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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김일성 주석은 반공교육과 달랐다, 서경원

정지영 기자

입력 2007-12-24 14:13:58 l 수정 2007-12-26 14:25:24

서경원

서경원



수도원 생활을 하며 정규교육을 거부한 ‘무학’의 농민운동가,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에 연루된 이래 수차례 극심한 고문을 당한 역사의 산증인, 평민당 국회의원으로 1988년 홀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간첩으로 몰려 10년형을 살아야 했던 서경원.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아버지 따라 ‘산생활’ 했던 유년시절

일제 치하였던 193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서경원. 그는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 만 ‘무학’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다. 동무들이 책보를 끼고 몰려 다니는 것이 부러워서 울며 졸라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일본놈들 밑에서 공부하는 것은 안 좋다’며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0년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일제의 눈 밖에 난 이들 가족은, 산 속으로 들어가 ‘산생활’을 시작했다. 산짐승을 벗 삼아 생활하던 어린 서경원에게 읽고 접할 수 있는 것은 성경책뿐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일본 사람에게 몰래 신문을 얻어다 보던 서경원은 9살이 되던 해 어느 날 ‘해방’이란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단걸음에 내려갔다 오신 아버지는 덩실 춤을 추며 “일본놈들이 물러갔다”고 소리쳤다.

해방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부모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나자 그는 다시 ‘동광원’으로 보내졌다.

동광원은 이세종 선생과 제자 이현필 선생이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세웠던 고아원이기도 하고 순결, 청빈, 순명, 금욕을 원칙으로 세운 수도원이기도 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가정생활은 멀리하고,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면서 버려진 이들을 보듬어 함께 살았다. 서경원의 아버지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 생활을 했던 것이다. 동광원은 이후 화순, 함평, 광주, 진도, 벽제 등에 분원이 세워지기도 했고 현재까지 ‘귀일원’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서경원은 11살 때 인근 곡성군 동초등학교 건설 현장에서 돌짐을 나르며 부역을 하기도 했다. 후에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독학’이라고 학력을 기록하자, 안기부에서 이 곳 동초등학교에 가서 졸업장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동광원에는 전쟁고아들이 모여들었다. 서경원은 이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노동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들 공동체는 전후 복구 시기에 경기도 능곡 YMCA 농장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하루는 수확이 끝난 쌀을 달구지에 싣고, 아스팔트가 없어 덜그럭 대는 길을 따라 능곡에서 수색을 지나 종로 YMCA까지 갔다.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완 선생은 ‘그냥 가져가서 아이들 먹여라’고 밀어내고 달구지를 끌던 어른은 ‘안 된다. 받아라’ 하고 되내밀고...... 어른들끼리 ‘아름다운’ 실랑이를 벌인 탓에 함께 간 아이들은 덜덜 떨며 YMCA 천막에서 밤을 지샜다.

공동체 생활이 답답했던 서경원은 이십대 초반이던 1958년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서 나와 곡성군에서 농촌 청년계몽운동을 벌였다. 40여명 남짓한 동네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해야지, 농사만 하면 무시 받는다’고 설파하며 야학을 꾸렸다. 4H(두뇌 Head, 마음 Heart, 손 Hand, 건강 Health)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청년회에서 공동으로 농사도 짓고 삯으로 회비를 모아 야학 건물도 지었다. 또 ‘심청전’ 영화가 유행할 때 영화필름을 구해서 한집에 반 되씩 쌀을 걷어서 포장을 치고 영화를 틀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곡성 청년회의 이름은 ‘향진회’였다. ‘농촌이 전진한다’는 진취적인 뜻이다. 서경원이 광주에서 열린 함석헌 선생 강연회를 갔다가, 주최측이 고려대 ‘향진회’라는 모임인 것을 보고 따라 붙였다고 한다.

후에 서경원은 당시 참여했던 4H운동에 대해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의 통치를 받는 나라들에 4H 출신의 미국 고문단을 보냈는데, 결국 이를 통해 제3세계 통치를 위한 ‘미국물 들이기’ 즉 사상적, 문화적 침략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가 늦은 나이인 스물넷에 군대에 징집되어 갔다 오니 야학 건물은 팔려서 주막집이 되어 있었다.

