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허언필망(虛言必亡)의 해"

[신년인터뷰]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배혜정 기자
bhj@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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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버스로 한 시간. 2007년의 마지막 날 오후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은 봉은사에 내려 다래헌(茶來軒)을 찾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이곳 주지인 명진스님(57)이 찻상 앞에서 기자를 맞는다.

명진스님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을 2007년 마지막 날 봉은사 다래헌에서 만났다.ⓒ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자리에 앉기무섭게 대뜸 "<민중의소리>하고 나는 안맞는데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명진스님. 인터뷰 초반부터 기선을 잡으시려는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 "2800명 중에 88명이 정동영 찍고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이명박 찍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야 나"라며 '허허'웃음을 터트린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에 대적할 만한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전날 인터뷰를 요청할 때 "다사다난했던 2007년을 보내면서 힘들고 상처받은 민중들을 다독일 수 있는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린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명진스님은 "강남 한복판에 살면서 내가 민중들한테 할 수 있는 말이 뭣이 있겠소"라며 한 발을 물러났었다. 그러나 2006년 11월 봉은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산문 밖엔 나가지 않겠다며 천일 기도에 돌입한 것이나 12월엔 100억 대의 사찰 재정상태를 전격 공개하는 등 파격행보를 하고 있는 명진스님은 소위 '이명박 시대'를 맞이한 한국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신도 20만의 부촌 강남의 봉은사 주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왕에 대선 이야기로 인사를 나눴으니 얼굴에 철판깔고 "선거 앞두고 불자들에게 좋은 말씀 안하셨냐"고 은글슬쩍 물었다.

"여기서는 그런 말 할 여지가 없지. 얘기해봤자 왕따 당허지. 허허."

80년대는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까지 갔다오고 2000년부터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과 본부장 등으로 대북 교류를 주도해 온 명진스님이 한나라당과 코드가 맞을리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명진스님은 대선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입장에 대해선 신도들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본래 이번 선거에 기대를 안했다. 국민들이 이미 여러가지로 개혁적인 코드에 대한 식상한 게 있었고 소위 범여권이란 사람들이 너무 오만했던 것도 있었다. 열린우리당에서 나왔다가 합쳤다가 부셨다가 하는데 어느 국민이 저런 사람들에게 정권을 주겠다고 하겠나. 어떻게 해서 교체된 정권인데 자기를 지지했던 세력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나라당과 연정하겠다고 하질 않나, 이라크 파병을 하질 않나, 한미FTA를 하지 않나. 국가보안법도 눈치보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결국 물건너가버리고. 혼나야 돼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처참하게 짓밟히고 깨진 다음에 새롭게 문을 열어가는게 낫다"

"스님께선 대선 결과를 보고 심적인 좌절을 겪으셨습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까지 남북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오지 않았나. 남북문제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북미관계가 잘 풀리면 무리 없이 갈 것이다. 북이 어려운 경제적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잘 풀어가고 있다고 본다."

"인수위원회에서 통일부 축소론이 나오고 있는 것이나 남북경협 속도조절론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남북관계에서 상당히 속도조절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역사라는게 한번 쯤은 그런 식의 좌절을 겪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치열한 반성 속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을 갖고 시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만약 정동영 후보가 됐으면 희망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차라리 처참하게 짓밟히고 깨진 다음에 새롭게 문을 열어가는게 낫지 않겠나."

명진스님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내친 김에 "스님. 앞으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라고 묻자 명진스님, 역시 강남무림의 절대고수답게 명쾌한 답을 내려준다.

"두문불출하고 내공을 쌓아야지. 무림의 고수들이 싸움에서 지고 나면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스승을 다시 찾아 내공을 닦잖아. '명박은풍'에 맞아 오장육부가 끊어지고 사지관절이 다 끊어져 숨만 간당간당 붙어 있는 상황아니냐. 아미산으로 들어가서 천년설삼을 캐먹고 무공비급을 얻어 '명진천일수행 오행신공 장풍'을 연구해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5년 후엔 내가 출마할까하고...하하"

조용한 다래헌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불심으로 대동단결 하시는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불심 장풍을 받아라"하면서 손바닥을 쭉 내밀어 짐짓 장풍을 쏘는 흉내를 내보는 명진스님. 곧 자세를 바로 하더니 정치철학에 대해 설파한다.

"정치라는게 재밌어야 되거든. 결국 사고의 폭이 얼마나 넓냐에 따라 그 사람이 평소에 쓰는 행동이라든가 언행이 나오는 것이데 고정된 관념에 갇혀 있으면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면 유머가 나올 수 없다. 유머가 있으려면 집착이 없어야 한다. 집착이 없어야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겨야 유머가 생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그런게 없어. 매일 심각하고 우국충정열사들만 있는 거지.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딱딱하고 부딪치면 쌈박질만 하고. 촌철살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런 맛이 없어서 정치가 재미가 없어."

명진스님은 최근의 민주노동당 내부 갈등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했다. 정치철학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갈라지고 난리들이냐"고 일침한 명진스님은 "웬만하면 참고 서로 이해해야 하는데 결국 슬로건만 있지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철학이라는게 별게 아니거든. 내가 항상 무엇이 옳다고 규정하는 순간 과오가 아닌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NL이 죽어도 PD가 안되고, PD가 죽어도 NL이 안되는건 이런 회의하는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길이 과연 옳은가, 옳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있어야지 발전이 있고 남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폭넓은 인간성을 가질 수 있는데 (민주노동당도)그런게 부족한 것 같다."

"헛된 말은 필히 망한다"

명진스님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이명박 당선자는 내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의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선정했다. 이를 꼬집듯 명진스님은 2008년을 정의하는 말로 '헛된 말은 필히 망한다'는 뜻의 '허언필망(虛言必亡)'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1960년대 북쪽의 슬로건이 '당은 인민을 위하여 인민은 당을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였는데 당시 남쪽의 슬로건은 '잘 살아보세'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거냐는 철학적 전제 없이 '무조건 잘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도둑질을 하든지, 땅 투기를 하든지, 부정부패 하든지 아파트 몇 번 씩 옮기던지 '어찌됐든 잘 살아보세'로 됐다. 이 과정 중에 내 새끼가 잘살려면 좋은 학교를 가야 하니까 위장 전입도 하고 위장 취업도 하고. 전부다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가치 판단의 부재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거짓말해도 아무 상관 없는 사회로 만들었다."

"물론 이명박 당선자 본인이 허물이 많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도 안하고 잘 할 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지 않겠나. 허허.."

'허언필망(虛言必亡)'
400일 가까이 하루 세번 기도과 천번의 절을 빼먹지 않고 수행하는 모습을 신도들에게 몸소 보여주고, 되도록 감추고 싶은 살림살이를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불교계와 국민들 사이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명진스님이 2008년 '이명박 시대'에 던지는 화두였다.



<배혜정 기자 bhj@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 2008-01-01 13:57:32
  • 최종업데이트 : 2008-01-02 10: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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