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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각하, 나도 민족보다 더한 우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보는 월간 말 94년 6월호] 김일성 주석 인터뷰

문명자 / 유에스아시안뉴스 국제정치 담당 주필

입력 2008-07-29 14:31:03 l 수정 2011-02-25 23:04:15

문명자 선생님 영전에 조의를 표합니다

월간 『 말』이 94년 6월호에 독점게재 했던 재미 언론인 문명자 씨의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 인터뷰 기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문명자 씨가 21일(현지시간) 오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입니다. 많은 독자여러분께서 '94년 6월호를 구입할 수 없느냐' '기사를 열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의를 하셨습니다. 이에 기사 전문을 온라인 서비스합니다. 월간『말』은 8월 중순 발간될 9월호에서 언론인 문명자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계획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문명자 씨는 1930년 대구에서 출생해 일본 명치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했습니다. 1961년 조선일보 주미특파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한 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MBC 워싱턴 특파원을 거쳤으며 백악관에 33년간 출입했습니다. 문 씨는 1973년 MBC 특파원 시절 보도통제 중이던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것과 관련, 중앙정보부의 체포를 피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했습니다. 또 전 미국 여기자클럽 회장, 워싱턴 외신기자 클럽 부회장, 세계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재미한인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깊숙이 진출한 인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한국 출신 기자로는 유일하게 중국의 덩샤오핑과 북한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해 주목받았습니다.


재미언론인 문명자씨는 지난 94년 4월 21일 평양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불바다 소동에서부터 핵사찰, 남북대화, 통일문제 그리고 단군묘 발굴에 이르는 광범위한 현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문명자씨의 인터뷰 기사를 독점게재한다.

여섯번째 본 평양

월간말 1994년 6월호 표지

월간말 1994년 6월호 표지ⓒ월간 말

지난 94년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82회 생일이었다. 필자는 그 며칠 전인 4월 11일 북·중 국경지대에 위치한 UNDP 지역 취재를 마치고 북경에 돌아와 있었다. 워싱턴을 떠날 때 4·15 취재를 위해 뉴욕의 유엔 북한 대표부에 비자 신청을 해두긴 했지만 UNDP취재로 너무 지쳐 바로 귀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CNN의 보도담당 부사장,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윌리엄 테일러, 『워싱턴 타임스』의 여기자 조세트 샤이나와 그의 언니인 사진기자 자매,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여러 전직 수상과 장관들이 4월 12일 북경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뭔가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필자는 심기일전해 4월 13일 평양으로 들어갔다. 필자로서는 남북고위급회담 제2, 4, 6, 8차 취재와 지난 92년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 취재(인터뷰)에 이어 6번째의 방북이었다.

사실 UNDP 지역을 취재하는 동안 필자는 최근 북한에 다녀왔다는 한 조선족 교포로부터 으스스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북한에는 지금 길가 모퉁이마다 탱크들이 서 있고 자동차들은 나뭇가지를 꽂아 위장한 채 다니며 총을 든 군인들이 몇 미터 간격으로 배치돼 있는데 그들은 수류탄까지 차고 있어 배나 허벅지 쪽이 불룩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가서 본 평양은 전혀 달랐다. 4월 13일 오후 평양 거리에서는 아이들 손목을 잡고 나온 시민들이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전후한 10일 정도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전쟁 분위기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아무리 통제사회라 한들 국민들로 하여금 강제로 웃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는 4월 15일의 오찬에 초대돼 김 주석을 잠깐 만났다. 정식 인터뷰일은 4월 21일이었다. 그 사이에 필자는 평양의 식물원, 황해북도의 농촌사회, 동명성왕릉,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씨의 집 등을 방문했다.
21일 오전 11시 필자는 금수산의 주석궁으로 안내됐다. 놀랍게도 김 주석은 지난 92년 인터뷰 때 필자가 본 모습 그대로였다. 오찬을 겸한 인터뷰는 오후 1시 40분까지 진행됐다.