서경원

1976년 함평고구마 투쟁의 인연으로 서경원은 카톨릭에 귀의한다

최초의 농민 승리, 함평 고구마투쟁

서경원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해는 1972년이다. 그는 제대 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교육을 수료했다. 이우재, 김낙중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던 고려대 노연은 노동자, 농민들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고, 이는 1974년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으로 이어지면서 7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뿌리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와서 진행한 4박 5일의 교육을 받은 후 서경원은 말 그대로 눈이 뜨였다. 이제까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제값 받고 파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교육 기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60년대 가톨릭 농촌청년회와 함께 기지개를 켠 한국 농민운동은 70년대 조직적으로 성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개발 독재라는 미명 하에 저곡가, 저임금 정책을 폈다. 말 그대로 농사지어도 제 값 안 주고, 노동을 해도 제 임금을 안 주면서 노동자, 농민의 피땀을 짜내서 경제개발을 진행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1972년 공식 출범한 가톨릭농민회(가농)는 계몽운동을 넘어, 농민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농민운동을 펼쳐 나갔다.

서경원은 전남 함평 지역에서 가농 활동을 시작한 후 1974년부터 ‘쌀 생산비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에 쌀 한가마니를 생산하는 데 생산비가 8만5천원이 들었는데, 정부는 이를 7만3천700원에 수매했다. 명백하게 적자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 농민들은 정확한 생산비가 얼마인지, 남는 수익이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손해인지에 대해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의 쌀 생산비 조사는 역사 이래 처음 진행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인이, 농민의 희생을 통해 경제개발을 일으키는 박정희 정권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976년, 농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함평 고구마 투쟁’이 시작됐다. 그 해 전남도 농협은 건고구마(얇게 썰어 말린 것) 형태로 수매하던 것을 생고구마로 수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시가 1천원 정도였던 생고구마를 건고구마 수준인 1천317원에 전량 수매하겠다는 약속은 농민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농협 직원들은 고구마 농가를 찾아다니며 농협이 제작한 포대까지 나눠 주면서 희망을 부풀렸다.

전남 해남, 무안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는 그 해 풍년이 들었다. 하지만 농협은 수확이 끝난 11월이 되도록 40%에 못 미치는 수량만 수매했고, 농가 창고에서는 농협의 약속만 믿고 내다 팔지 않은 고구마들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농민들은 포대 당 400원의 헐값으로 고구마를 팔아야 했다.
가농은 함평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벌였고, 9개 마을 160 농가의 총 피해액인 309만원을 보상하라는 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전체 피해액은 1억4천만 원에 달했다.

처음엔 17명이 모여 싸움을 시작했지만 해를 넘기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전남지역 전체의 투쟁으로 번져갔다. 가농 전남연합회가 이듬해인 1977년 4월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기도회를 개최하고, 600여 명 회원들이 농협 전남지부장 면담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벌인 것이다. 이들은 서울, 대전, 부산 등 대도시 등을 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렇게 또다시 해를 넘겨 1978년 4월, 광주 북동 성당에서 ‘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연 가농 회원 60여 명이 그달 25일부터 장장 9일 동안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단식 5일째에는 농성자 5명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이를 통해 전남지사 측에서 “309만원을 입금하겠다”는 연락이 오면서 3년 간의 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감사원의 조사 결과 전남북, 경남북 지역 일부 농협이 주정회사, 중간상인과 결탁해 고구마를 수매한 것으로 조작한 뒤, 농협자금 80억 원을 유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관련된 농협 도지부장 1명, 군조합장 62명, 단위조합장 139명 등 658명은 해임, 징계 처리됐다.

서경원

김수환 추기경과 서경원 전의원



‘함평 고구마투쟁’은 안동 씨감자투쟁과 더불어 1970년대 농민운동의 상징이 됐고 ‘최초의 승리한 농민투쟁’으로 남았다. 이를 계기로 가농은 조직적으로 성장했고 농민운동도 활력을 찾게 됐다.

