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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화의 밑거름 됐지만 고통의 나날 보내'

세상을 흔든 양심선언들, 지학순 주교부터 김용철 변호사까지

제정남

입력 2007-11-27 11:07:17 l 수정 2007-11-27 11:07:17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는 이 사회가 여전히 ‘힘든 고백을 할 용기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삼성의 비자금 운용실태를 앞장서 세상에 알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인국 신부의 말마따나,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우리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 준 것”으로 확증되어 가는 분위기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삼성이란 거대자본이 정치권, 정부관료, 법조계로 이르는 부패 고리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를 이 부패가 한국사회에 악성종양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더 이상 가만히 놔둬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삼성 X파일 공개 때 도려내지 못한 종양을 두고 시민사회는 물론 양심적 정치인들은 “이번에야 말로”를 외치며 삼성을 수술대 위로 기어이 올릴 태세다. 이 모든 가능성은 “자수하는 심정”으로 세상 앞에선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정작 삼성의 비리를 고백한 김 변호사는 “내가 지은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양심과 영혼을 찾고, 사회에 기여할 수가 있어 기쁘다. 하지만 나와 인연 맺었던 사람들을 삼성이 괴롭게 하는 건 정말 힘들다. 정말, 그게 진짜 끝까지 힘들 거다”라면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김 변호사와 같은 여러 내부고발자 및 양심선언자들의 용기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뤄왔다. 윤석양 이병, 감사원 전 직원인 이문옥·현준희씨, 이지문 중위, 김근태 의원 등의 양심선언 및 내부고발은 한국 근대역사의 주요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이들을 두고 우리사회는 그들을 ‘융통성 없는 인간’으로 고립시키거나 기나긴 법정 투쟁으로 내몰았다. 현재로선 김 변호사도 이전의 ‘융통성 없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힘든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양심선언자와 내부고발자들의 과거와 현재는 어떠했을까.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11월 5일 기자회견을 갖고 비자금을 이용한 삼성의 전방위적 로비실태에 대해 양심고백했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11월 5일 기자회견을 갖고 비자금을 이용한 삼성의 전방위적 로비실태에 대해 양심고백했다.ⓒ월간말 김철수 기자


세상을 바꾼 양심선언들

양심선언과 내부고발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전자가 ‘감추어진 비리나 부정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넓은 의미라면, 후자는 ‘조직구성원이 내부의 비리나 불법행위를 폭로하는 것’을 뜻한다.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의 선언은 세상을 바꾼 양심선언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지 주교는 1974년 7월 6일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김지하 시인에게 활동자금을 주었다는 혐의로 김포공항에서 강제 연행되었다. 긴급조치 위반혐의였다. 당시 유신정권은 백기완·장준하 등이 개헌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각계에서 광범위한 유신 반대운동 바람이 일자,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활동했다는 사건을 조작해냈다. 김지하 시인은 해당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 일부 생활자금을 지학순 주교에게 받은 적이 있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활동이 북한과 관계없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런 김 시인의 증언이 7월 6일 지 주교를 강제 연행할 수 있도록 유신정권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지 주교의 연행소식을 전해들은 천주교회는 즉각 반발했다. 연행 이틀 뒤인 7월 8일 김수환 신부는 중앙정보부에 갇힌 지 주교와의 면담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으로, 학생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전까지 보수적이던 천주교회가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김수환 신부와의 면담이 있은 날 지 주교는 ‘주거를 명동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제한한다’는 명령 아래 중정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지 주교는 김지하 시인의 아내와 부모를 면담한 뒤 ‘김지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내가 감옥에 있어야겠다’고 각오를 정리했다. 마침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전달받은 지 주교는 서둘러 양심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중략)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로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비장함이 감도는 양심선언을 작성한 지 주교는 선언을 발표한 날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다. 그의 구속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고, 결국 지 주교는 구속 이듬해인 1975년 2월 17일 국내외의 석방운동에 힘입어 출옥한다.

