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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뗄 수 없는 이름. 이태복

[월간 말_인물이야기]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정지영 기자

입력 2008-04-05 21:05:38 l 수정 2011-02-25 23:04:15

비극적인 역사, 조숙했던 아이들
이태복은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벌어진 1950년 보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어름치기며 미역감기, 잠자리 잡기를 하며 천진하게 놀았던 어린 이태복은, 친구들의 태반이 도시락도 못 싸오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 포기하거나 도시의 식모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막연하게 세상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예산중학교에 다닐 무렵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이면서다. ‘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정부의 양민학살의 상흔을 지닌 가정이 한 반에 몇 명씩 있을 정도였던 그 시절엔, 어린 학생들이 강한 역사의식, 민족의식,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산중학교 2학년이던 1964년, 야당과 학생 시민사회단체들은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나섰다. 학생들도 군청 앞 궐기대회와 가두시위에 함께 했고 ‘한일회담 반대! 매국노 김종필 처단!’을 외치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고민은 진지해졌다. 서울 성동고등학교로 ‘유학’ 와서 마땅히 어떻게 활동해야 할 지 알 수 없던 그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금요개척자 강좌’소개를 보고 흥사단 아카데미와 인연을 맺게 된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로 1963년부터 청년,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도산의 사상을 전하는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했다.
강좌에는 한일회담 이후 들끓는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학생과 청년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 곳에서 듣게 된 세계정세나 민족문제에 대한 유명 강사들의 강연은 이태복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이후에는 고등학생 토론모임이나 대학생모임에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2학년에 접어들어 고등학생 아카데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조했던 ‘인물 되기’를 실천하기 위해 수련카드에 매일 매일의 활동을 기록하며 자신을 훈련했고 서강대 뒷산에 새벽마다 올라가 연설 연습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던 시절이었다. 성동고 아카데미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 20년 정도 열심히 투쟁하면 독재정권도 무너지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도 실현되리라는 ‘낭만’을 가진 학창시절이었다.
활동에 열을 다하며 철학부터 미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허기진 사람처럼 섭취하던 이태복. 하지만 불교 서적을 읽고 고민하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본질 앞에서 강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렇게 출가를 결심하고 단식까지 하며 반대하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친 채 산에 들어갔다. 입산을 통해 그가 본 것은 매일 밤 음주와 기행을 저지르는 사찰의 모습이었다. 결국 수행은 어떤 특별한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의 현장에 있지 않을까. 이런 깨달음을 얻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아스피린 세대의 대학생활

이태복은 1970년 국민대 법대에 진학했고, 국민대 흥사단 아카데미 조직을 건설하는 한편서울 아카데미와 전국 아카데미에서도 주도적인 활동을 벌여 나갔다.
대학시절이 시작된 그 해는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던 바로 다음 해였으며, 전태일 열사가 ‘노동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해 전국의 노동자, 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바로 그 해였다. 이듬해에는 서울 무허가 판자촌을 경기도 광주군으로 강제 이주시키려는 정책에 항의해 도시빈민들이 광주 성남출장소를 습격하고 차량을 탈취하는 등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대학생들은 독재정권의 폭거와 빈부격차, 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 등에 눈을 뜨게 됐다.
점차 본격화하는 학생들의 저항은 박정희 정권을 긴장케 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1971년 10월 15일의 ‘위수령’이다. 학생운동 주동자급이라 할 만한 180여 명을 지목해 제적시킨 후 강제징집 시킨 것인데 이태복도 포함됐다. 이를 보안사 암호로 ‘아스피린’이라 불렀는데 ‘anti-government student power’에서 나온 말이라는 통설이 있다. 이태복은 위수령이 발동된 후 들끓던 학생들이 일순간에 무기력해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학생운동에 희망은 없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현장으로 가자는 결심을 안은 채 그는 다른 ‘아스피린’ 동료들과 함께 전방부대로 향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전방부대 생활.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야 하는 휴전선 철책근무, 눈밭을 헤쳐 끝없이 이어지는 행군길, 얼차려와 개머리판은 ‘무덤’을 연상케 하는 고통을 주었고 DMZ에 근무하며 금강산의 아름다운 사시사철을 지켜보면서도 분단된 조국의 통곡 소리를 느껴야 했다.
1973년 봄 ‘아스피린’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10월 유신 선포로 긴장감이 흐르던 때 ‘유신정신 함양 웅변대회’를 열어 중대마다 아스피린 대학생들을 연사로 내세우려 한 것이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지 어느 특정인이나 세력의 군대가 아니다. 군대가 특정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단웅변대회를 여는 것은 옳지 않다. 부당한 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는 이태복의 말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달려 든 중대장의 삽자루에 머리를 찍혀 7~8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한 덕이라 해야 할 지, 결국 그는 웅변대회 참가를 피할 수 있었다. 연설단 동료들이 이태복의 부대를 방문해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됐을 때, 술기운을 빌어 노래를 부르던 아스피린 동료들은 서로 얼싸안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 시절 대학생들의 비극이었다.