“불바다 소동에 깜짝 놀랐다”

-고령이신데도 불구하고 2년 전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놀랍습니다. 현재 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반도의 긴장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제가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하도 으스스한 얘기를 들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에 관한 질문부터 드립니다. 김정일 사령관이 단추만 누르면 전쟁이 터질 정도로 전쟁 준비가 다 돼 있다는데 과연 북한은 전쟁을 하려는 것입니까.

“문 선생, 여기 와서 보니 과연 으스스한 얘기가 그대로 입니까. 어디든지 가 보시오. 우리가 전쟁 태세를 갖추고 여차하면 쳐 내려갈 참이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입니다. 우리는 전쟁할 꿈도 꾸지 않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역대정권들이 우리가 남침한다고 주장해온 지 수십 년이 됐습니다만 과연 우리가 남침했습니까.”

-그렇다면 판문점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가 했다는 ‘불바다 발언’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미국신문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북측의 박 대표가 메모를 보면서 불바다 발언을 했다. 때문에 그것은 박 대표의 자의적인 발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 같은 사회에서는 위의 지시 없이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김 주석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나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조선과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하기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지요. 보고를 받고 보니 전후사정이 있더군요. 사람과 사람이 회담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말에 따라 이쪽 말이 나오는 것이지 우리 대표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혼자서 하겠습니까. 우리 대표는 계속 아니라고 하는데 남측 대표가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을 계속하고 다시 그에 대응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필자는 다음날인 22일 김용순 당 외교위원장과 식사를 같이 했는데 이 문제를 묻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이다.
“하루속히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켜야 할 텐데 너무 답답합니다. 말이란 싸울 때도 전후좌우 동기가 있는 법인데 생선에서 대가리 떼고 꽁지 떼고 극히 일부분만 부각시켜 ‘불바다 운운’해 우리를 전세계에 전쟁 미치광이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판문점 실무접촉은 비공개로 되어 있는데 남측은 약속을 위반하고 그 부분만을 남조선 텔레비전으로 방영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위반을 따질 분위기도 아니고 해서 그대로 넘겼는데 이처럼 사사건건 약속을 위반하는 것은 바로 남측입니다.”)

문명자 씨, 김일성 주석 인터뷰

재미언론인 문명자 씨가 1994년 4월 21일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 하고 있다.ⓒ월간 말


핵무장한다고 나라 발전되나

-남한과 미국은 집요하게 북한이 핵을 가졌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님의 입장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들은 전에는 있지도 않은 핵폭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핵폭탄을 제조할 능력이 있다고 하는 등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면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 왔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미국과 대화를 할 것 있습니까. 우리는 전력이 필요해 소련제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 발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플루토늄이 나오는 양이 많다고 해서 작년 6월과 7월 뉴욕과 제네바에 있었던 조·미 회담 때 우리는 ‘그 점이 의심스럽다면 우리의 모든 원자로를 의심스럽지 않은 경수로로 대치해주시오. 우리에게는 돈이 없으니 원조를 하든지 차관을 주든지 해주시오’ 했습니다. 미국도 그렇게 하려 했습니다. 작년 12월 조·미 양국은 뉴욕에서 다시 합의했고 이 합의를 실천해가려는 참인데 또다시 우리가 핵을 가졌다는 의심이 튀어나와 조·미간 합의가 실천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핵폭탄을 가졌다면 실험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실험을 어디서 한단 말입니까. 지난 시대 인도가 태평양의 섬을 돈 주고 빌려서 핵실험을 해가며 핵무장을 했지만 그것이 인도의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오히려 핵폐기물을 내버릴 곳이 없어 극도로 애를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핵을 가진다면 대체 누구를 겨냥해 핵폭탄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결국 우리 동족을 겨냥한 핵무장이란 얘기가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핵을 우리가 왜 가져야 합니까. 그런데도 남조선에서는 불바다 발언이다 뭐다 하면서 금방이라도 우리가 쳐 내려올 것처럼 연일 목소리를 높였으니 온 국민이 한동안 공포 속에 살았을 것 아닙니까. 지난 정부 때 북남고위급회담을 해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미국이 놀랄 정도의 합의서까지 이루었는데 현재 우리는 1~2년째 허송세월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전개돼야 하는지 나는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북한의 모든 원자로를 경수로로 대체하라고 했을 정도로 핵투명성에 자신이 있다면 IAEA가 보자는 대로 모든 곳을 다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보여 달라는 곳을 보여주고 나면 다른 곳이 의심스럽다고 하고 그곳을 보여주고 나면 역시 또 다른 곳이 의심스럽다는 태도를 계속해왔습니다. 현재 그들은 우리의 군사기지가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는데 군사기지 사찰 문제는 IAEA 사찰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북과 남은 북남합의서의 부속합의서에 따라 상호군축이 이루어지면 서로 군사기지까지 다 보여주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때문에 군사기지를 보려면 우선 북과 남이 군축을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북과 남이 단계적으로 군축을 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북남이 합의한다면 우리에게는 방대한 군비와 무력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우선 남북 쌍방이 무력을 10만 명 선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무력을 축소한 후 자체적으로 방위할 수 있을 때 미군이 철수하라는 것이지 당장 미군이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같은 합의는 지난 북남합의서 채택 때 이미 이룩된 것으로 나는 기억합니다.”

