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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진은 누구인가?

브라질 이민에서 감옥생활까지

기자

입력 2007-11-26 16:15:03 l 수정 2007-11-26 16:15:03

90년 대 초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남미 축구 최고의 영웅은 콜롬비아의 ‘사자머리’ 카를로스 발데라마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발레라마와 함께 세계 최강의 공격 라인을 구성하여 콜롬비아 국가대표팀을 세계 정상, 나아가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올려놓은 선수가 야스프리아와 프레디 린콘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니 이 영웅들도 인생의 부침을 겪었다. 프레디 린콘은 브라질에 살면서 자신이 명목상 대표를 맡았던 어업회사의 주인이 대형 마약 밀매업에 연루되어 작년 한때 연방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프레디 린콘에게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그는 유치장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지금은 그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프레디 린콘은 방송에서도 “그는 나의 영웅이며 인생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한다. 프레디 린콘은 우크라이나의 국가대표 디오고 린콘이 너무 존경하여 자기 이름도 그의 것에서 따왔을 정도로 걸출한 축구 스타다.

남미 축구 영웅의 영웅

그런 프레디 린콘도 영웅으로 모시는 인물이라니?
그는 바로 브라질의 한국교포 전종진다. 린콘이 전 씨를 처음만났을 때 그는 한국과 브라질 간에 체결된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한국 송환대상이 되어 브라질 연방 경찰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시간은 3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안성이 고향인 전종진은 경희중학교에 다니던 1975년 즈음 그의 가족과 함께 무작정 남미 이민바람을 타고 브라질로 건너갔다. 영문도 모르고 브라질로 건너간 전종진은 곧장 고생길에 올라탔다.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가족 중에는 가장 빨리 포르투갈어를 익힐만큼 적응이 빨랐던 전종진은 곧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997년 4월, 광주 아시아차 공장을 방문한 전종진

1997년 4월, 광주 아시아차 공장을 방문한 전종진



그가 어린 나이에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생업은 봉제공장 바느질이었다. 지금도 ‘어떤 오버로크(박음질)든 한 뽕에 박는다’고 자신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족 부양이 어려웠다. 전종진은 누나와 함께 옷 보따리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 판매를 다니기 시작했다. 두 동양인 청소년이 들고 있는 옷보따리를 본 집 주인들은 곧장 문을 닫아 버렸다.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한 번 입어 봐라. 일주일 뒤에 다시 와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돈 안 받고 옷도 그냥 주겠다”는 공격적 마케팅(?)을 통해 꽉 닫힌 대문들을 열어 젖혔다. 스물 한 살이 됐을 때,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옷을 납품하던 교포 상점의 딸과 결혼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타고난 장사 수완을 발휘한 그는 20대 초부터 자신이 일하던 공장을 인수하는 등 촉망 받는 사업가가 되었다. 상파울로 시내에 약 100여개의 상점을 차려 옷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성공한 교포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도 브라질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모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자 했다. 90년 대 초, 아시아자동차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고 AMB(Asia Motors do Brazil)라는 수입회사를 차려 한국에서는 별반 인기가 없었던 타우너와 토픽을 브라질 시장에 팔게 된다. 전종진은 당시 브라질의 대통령 페르난도 카르도소의 딸에게 타우너를 제공하여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는 수완을 부렸다. 그가 설립한 AMB는 브라질에서 자동차 수입 업체 중 매출 1위, 전체 기업을 통틀어도 50위 안에 꼽히는 규모로 급성장했다. 한 달 판매량이 많게는 2700대까지 기록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닥친 것은 1995년에 브라질 정부가 수입차 관세를 70%까지 물리는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1997년 아시아자동차의 모기업인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나자 차량을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하면서부터다. 98년 11월 여의도 소재 아시아자동차 본사에서 개최된 AMB 경영위원회에 참석한 후 대회의실을 빠져 나오던 그는, 그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전종진은 브라질에서는 상당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초등학교도 중퇴한 보잘 것 없는 처지였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하도 어이없는 혐의를 캐묻는 검사의 멱살을 잡고 싸울 만큼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1심에서 7년 징역을 선고받고 현대차와 협상을 통해 2000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국의 쓴 맛’을 제대로 맛본 그는 “브라질에 보내주면 현대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 주겠다”는 ‘무조건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현대는 끝내 그를 못 믿었고 출국금지해제에 동의해 주지 않았다.

2000년 7월 어느 날 밤, 그는 인천부두 어느 곳에서 큰 컨테이너에 몸을 숨겼다. 컨테이너를 실은 배는 황해 건너 중국 땅에 그를 데려다 놓았다. 한국에서의 나쁜 기억을 모두 씻으려는 듯 중국 이곳저곳을 유유히 떠돌아다니던 그는 2001년 9월 스페인에 머물다가 9·11테러가 터지는 것을 본 후 브라질로 귀국했다. 이후 그는 새로운 사업도 벌이며 브라질에서 완전히 무너진 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상파울로 시내의 브라질 연방경찰 건물. 전종진씨가 구금되어 있다.

상파울로 시내의 브라질 연방경찰 건물. 전종진씨가 구금되어 있다.

"재벌의 피해자 다시는 없어야"

이번에도 그가 추진한 골프장 건설 사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즈음 기아자동차의 새 주인이 된 현대차는 국제거래 분야의 전문가인 미국 변호사 마이클 골든버그와 박성도 해외영업본부장을 통해 전종진과 그의 동업자 워싱턴 로페즈와 협상을 시도한다. 요점은 ‘브라질 내의 패널티 문제와 증자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국내 송환과 같은 한국 내 법률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죄 인정과 명예회복을 절실하게 원했던 전종진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것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2002년 10월 한국정부는 브라질 정부에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전 씨의 강제송환을 요청했고 그 4년 후인 2006년 7월 전 씨는 브라질 연방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이곳 감옥에서 링콘 같은 친구들도 만나게 됐지만 어머니를 잃기도 했다. 지금 그는 상파울로에 있는 연방경찰 건물 3층 유치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 허용되는 가족이나 친구의 면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누구를 만날 때마다 “나는 내가 지금 싸우는 상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잘 안다. 다시는 나처럼 재벌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90년대 초 콜롬비아 축구영웅 프레디 린콘

"전종진은 나의 영웅이며 나는 그의 결백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전 콜롬비아 국가대표 축구선수 프레디 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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