광민사(光民社) 그리고 현장으로!

만기제대한 1974년부터 1981년 ‘학림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이태복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1977년 7월 ‘광민사’라는 출판사를 차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에 밀착해 전국 단위의 노동조직을 꾸린 것이다.
처음 광민사를 차릴 때는 주위에서 “미칠 광(狂)자를 써서 광민사 아니냐, 몇 달이면 망한다”고 경고할 정도로 비전이 없어 보이는 미개척 분야였다. 이태복은 운동권 소그룹 활동을 할 때 어렵게 구한 논문을 짜깁기한 교재들로 공부해야 했던 경험, 민주화 요구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던 현실 등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 광민사를 차리게 됐다. 광민사의 첫 출간 서적은 ‘유한계급론’이었고 두 번째 작품은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라는 논문집이었다.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는 발간되자마자 3천부가 팔려 나갔지만, 추가분을 찍어내고 있을 때 문공부에서 ‘불온한 책자’라는 이유로 판매금지와 더불어 재고더미를 봉인하는 조치를 취했다. 봉인된 책을 건드리지 않고 ‘새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2만 5천부 이상이 팔려 나갔던 것은, 당시 대중들이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의 방증이었다. 광민사는 남미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라는 소설로도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광민사가 정권의 탄압을 받을 것을 대비해 2선 대책으로 1980년 친동생 이건복이 운영하는 도서출판 동녘을 세우기도 했다. 동녘은 ‘껍데기를 벗고서’ ‘철학에세이’ ‘님 웨일즈와 김 산의 아리랑’ 등 대학 새내기들의 필독서를 꾸준히 간행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태복은 제대 후 노동운동의 길을 걷기 위해 현장을 향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조직적인 민주노조 운동의 씨앗이 몇 몇 개별사업장에 뿌려진 정도였고, 학생운동의 현장진출은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지 못할 때였다. 이태복은 구로공단과 영등포 양평동, 문래동, 부평, 대구, 포항, 울산, 부산 사상공단, 전주 팔복동, 옛 이리공단지역 등을 다니며 현장활동을 진행했다. 한편으로는 상공회의소 자료 등을 근거로 회사 규모나 생산품목, 임금수준이나 노동조건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고 노동법, 항일운동 시기의 노동운동 등 연구에도 몰두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현장으로’ 기치를 들고 달려간 그였지만 자신이 노동운동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이태복. 그래서 자신을 검증하고자 시작한 일이 용산시장 청과물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게꾼이었다. 과일상자나 쌀부대, 시장바구니 등을 지게에 지어 날라주고 몇백 원씩 받는 일이었다. 강한 결심을 세운 그였지만 지게꾼 생활을 시작하는 첫날 아침 방문을 밀칠 때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노동현장 생활은 그를 다른 노동자들처럼 한 사람의 가난한 노동자로 만들었다. 판잣집이나 벌집, 마찌꼬바 생활을 하고 풀빵으로 며칠 끼니를 해결하거나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니는 생활을 통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접해도,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중간지도자 과정에도 참여해 이후 활동의 동지가 된 청계피복 위원장 양승조 등과도 만나게 됐다.
조직활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극심했던 70년대 운동은 대부분 소규모 서클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서클 하나가 탄압을 당해도 다른 조직들까지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태복은 현장활동을 통해 서클주의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국에 수많은 서클을 뿌리내리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운동의 흐름을 발전시키고 중심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전위조직을 건설하려는 운동 흐름에도 비판적이었다. 기층에 뿌리박아 부분별 조직의 저변을 넓혀 나가야 하며, 성명서운동에서 벗어나 생활상의 요구에 기초한 운동을 통해 대중의 투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이태복의 생각이었다.