“북남대화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없다”

-그간의 쌍방 접촉을 현상적으로 보자면 북한측이 특사교환을 원치 않는 것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쪽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 정권 때 남측이 소련, 중국과 수교했던 것처럼 우리가 조·미 회담을 통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려는데 왜 ‘북남특사교환’ 문제가 거기에 조건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남조선이 중국, 소련과 수교할 때 우리가 북남간의 어떤 문제가 해결돼야만 수교가 가능하다고 가로막고 나섰다면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남측이 중·소와 수교할 때 어떠한 압력도 넣은 일이 없습니다. 특사교환 문제는 북남 스스로 대화해서 처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북남이 만나 해야 할 일들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손으로 이룩한 합의서를 단계적으로 이행해 북남 사이의 거리를 좁히면서 민족통일을 위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북남대화 문제가 왜 조·미 회담에 조건으로 붙어야 하고 있지도 않은 핵 때문에 못한다, 오히려 경제제재를 하겠다 이런 얘기들이 왜 나옵니까. 문 선생과 만나기 며칠 전에 남측 스스로가 특사교환문제를 조·미 회담 전제 조건에서 철회한 것으로 아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할 문제였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계속하셔야지요?

“물론입니다. 북남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 일각에는 ‘북한은 걸핏하면 합의를 위반하는 믿을 수 없는 존재 내지는 행동이 예측 불가능한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시각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합의된 원칙을 위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럽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상대방의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까지도 이상하게 보이는 법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석께서는 현재의 핵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하려 하십니까.

“우리는 그간 핵문제 해결을 위해 제안할 것은 모두 제안했습니다. 보여줘야 할 것은 다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의심스럽다고 하니 문제입니다. 이번에 CNN 등 서방언론들이 취재한다고 해서 ‘찍어 갈 것 다 찍어 가게 모두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고 알려 이것이 현실이란 것을 납득하게 말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핵문제가 무난하게 해결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고 일부에서는 여전히 중국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 일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도 못하며 우리가 중국의 속국도 아닙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영삼 대통령 방중 후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우리는 그같은 영향력이 없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위성국가도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소련블록에 위성국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시 강대국 소련이 요구한 상호협력이란 것은 전력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다 대주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 소련 블록에 들어갔다면 우리도 소련이 요리하는 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 이후 체제는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