지 주교의 양심선언은 “수사기관에 끌려가 강압과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하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남긴 양심선언만이 진실이다(민주회복국민회의 기자회견 1975)”라는 저항방법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지하 구출위원회 위원장(1977), 한국 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가톨릭맹인선교회·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담당주교(1983~1984), 남북한 장애인걷기운동본부 본부장(1991) 등의 자리에서 사회활동을 해온 지 주교는 1993년 3월 12일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사후에는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만들어져 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금년 ‘제10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하다 추방당한 살라이 툰 탄 박사에게 주어졌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도 한 명의 양심선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해 1월 15일자 일간지의 사회면에는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단발성 기사가 실렸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법의학과장은 오후 5시경 경찰 상부로부터 “사체부검팀을 구성하라”를 연락을 받고 치안본부로 갔다. 안상수 검사(현 한나라당 의원)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 박종철 열사의 삼촌이 참가한 가운데 부검이 실시됐고 황 과장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황 씨는 경찰 상층의 설득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다음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될 부검 소견서가 “외표검사상 사인이 될 만한 특이소견을 보지 못함”이라고 거짓 내용으로 공개되는 데 동의를 한다.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으로 둔갑되는 순간이었다. 황 씨는 거짓기자회견이 발표된 16일 밤잠을 설쳤다. 결국 그는 17일 검찰조사에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박종철 열사의 시신은 이미 16일 오전 9시 10분에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이 된 상태였다.

황적준 과장은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지난 11월 5일 ‘과학수사의 날’ 기념식에서 경찰청장으로부터 법의학 분야 과학수사 대상을 받았다. 황 교수는 20년 전 부감소견을 낼 당시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사실을 떠올리며 “격세지감”이란 말로 수상소감을 표현했다.

1990년 10월 5일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씨(당시 이병)는 양심선언 이후에 개인이 겪는 고통의 수위를 가장 절실히 보여주는 인물일 듯하다. 1966년생인 윤 씨는 85년 한국외국어대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을 하다 1990년 5월 1일 육군 3사단에 입대했다. 입대 직후엔 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돼 80여 일 동안 협박을 받으면서 조사를 받았다. 윤 씨는 이 조사과정에서 ‘혁노맹’ 책임자인 박대호 씨 체포에 협조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90년 9월 23일 탈영하고 보안사의 불법 민간인 사찰 기록을 폭로하게 된다. 양심의 가책이 내부고발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폭로 내용에는 김대중, 노무현, 문익환 등 각계인사 1,303명이 군의 사찰대상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보안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간인 불법사찰 근절을 다짐하며 부대 명칭을 국군기무사령부로 바꿨다.

윤 씨는 양심고백 후 도피생활을 한지 2년 만인 92년 9월 체포돼 군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94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양심선언자인 윤 씨는 만기출소 이후에도 심적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2004년 5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저를 ‘양심선언을 한 용기 있는 사람’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저는 ‘프락치’이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지 면이 다 저의 모습이지요”라며 내면의 갈등을 토로했다. 인터뷰에 응할 즈음 그는 90년의 사건 이후를 정리하는 수기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현재 윤 씨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집필활동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992년 14대 총선을 이틀 앞두고 군에서 또 한 번의 양심고백이 터져 나왔다. 이지문 씨(당시 중위, 68년 생)가 군부재자투표에서 공개투표, 여당에 대한 투표강요, 기무사에 의한 발송검열 등이 벌어지고 있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것. 회견 직후 군수사기관에 구속된 이지문 중위는 이등병으로 불명예제대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95년 대법원에서 파면처분 취소확정 판결을 받고 원대복귀 후 전역해 중위의 신분으로 명예전역했다. 95년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던 이 씨는 현재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부대표로 공익제보자에 대한 신변 보호 등에 앞장서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두고도 이씨는 “한 개인이 공익을 위해서 고뇌에 찬 고백을 했을 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한 사실이 진실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철저한 조사 요구에 국민적 힘을 모으는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호소했다.