“광주여! 윤상원 동지여!”

1978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1979년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사건과 남민전 사건, 부마항쟁이 이어졌고 그 해 10월 26일 김재규의 손에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70년대와 유신정권은 길고 긴 막을 내렸다. 이태복은 양승조 청계피복 노조위원장과 10.26 이후의 정세 등을 토론하고 비공개, 반합법 노동운동 조직 결성을 결정했다. 몇 해 간의 현장활동을 통해 만났던 대구경북 김병구, 안양 유동우, 서울 양승조, YH 박태연, 울산 하동삼, 광주 윤상원, 도시산업선교회 간사였던 신철영 등이 뜻을 모았다. 각지에 뿌리박은 이들을 중심으로 기존 노조 민주화와 미조직 사업장 민주노조 건설을 양축으로 진행하면서 전국적 노동운동의 센터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노련)’이다.
전노련 중앙위원 중 한 사람이 바로 5.18 광주민중항쟁 지도부로 유명한 윤상원. 이태복은 항쟁이 격화되고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기 전까지 윤상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를 구해낼 수 없었다. 윤상원은 ‘서울에 모임이 있다’는 말을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 등에게 넌지시 전한 후 항쟁의 현장에 뛰어들어 희생됐다.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5월까지를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이 시기 정부가 집계한 노동쟁의만 2,168건에 달할 정도로 민중들의 힘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어수선한 과도기 정국을 어떤 방식으로 돌파할 지를 두고 학생운동 세력들은 ‘투쟁론’과 ‘준비론’ 등 격렬한 논란에 휩쓸렸다. 이 논란에 불을 붙인 사건이 바로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역 회군’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인 수십만의 학생 시위대에 대해 지도부가 해산 명령을 내린 사건이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군부의 유혈사태를 자극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섰고, 이태복과 함께 하던 대학생 이선근 등은 회군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다. 평가를 둘러싸고 학생운동 세력이 벌인 맹렬한 노선 투쟁을 소위 ‘무림-학림 논쟁’이라 부른다.
무림 진영은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당시 지도부 세력을 일컬으며, 학림 진영은 이태복과 이선근 등 투쟁론을 견지했던 세력을 일컫는다. 그 해 12월에는 서울대 학생식당 앞에서 ‘반파쇼 학우 투쟁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던 이들이 붙잡히면서 서울대생 250여 명이 조사를 받고 70~80여 명이 강제징집 당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무림사건’이 터졌다.

‘무림사건’ 이후 학생운동권이 빠르게 세력을 회복해 광주학살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등 투쟁을 벌이자 대공 수사팀은 이태복, 이선근 등 학림 계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70년대 대규모 조직사건이 오히려 격렬한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경험에 기반해 대공팀은 전노련과 학생조직 전국민주학생연맹(민학련) 핵심만 구속해 고립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학림사건은 핵심 활동가 28명만 구속되고 학련 500여 명, 노련 350여 명 관련자는 석방 후 제적, 해고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들 구속자들에 대해 언론은 보도 한 줄 하지 않았다.
이태복은 1981년 5월 말 혜화동 로터리에서 불시에 연행됐다. 이들은 이태복에게 “네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휴전선에 너를 갖다 버리고 총을 쏘아 죽인 것으로 하면 그만이다” 등의 말로 협박하며 조직의 ‘수괴’임을 진술할 것을 강요했다. 근 2달 동안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은 구타는 물론이고 발가락 꺾기, 잠 안 재우기, 밥 안 먹이기에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태복을 고문했다.
그는 자신의 동지들은 물론이고 관련 없는 인사들의 이름까지 모두 엮으려는 상황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전술적 판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고문 앞에 굴복했다는 극심한 정신적 허탈감을 겪어야 했다. 차라리 죽을 것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 속에 7년 4개월의 길고 긴 수감생활이 시작됐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1982년 마침 아버지의 생신날에 진행된 결심공판에서 이태복은 사형, 이선근은 무기징역을 구형 받았고 재판부는 공소장을 그대로 인정해 이태복에게 무기징역, 이선근에게 10년 형 등을 선고했다. 변호를 맡았던 이돈명 변호사가 이태복에게 “젊은 변호사로 바꾸는 게 어떻겠나?” 라고 미안함을 표현할 정도로 ‘공산주의 반국가단체를 구성해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당국의 사건 발표와 무기징역 선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평도 안 되는 독방 생활이었지만 감옥에도 조직과 사람들은 살아 있었다. 민학련 후배들이나 장기수 선생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빵투’를 벌여 수감생활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하는가 하면 독서에도 몰두했다. 전주교도소에 있던 시절에는 광주 동지 박관현이 옥중 투쟁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며 항의 단식을 벌이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이어진 대통령선거전에서 김대중, 김영삼 양김이 분열하자 이태복은 면회 온 가족들을 통해 “양김이 분열하면 이번 선거는 진다. 그것도 2백만 표 차이가 날 것이다. 힘을 합해 싸워도 될까 말까 한데 무슨 승리냐”라는 말을 전했다. 실제로 200만여 표 차이로 대선에서 참패하자 김대중 총재는 이태복을 만나기 위해 직접 면회를 오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린 그해 10월 2일 오전, 교도소장은 “이태복 씨 축하합니다. 내일 가석방조치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7년 4개월의 수감생활이 끝난 것이다.