-북한에 대한 모든 의심의 근원은 고려연방제 같은 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일종의 공포감과 불신에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석께서는 남북통일 과정에서 남한의 자본주의체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왔을 때 ‘주석에게 물을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엇입니까’했더니 문 목사의 말이 ‘장차 통일할 때 자본가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입니까’ 하더군요. 이제 문 선생도 똑같은 것을 물으니 그때 답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내가 1930년대 항일운동할 때도 운동가 사이에서 저건 우파다, 저건 좌파다, 또 같은 공산주의자내에서도 ML당이다, 무슨 당이다 심지어 저건 반동이다, 저건 죽일 놈이다 하는 바람에 제일 골머리를 앓았지요. 당시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해 일본에 대항하던 시절 아닙니까. 목사님이 말하는 자본가 중에도 조국과 민족을 팔아가면서까지 오로지 돈만 벌려는 악덕자본가들도 있지만 반면에 작은 장사로 시작해 그것 키우는 과정에서 자본이 없으니 미국돈 빌려 일어서고 벌어서 또 빚 갚느라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나는 일제때도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합쳐야 독립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 같은 도움이 없었다면 항일 무장투쟁 때 너무나 고생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돈벌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판 악덕자본가는 분명히 가려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힘을 합쳐야만 통일이 된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는 외국에 빌린 돈 많지 않습니다만 남조선 정부나기업은 그렇지 않은데, 정부나 기업이나 빚 다 갚아야 큰소리할 것 아닙니까. 외국빚 다 갚고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그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 우리가 논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일부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사상이 우선이라 보기 때문에 주석의 지금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회고록에도 썼지만 내가 겪은 일을 하나 들겠습니다. 항일운동 시절 내 생명을 구해준 분으로 손정도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중국간수를 매수해서 꺼내주었고, 조금 후 일본경찰이 본격적으로 잡으러 다닐 때 제 손에 돈을 쥐여주면서 ‘빨리 이 고장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길로 저는 항일 빨치산운동에 들어갔는데 손 목사에게는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아들 손원일씨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국방장관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친형처럼 따르던 둘째 손원태씨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네브래스카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일하는 그를 찾았습니다. 그와 가족을 평양으로 초청해 수십년 만에 만났는데 처음에는 ‘손 선생 오래간만입니다’하고 공식적인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손원태가 ‘주석님, 내가 옛날에 쭈평(중국 꽈배기) 사 달라고 손목 붙들고 졸랐는데 그것 안 사주시겠습니까’합디다. 순간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어린 원태에게 쭈평을 사 주던 그 옛날로 돌아가 나도 ‘원태야’하면서 붙들고 울었습니다. 내가 사상에 집착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십년간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그를 초청했겠습니까. 원일은 남에서, 나는 북에서, 원태는 미국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우리가 해방된 조국에서 함께 못 살았다는 게 비극일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한 민족 두 체제라는 과도기를 거친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체제로 가야 할 것 아닙니까. 한국의 일부에서는 고려연방제 역시 적화통일로 가는 한 전술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체제 문제는 우리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를 남한사회에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이 하나 되어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와 같은 중립적인 독립국가를 만들면 자자손손 번영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상당히 시일이 걸리고 우리가 못다 한 일은 젊은이들이 하겠으나 일단 우리가 하나가 돼야겠다는 고위급회담의 합의를 합의에 그치게 하지 말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쌍방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식량 배급 안 준다는 것은 낭설

-이제 북한 내부 문제로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현재 중국 연변 쪽에 가보면 ‘북의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다’ ‘평양만 제외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쌀 한 톨 배급 못 받았다’ 심지어 ‘누구는 굶주려서 자살했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식량난은 실제로 어느 정도입니까.

“식량난이라니오. 우리는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은퇴한 사람 등 처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배급은 정확하게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거 우리 못사는 조선 사람들의 꿈이 이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사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꿈을 이루려고 계속 노력해왔고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배급이 없다는 것은 낭설입니다. 혹시 의심스러우면 문 선생이 여행하다 사전에 예고하지 말고 아무 시골집이나 식사시간에 문을 두드려 물어보시오. 또 시골길 걷다가 아무 행인에게나 물어보시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작년에 냉해 때문에 흉작이라고 야단이었는데 북한도 흉작이 아닐 수 있습니까.