하지만 서경원은 당국의 주시를 받게 되면서 큰 고초를 겪었다. 의문의 죽음, 납치, 구금이 횡행했던 유신시절, 그를 ‘빨갱이’로 몰아가려는 시도가 계속되었고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는 공공연한 협박도 자행됐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무슨 꿍꿍이로 가농 활동을 하느냐’는 음해를 받자, 서경원은 성직자들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해 세례를 받기도 한다.

서경원은 이듬해인 1979년 안동 씨감자투쟁과 관련되어 구속됐다. 정부가 썩어버린 씨앗을 나누어줘서 감자농사를 망친 안동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이에 앞장선 가농 회원 오원춘 씨를 당국이 보름 남짓 납치, 감금한 사건이었다. 오 씨가 가톨릭 안동교구에서 양심선언을 하자 사복경찰은 교구청까지 난입해 신부와 가농 지도부를 강제 연행했다. 이 일로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봄’은 너무나도 잠시였다. 군홧발로 밀고 들어온 신군부는 1980년 광주 민중들을 학살했다. 서경원은 6월 8일 경찰에 납치되어 함평 경찰서에 37일간 구금됐다가, 광주 보안대로 이첩된 후 ‘실탄이 아까우니 밟아 죽인다’는 소리를 들으며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갈비뼈를 비롯해 온몸이 부러지고 내장기관이 상할 정도의 고문이었다. 5.18 광주민중항쟁과 무관했던 그는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고문을 당한 후 ‘내란선동죄’로 구속됐다가 그해 겨울 만신창이가 되어 출소했다.

아직 젊을 때라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며 혼자서 몸을 추스르고 농사일을 했던 서경원. 한참 지난 훗날에야 고문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간첩으로 몰린 야당 국회의원

1981년 3월부터 서경원은 가농 전국회장직을 맡아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불길이 거세지면서 농민 대표로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참여했고 1987년 6월항쟁 공동대표로 항쟁의 물결을 이끌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집단 입당하면서 함께 제도 정치권에 진출하게 되었고, 198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직을 맡고 있던 평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리고 그 해 7월. 서경원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서경원

이제 70세가 된 서경원. 분단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서경원은 1984년 세계농민회에 참석했다가 독일 민주인사들을 만났고, 성낙영 목사를 통해 입북이 가능한지 타진하게 됐다. 그러다 1988년 북한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방북하게 된 것이다.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활동만으로 농민이 해방될 수 없다. 분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고민이 가득했던 참이었다. 입북하기 전부터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겠다고 요청한 끝에 허가를 받았고 김 주석과 40분간 마주 앉아 통일문제를 토론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가 만난 김 주석은 반공교육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황금의자에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갔더니 야당 국회의원인 나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나와 있었고 옷차림도 나보다 더 소탈했다. 꼭 경어를 사용했고, 의전을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편하신 대로 하라’고 말했다. (테러위협 등이 있을 수 있는데) 들고 간 가방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게 했다. 처음엔 그래서 가짜인 줄 알았다.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데 목소리가 마이크에 댄 것처럼 왕왕 울렸다”고 말했다.

서경원은 40분간의 회담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 주로 ‘88 서울올림픽에 참석해 달라’ ‘일제 때 진행되던 경평 축구대회를 복원하자’ ‘휴전선에서 남측에 비방방송 하지 말라’ ‘우수 농산물, 가축 종자교류를 추진하자’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에서 전교할 수 있게 문을 열어라’ ‘유엔 감시 하에 상호 군축을 하자’ ‘아들에게 권력 승계 하지 마라’ 등의 내용이었다.

김 주석은 이에 대해 ‘추기경님 언제든 오시면 문 열어놓겠다. 누가 와도 문 열어놓겠다’고 말하는 등 대체로 긍정적이었고, 올림픽 참석의 경우 남측과 회담을 했는데 결렬됐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서경원은 그 때의 대화에 대해 “김 주석의 주장은 ‘(민간교류 등이) 다 좋은데 그 전에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한다, 서로 왔다 갔다 하면 좋지만 한 쪽이 총을 쏘면 전쟁 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나는 ‘민간교류가 먼저 있어야 인식의 변화가 오고, 불가침 조약까지 가는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부분에 견해차가 있었다”고 기억을 되짚었다.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간의 평양 방문은 이후 10개월 동안이나 세간에 알려지지 않다가, 1989년 6월 29일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알려졌다. 늦봄 문익환 목사 방북이 있은 직후였던 데다, 야당 국회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건의 파장은 컸다.