새로운 도전, 노동자신문 발행

옥에 있을 때 ‘대량생산’을 통한 의식화 수단을 강구하면서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는 프로덕션 설립과 신문 창간, 두 가지 방향을 두고 연구를 거듭했던 이태복. 그는 출소한 후에 후배들의 권유로 신문 창간 쪽으로 방향을 정했고 ‘주간노동자신문’을 창간하게 됐다. ‘노동자’라는 이름이 붙은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고, 지역과 기층 조직들은 구독운동과 기금마련에 발 벗고 나서 주었다.
1989년 10월 첫 발행된 ‘주간노동자신문’은 속보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2회로 확대 발행되다가, 10년이 지난 1999년에는 일간지 ‘노동일보’로 이어졌다. 1996년 무렵부터 이태복은 신문에서 어느 정도 물러나 사회복지, 노인복지 등의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고 사회복지제도의 대안을 연구하는 ‘인간의 대지’를 창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3월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직을 맡았고 다음해 1월에는 ‘의약분업 사태’를 수습할 임무를 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맡게 됐다. ‘주간노동자신문’과 ‘노동일보’는 한국현대사와 노동운동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겼지만, 이태복의 청와대 행 등 정치활동은 한 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노동일보’는 IMF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해외매각을 반대하고 노동계 내의 방향성과 의제를 제시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사회과학 서점 등을 통해 학생, 노동자들에게 널리 배포돼 사랑 받았다. ‘정관계 인사 아들 병역면제 명단’ 문건 폭로, 산자부가 발전산업노조 해체 유도문건 작성사건 폭로 등 수많은 특종도 노동일보의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이태복은 노동조합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꿈꾸었고 IMF 무렵에는 ‘밥그릇 논쟁’ 등을 지면을 통해 벌이기도 했다. 대기업 노조의 장기파업 등 전투적 투쟁노선을 비판하면서 밥그릇을 넘어 국민경제 전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노조로부터 ‘친자본적’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또 노조와 무의탁노인, 장애가정 등을 연계해주는 노동운동의 복지 참여를 주장하며 ‘빈자일등운동’ 등의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신문 창간 얼마 후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겪으며 후배들이 손을 털고 나가는 일을 겪기도 했고, 기자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등 재정 상황도 힘들었다. 노동일보 내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태복은 스스로 운동의 하나로 언론을 시작했다는 입장이었고, 동지관계라 생각했던 기자들과 ‘노사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오충일 목사에게 발행인 자리를 넘기고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났다. 반면 노조는 장관직을 맡은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우은식 노조위원장은 2002년 7월 월간『말』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일보가 이만큼 온 데에는 이태복 전 회장의 힘이 매우 컸다. 노동일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진심으로 존중한다”고 공을 인정하면서도 ‘이태복 신문’에서 벗어나 환골탈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



이태복은 주변의 다양한 평가 속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맡았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들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의약분업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외에도 비정규직 정규직의 격차를 20% 내외로 줄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관련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부처 간의 이해관계라는 벽에 부닥치기도 했다.
장관직을 마친 그는 현재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기름값, 휴대전화비, 카드수수료, 약값, 은행금리 인하 등을 요구하는 ‘5대거품빼기범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태복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에 뿌리를 둔 흥사단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관통해 온 ‘실천론’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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