“남쪽이나 일본이 흉작이라는 것은 듣고 있습니다만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 농작물은 대풍년까지는 아니나 풍년이니 이것도 농촌사람들에게 직접 한번 물어보시오.”
(필자는 실제로 농촌마을을 보기 위해 황해북도 쪽의 시골길을 자동차로 여행하다가 한 농촌집에 들렀다. 그곳은 청산리 마을처럼 소문난 곳이 아닌 그저 평범한 농촌이었다. “식량관계는 괜찮습니까”하는 질문에 집주인은 “우리가 매일 고깃국 먹을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먹을 식량은 배급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강경파들은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면 경제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조·미가 흑연원자로를 경수로로 교체하는 문제까지 합의해가는 마당에 IAEA가 들고 일어나 유엔에서 경제제재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휴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미국측으로 인해 달러권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실질적인 경제제재를 받아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제재 이상의 또 어떤 경제제재를 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한 번 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자는 그 후 북경에서 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한 북한 관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에게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는 나라의 무역관리가 현장에서 겪는 고충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이다.
“우리는 신용장을 내는 것도 일본의 아시카가 은행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중국 은행에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력으로 물건 파는 것도 보따리장사식으로 해야 합니다. 남쪽 상인들은 중국이나 홍콩, 싱가포르, 일본, 미국 등의 회사를 통해 우리 물건들을 사가고 있습니다. 자연히 몇 단계에 걸쳐 중계 무역업자들의 이윤을 보장해주다보면 남쪽 소비자들은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우리 물건을 사 먹어야 합니다.”)

문명자 씨, 김일성 주석 인터뷰

문명자 씨, 김일성 주석 인터뷰ⓒ월간 말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 감동적이었다

-한국에는 30년 만에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한 해가 넘었습니다. 문민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는 작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우방국가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라는 것은 외교사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뭉치면 동맹국들과의 조약들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 스스로 먼저 그 조약들을 파기할 것입니다. 그 같은 감동적인 취임사가 발표된 후 나는 10대강령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1936년 보천보전투 때 무송에서 내놓았던 10대강령과 유사합니다. 그때의 골자도 ‘우리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이 주의, 주장 가지고 흩어지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민족이 하나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하겠고 서로 오해나 의심이 있으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텐데 김 대통령은 ‘북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 ‘중단시켜야 한다’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느니 ‘핵문제 해결 안 되면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라느니 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감동적인 취임사를 발표한 후 1년도 안 돼서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더욱 분열적으로 몰고 가게 됐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체제에서 살더라도 하나라는 긍지를 버리지 말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주제를 바꾸어 질문 드립니다. 일전에 평양에서 단군묘가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주석께서 발굴 과정에 간여하셨다고 들었는데 단군묘는 어떻게 해서 발굴된 것이며 그것이 단군묘라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 고고학자들이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평양 근교의 한 지점을 발굴하다 굉장히 오래된 뼈를 발굴했는데 지역이나 연대로 봐서 대단히 중요한 유물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가 현장에 가서 보니 분명 사람의 뼈였습니다.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기 위해 독일과 스위스에서 연대 측정기구를 사들였는데 미국에 세계 최고 성능의 기구가 있다고 해 이것까지 사 와서 측정을 했더니 ‘5천11년 된 뼈다’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올해가 단기 4327년인데 5천년 전 평양을 도읍으로 한 왕의 뼈라면 ‘이것은 단군의 뼈가 아닌가’하는 분석이 나온 것입니다. 나는 ‘그곳이 단군의 무덤이라면 그 주변에 색시묘도 있을 것이다. 계속 찾아보라’고 했는데 진짜 색시묘도 발굴이 되었습니다. 현재 발굴된 무덤과 뼈들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복원공사가 진행중인데 오는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단군묘역을 전세계에 개방할 예정입니다. 남조선에서는 단군숭배자인 대종교 교주 안호상 박사와 종무원장이 이번 개천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사람들과 복경에서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나는 환영의 뜻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회고록 6권까지 집필 마쳐

-우리가 곰의 자손이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된 셈입니까.

