은 유재하 이전에는 없었다. 편곡을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앨범을 완전한 자기 작품으로 빚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음악적 자주(自主)’의 완전한 실현이다. 자신의 독자적 상상력을 앨범이라는 실체로 꾸려내는 음악가에게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까지 도맡아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성질의 것이 아닌, 실로 원대한 꿈이었다.

음악적 자주를 향한 몸부림

충격을 받은 후배음악가 중에는 훗날 최고의 발라드 가수가 된 신승훈도 끼어 있었다. 신승훈은 “그의 유작 앨범에 작사, 작곡, 편곡자가 쭉 유재하로 써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술회한다. 공교롭게도 그는 유재하가 사망한 날과 같은 1990년 11월1일에 데뷔한다. 신승훈과 같은 후배가수들, 아니 동시대에 함께 활약했던 동료가수들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유재하를 가리켜 ‘천재’라는 말을 붙인다.

하지만 천재의 삶은 불행하다고 했던가. 그는 살아생전 천재에 걸맞은 영예를 조금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유일한 유작이 된 앨범을 발표했을 때 많은 방송관계자들은 “가수의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통속적인 멜로디가 없는데다 가수는 마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노래하는 게 의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송사의 가수에 대한 심의에서도 떨어지는 불운을 맛봤으며 당연히 앨범이 한참 후에야, 그것도 미약한 수준의 반응이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 교통사고에 의한 이른 죽음은 불운과 미완으로 점철된 그의 삶에 찍은 잔인한 비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 유일청(1989년 작고)과 어머니 황영 씨 사이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나름의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삼선중학교시절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스(Beatles), 등의 대중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고 한다(이것이 스스로 편곡을 할 수 있는 토대였다). 가요와 팝 음악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그 시절 유재하는 클래식으로 진로를 선택했고 한양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시절에 벌써 음악에 대한 빼어난 창의력이 음악계에 알려지면서 4학년 때인 1982년, 당대 최고의 가수 조용필의 백업밴드인 ‘위대한 탄생’에서 건반주자로 활약하게 된다. 비록 활동기간은 학교의 간섭으로 2개월에 그쳤지만 종래의 음악과는 패턴이 전혀 다른 그의 진보적인 곡에, 늘 앞서가고자 했던 조용필도 주목했다. 그 곡이 조용필의 7집에 수록되어 한때 라디오전파를 잠식한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유재하는 나중에 독집의 타이틀도 ‘사랑하기 때문에’로 내건다.

'유재하 사단'의 등장

대학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었던 전태관이 속해있던 밴드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팀을 나가버렸다. 전태관은 이에 대해 “유재하가 비장의 곡이라고 여긴 여러 곡을 내놓았지만 김현식이 단 한 곡인 ‘가리워진 길’만을 채택하자 상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라고 훗날 술회했다.

자신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고민한 유재하는 스스로 독집을 내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의 이상향은 곡쓰기, 편곡, 연주 등 음악의 모든 작업을 독자적으로 해내는, 말하자면 음악적 상상력을 완벽하게 앨범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실로 ‘음악적 자주’라는 야망을 좇는 힘겨운 비행이었던 셈이다. 무명의 긴 시간은 ‘지난 날’이 서서히 전파를 타고 팬들의 사랑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면서 끝날 듯 했지만 얼마 후 그는 마치 애처로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훌쩍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이른 생을 마감한 그의 불우를 대가로 우리 음악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모양새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는 과분한 영광을 얻었다.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려 유희열, 조규찬, 심현보 등 그의 영향을 받은 음악 인재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이외에도 유영석, 한동준, 김광진, 김동률, 나원주 등 많은 후배 음악가들을 두고 사람들은 ‘유재하사단’이라고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우리 음악가의 이름 뒤에 사단이란 거창한 말이 붙은 사람은 신중현과 유재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발라드의 문법은 지금도 우리 음악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특히 작곡지망생들에게는 ‘필생의 로망’이다. 누군가는 “한국의 음악계는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다. 생전의 불운은 어느새 사후의 영광으로 바뀌었다. 올해 사후 2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음악가들의 그리움을 한층 깊어질 것이다. 그리움은 1987년 11월1일에 바로 그날에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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