92년 총선에서 정부가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관권선거를 시도했다는 증언이 고위 관료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사건의 주인공은 충남 연기군수를 지낸 한준수 씨다. 당시 한 씨가 공개한 자료에는 “직을 걸고 여당을 당선시켜라”는 내무부 장관의 전화 내용을 비롯한 정부와 여당, 지방 공무원 조직의 관권 타락선거 실태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양심선언 이후 한 씨는 100여일 동안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고 공무원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징계파면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9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의 선고가 확정된 뒤 8월 사면복권됐다. 형사적인 사면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법정판결은 부정선거를 지시한 당시 충남도지사가 징역 8월, 부정선거를 직접 저지른 민자당 후보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은 것보다 형량이 높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현재까지 공무원직에서 징계파면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받아야 할 연금의 절반 수준만을 받고 있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1월 12일 2차 기자회견을 갖고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이 담긴 내부 문건을 공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1월 12일 2차 기자회견을 갖고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이 담긴 내부 문건을 공개했다.ⓒ월간말 김철수 기자


공공기관 및 기업체의 비리를 감시하는 감사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부고발도 90년대에 들어 연이어 터졌다.

이문옥 전 감사원 감사관은 90년 5월 <한겨레>를 통해 “89년 삼성 등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투기실태 감사가 외압에 의해 중단됐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감사원 사무총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매형인 중앙일보 고위간부를 만난 직후 감사가 중단됐으며, 재벌 감사를 감행했던 선임 과장과 국장까지 좌천됐다는 게 이 감사관의 주장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으나 삼성의 외압 의혹은 밝히지 못한 채 이 씨만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구속했다. 이 씨를 구속시킨 대검찰청 모 검사의 이름은 7년 후인 1997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의 밀담에서 다시 거론된다. 일명 ‘삼성 X파일’에서 추석 떡값을 줄 검찰간부로 거론 된 10명 중 한 명이었다.

감사원 비밀누수에 대한 무죄판결, 감사원 파면취소소송 승소로 당시의 양심고백을 인정받은 이 씨는 96년 감사원 감사교육원 교수로 복직했다. 이후 99년 정년퇴임한 그는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부대표 및 부패청산 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92년 광주에서 총선 출마, 2002년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0번으로 정치권 진출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성과를 맺지는 못했다. 몸이 불편한 아내와 함께 경기도 용인시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내부고발 및 반부패에 대한 대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문옥 전 감사관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던 해인 1996년 또 한명의 감사원 직원이 감사 중단 의혹을 제기했다. 현준희 감사원 주사는 96년 총선 직전인 4월 8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효산종합개발 콘도사업 특혜의혹에 대한 감사를 감사원 모 국장이 뚜렷한 이유없이 중단시켰으며 배후에 청와대측의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부고발을 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현 씨는 내부고발자의 아픔을 톡톡히 당했다.

현 씨의 폭로에 등장한 해당 공무원들은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감사원도 조직적으로 나서 그를 ‘소 영웅주의자’로 몰아갔다. 감사원이란 거대조직과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던 그는 2002년 대법원의 유죄판결로 절망에 빠졌으나, 4년을 끈 대법원의 파기환송심은 2006년 10월 18일 하급심인 고법에서 무죄로 최종 선고됐다. 상급심의 결정이 하급심에서 뒤집히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최근 아내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일을 돕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 게스트하우스’는 정부와 지난한 싸움으로 가정고가 바닥나기 시작한 지난 2000년 그의 부인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통한옥을 체험하는 사업을 해보자”며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고백은 정치권 양심선언의 대명사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그는 과거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 불법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양심고백을 한다. 파문이 크게 일어나자 그는 경선후보에서 사퇴를 했고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1심에서 정치자금법위반 혐의로 벌금 5백만 원과 추징금 2천만 원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아 사실상 무죄가 된다.

1965년 학생운동을 시작한 뒤 1995년에 이르러서야 정계에 입문한 김근태 의원의 양심선언은 기업들로부터 관행처럼 받아오던 불법정치자금의 실태를 양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의원은 1심 법정에서 “명예실추를 감수하더라도 돈 선거의 구태를 극복해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양심선언을 했다”고 담담히 심경을 밝혔다.

앞서 열거한 내부고발자 및 양심선언자들은 거대조직과 권력에 맞서는 한 개인의 용기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불러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용기는 민주화가 진전되고, 기업과 정부가 건강해지는 데 밑거름이 됐지만 정작 양심선언 당사자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온 것이다.

이지문, 이문옥, 한준수, 현준희 등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부패추방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병상련의 고통을 겪으며 평소 교류를 가져왔던 이들이 다시 힘을 모으고 나선 것이다. 종교계와 노동계 등 제 시민사회단체의 힘을 결집시킨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양심선언자들의 저항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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