“우리가 곰의 자손이라면 5천년 역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간 우리 학자들의 유적발굴 과정에서 현재의 북경 일대에서까지 고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언젠가는 중국 역사학자들도 그에 동의하겠지만 현재 조·중 학자들이 합동으로 고대사 연구를 해보자는 분위기까지는 조성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이 곰의 자손이란 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입니다. 자신들의 역사는 2천 몇 백년에 걸친 유구한 역사요, 우리의 5천년은 신화이며 조센징은 곰의 자손이라 날조한 것입니다. 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운동할 때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지금 동북지방 요녕성에 개평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김 주석은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내 서재 들어가는 좌편에 지도가 있는데 1~4권 중 3권을 가지고 와. 그것이 중국지도야.”
비서가 지도를 가지고 오자 주석은 “그것 한번 열어봐”했다. 비서가 지도를 꺼내자 그는 돋보기까지 꺼내 들고 지도를 들여다 보다가 중국 동북지방의 한 지점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필자에게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개평현. 이것은 내가 일제 때 이 지역에서 모택동, 주은래와 만났을 때 그들에게 여기에 얽힌 조선역사 얘기를 자세히 하고 ‘이 곳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평정하게 만들었으니 개평현이라 하시오’라고 권고해 뒤에 주은래 수상이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앞으로도 일본인들이 날조한 우리 역사를 정사로 고치는 데는 전민족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주석님의 회고록을 4권까지 읽었습니다. 회고록은 계속 쓰고 계십니까.

“계속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6권까지는 다 써놓았는데 아마 5월 초에 5권이 출판될 겁니다. 내 기억력이 확실하게 유지될 때까지는 계속 쓸 것입니다.”

-지난 92년의 인터뷰 후 2년 만에 뵙는데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특별한 건강 유지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지금도 계속 지방 현지 시찰 같은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활동해서 좋고 건강해져서 좋고 여러 가지로 좋습니다.”

사실 2시간 40분간의 인터뷰 동안 그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즐겁게 식사를 했으며 먹는 양도 많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화중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1930년대의 회상에서 연도나 지명, 사람 이름들에 대한 기억력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걸음걸이 역시 활달해 “부축을 받으며 걷는다”는 일부 보도가 근거 없다는 점을 재삼 확인하며 필자는 인터뷰를 마쳤다.

엉터리 북한 정보의 산실, 중국 조선족들

지난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취재차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을 때는 필자 역시 지난 40년간 들어온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후 6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평양의 여러 고위 인사들만이 아니라 농민, 공장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기자의 눈으로 만나고 취재하면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퍽 달라졌다.
그들은 매우 예의바르고 공손하며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아는 사람끼리만 더 없이 좋은 관계이지만 북한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어떤 이들은 “북한도 개방되고 나면 중국처럼 변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만연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일 관광객들의 통역으로 나선 중국 처녀들은 매춘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며 연길의 가라오케에는 소련 미인 호스티스까지 와 있는 상황이다. 북한 사람들 또한 이같은 중국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필자는 “우리는 온통 도덕은 무너지고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그 같은 개방은 원치 않는다”는 얘기를 취재중에 여러명의 북한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언론에는 북한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그 대부분이 북·중 국경지대, 즉 연길이나 단동 지역에서 북한을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된, 공작의 냄새가 다분히 나는 엉터리 정보라고 보고 있다. 필자가 가서 본 북한과는 너무나 다른 보도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세 갈래다. 하나는 몇 천명뿐이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들이다. 그들은 중국 국적 갖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중국 국적인데 이들은 성향에 따라 친북과 친남으로 나뉜다. 친북 성향의 사람들은 당연히 북한을 자주 드나들지만 친남 성향의 사람들도 친척방문, 장사 등의 명분으로 위장해 얼마든지 북한을 드나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한약재 등을 가지고 한국땅에도 수시로 드나든다. 그들에게 한국은 속된 말로 봉을 잡는 땅이고 북한은 자기보다 못사는 멸시의 대상이다. 그들은 셋만 모이면 한국에 가서 돈 버는 얘기, 북한이 얼마나 못사는지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연변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몸 성히 돈을 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이 그들의 북한 정보들도 불확실하고 부정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교포 중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떠벌리는 “북한 주민들이 굶주려서 오늘 내일 죽는다”든지 “곧 전쟁이 날 것”이라든지 하는 대단히 부정확한 정보들이 ‘현지 소식통’ ‘정통한 소식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연일 한국 언론에 보도되는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특히 연변이나 단동 지역의 교포 중국인들이 하루 속히 민족의 양심으로 돌아가 북한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한국에 제공했으면 하는 게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분단 시대에 해외교포의 최대 과제는 분열된 민족이 화해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양에서 다시 만난 이인모 노인


평양에서 맞은 4.19 아침 필자는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의 이인모 노인댁을 방문했다. 지난 92년 6월 경남 김해군 진영읍의 김상원씨 집에 의탁하고 있던 그를 찾아가 인터뷰한 후 꼭 두 해 만이었다.