87년 6월 항쟁으로 분출된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에 항복하다시피 6.29선언을 발표했던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권력의 기반이 협소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88서울올림픽이 열린 그 때까지도 6월 항쟁의 불길은 꺼지지 않은 채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5.18 진상조사 청문회가 이어졌고 1989년 1월에는 민주화 세력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건설하며 조직된 힘을 과시했다.

사면초가에 부닥친 노태우 정권은 서경원 의원 방북, 문익환 목사 방북, 전대협 임수경 대표와 문규현 신부 방북 등을 빌미로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구속하는 등, 공안정국을 조성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 특히 서경원이 소속된 평민당에 탄압의 화살이 집중됐다.

안기부는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을 ‘간첩활동’으로 조작했다. 그가 공작금 5만 달러를 북에서 받아왔으며,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대북친서를 전달했고 공작금 중 1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또 불고지죄를 씌워 평민당, 가농 주요 인물을 연행하고, 서경원이 방북 사실을 고백했던 종교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 함세웅 신부에 대해서도 불고지죄 적용 여부를 검토했다. 취재 과정에서 방북 사실을 알게 된 <한겨레> 윤재걸 기자를 연행하면서 <한겨레>를 압수수색하는 등 언론탄압까지 벌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연행 25일 만에야 이루어진 첫 번째 변호인 접견에서 서경원은 간첩활동 부분을 부인했고,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특히 정형근 국장(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직접 고문을 받은 사실을 폭로해 세간에 충격을 주었다.

출소한 후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정형근은 ‘북한에 세 번 갔다 온 것 안다’ ‘방북 전에 김대중이 시킨 것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심한 폭행을 가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가장 쟁점이었던 평민당 배후설에 대해 “나는 갈 때나 올 때 당과 일절 연계 없이 갔다”고 말했고, 5만 달러에 대해 “내가 통일 사업한다고 요구했다. 그 부분은 내가 모두 진술했다. 안기부측은 이를 공작금으로 발표해버렸다”고 했다.

김대중 총재 1만 달러 수수설에 대해 “사나흘 동안 나를 죽일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에 검찰조사에서 내가 일단 1만 달러를 주었다는 요구대로 자백을 했다. 그랬다가 재판에서 이를 전면 부인했다”고 말하면서 “주려면 5만 달러 다 주지, 치사하게 1만 달러만 주겠냐”고 일축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내 얼굴을 보니 멍이 들어 까만색이 돼버렸다. 고문 앞에는 천하장사가 없다. 내가 하고픈 말을 하기라도 하면 즉각 주먹이 날아오니까” 라고 고문당할 때의 고통을 표현하기도 말했다.

구속 이듬해에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미국, 일본, 프랑스 등과 국제엠네스티, 독일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 등이 서경원 의원 석방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졸지에 간첩이 된 서경원은 꼬박 10년을 거의 다 채운 1998년에야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몸과 마음에 얼룩진 상처를 안고, 그동안 모진 고생을 겪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서경원. 그는 이후에도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 미선이.효순이 살인미군 처벌투쟁 등 민중들이 싸우는 현장에서 함께 했다. 미선이.효순이 사건 당시 대규모 집회를 마치고 시위대가 지하철로 이동하다가,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과 미군 병사 존 머피 이병 등 3명 사이에 실랑이가 붙자 이를 말리다가 미군에게 폭행을 당한 일도 겪었다.

이제 70의 나이가 된 서경원. 수차례의 고문과 옥살이로 상한 건강과 싸우고 있는 그. 10년간 감옥에 있으면서도 ‘통일에 대한 열망’에 들끓었다고 말하는 서경원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던 날 품었던 ‘분단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권의 폭력도, 구금도, 탄압도 사람의 신념까지 마음대로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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