그의 집은 1백5층 호텔로 유명한 유경호텔 건축 현장 근방이었다. 자택은 2층 양옥으로 상당히 넓고 큰 집이었다. 집에 비해 아담한 정원은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었다. 필자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지 노인은 연신 현관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93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구급차에 실려 힘없이 삭정이 같은 손을 흔들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는 혈색이 돌고 살이 오른 건강한 모습이었다. 두 해 전 진영에서 작별하며 필자는 “평양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었다. 그때 노인은 말없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필자의 손을 잡았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이다.

필자가 열댓 평은 됨직한 널찍한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노인은 필자의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렸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에서 아무 걱정없이 살건만 남쪽에 두고 온 이들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이 유일한 아픔이라고 했다. 필자를 보니 두고 온 사람들을 만난 듯 하다며 노인은 필자의 두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다 죽어가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온 노인을 살려낸 것은 북한식 표현으로 하면 ‘당의 결심’이었던 듯했다. 김정일 비서가 “우리의 정성과 의료진의 기술로 리인모 동지 하나 못 살릴 것인가”라며 매일 일일 보고를 받으며 노인의 병세를 챙기고 의료진을 독려했다고 한다.

거실벽에는 “리인모 동지는 신념의 화신입니다”라고 쓴 김정일 비서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북송되기 전인 92년 11월 그의 외딸 현옥씨가 김정일 비서에게 아버지의 조속한 송환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을 때 그 회답으로 받은 것이라 했다.

그의 병실을 찾아온 김일성 주석은 자필로 써서 만든 노인의 당원증을 그에게 전달했다. 부인 김순임씨는 이같이 전했다.
“주석께서 병원을 찾아오셨을 때 저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당과 위대한 수령 그리고 지도자 동지 덕분’이라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석께서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나라와 당이 노력했다 해도 부인이 평생 동안 집념으로 남편을 기다린 그 의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부인의 위대한 의지 덕분입니다’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녀 역시 눈물 없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북한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북한 최고의 기념일인 7.27 전승기념일(휴전협정 조인일)에는 노인은 주석단에 앉아 군사퍼레이드를 사열했다고 한다. 비행기로 백두산에도 다녀왔다. 달리 아픈곳은 없는데 감옥에서 고문으로 부러졌던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

“그래 20대에 헤어져 70대에 다시 맞이한 신혼생활이 어떻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인모는 살아 있다. 꼭 돌아온다’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모든 게 아들 하나 기다리며 평생을 살다간 그 분의 정성 덕분이지 싶어 현옥 아버지와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 무덤에 가서 통곡했습니다.”

이 부부의 신혼시절 아내가 그토록 소원했으나 끝내 사주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났다던 피아노가 한 방에 놓여 있었다. 김정일 비서의 선물이라고 했다. 부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 부부는 그들이 해방 후 풍산에서 활동할 때 함께 불렀다는 노래를 합창했다.

노인의 방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몸에 좋다는 약재를 비롯해 먹을 것, 입을 것 등 각양각색의 물건들이었다. 그 중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노병 할아버지께’라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시작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이것은 저의 정성입니다.” 소년은 사탕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 같은 편지와 선물들은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계속 답지하고 있다고 했다. 상 위에는 노인이 그 사이에 쓴 것인 듯 한 원고뭉치도 눈에 띄었다. 노인은 말했다.

“남쪽에서 고생하시는 여러분들께 혼자 편히 지내 죄송하다는 말, 통일되는 날 꼭 만나자는 얘기를 전해주십시오. 현실을 기록하는 인민군 종군기자의 사명을 다하려 노력하면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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