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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과서대문형무소

사건으로 보는 서대문형무소 | 해방 후 편 ⑤

글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입력 2009-02-02 13:36:57 l 수정 2009-02-09 12:18:32

서대문감옥의 ‘봉암새’와 ‘죽산조’
올해는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정권에 ‘사법살인’ 당한 지 꼭 반세기가 된다. 1959년 7월 31일 60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고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산주의운동을 통해 일제와 싸우고, 해방 뒤에는 전향하여 정부수립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혁신정치인 조봉암은 오직 이승만의 라이벌이란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 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들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⑴


진보당사건(2년)과 민족일보사건(5년)으로 7년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이상두(李相斗)가 죽산 조봉암이 수감되어 처형 직전 비둘기에 모이를 준 일과, 사후에 수인(囚人)과 형무관 사이에 나돈 ‘봉암새’의 얘기를 적은 것이다.

조봉암(1899~1959)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는 등 숱한 고난을 겪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전향하여 이승만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1948년 5·10선거에 참여하여 제헌의원이 되었고, 1950년 5·10선거에서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7월 발췌개헌 후에도 국회부의장에 재선되었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얻고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여 이승만정부의 온갖 부정과 탄압에도 216만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조봉암은 1956년 1월 26일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 <창당발기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1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환기 계승하여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의 배격과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추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채택하였다.

1.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를 실현한다.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을 육성한다.
3. 민주우방과 유대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한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제시하였다. 이승만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통일방안이었다.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을 기소한 검찰은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⑵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월간 말

평화통일론을 보안법으로 묶어

평화통일론이 ‘헌법파괴’ ‘국헌위배’라는 이승만정부의 무소불위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해 조봉암과 진보당의 반박논리는 명쾌했다.

북한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억지요, 난센스다. 북한에서 ‘밥’이라고 한다고 우리는 ‘밥’을 ‘떡’이나 ‘죽’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이 평화통일론을 들고 나온다고 하면 우리는 수세에 몰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겢오岵막?이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진보당의 통일론은 결코 공산당의 전술에 넘어간 것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 만일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보안법 위반이라면 자유당이 내세우는 유엔 감시하의 북한만의 선거안(案)과 1954년 변영태 외무장관이 제네바회담에서 제시한 14개조 통일론도 무력통일·북진통일이 아닌 바에야 평화통일이므로 위법이 아닌가. 사실 북진통일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또 위헌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한반도와 부속도서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에 사는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그러할 때 북진으로 전투를 수행하면 필연코 우리 영토를 파괴·유린하고 국민을 대량 살육하는 결과가 된다.⑶

이승만은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혁신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는 조봉암과 진보당의 제거에 나섰다. 조봉암의 제거에는 민주당이나 보수신문, 미국에서도 침묵 또는 ‘묵시적 동조’의 분위기여서 일을 꾸미는 데 어렵지 않았다.

검찰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조봉암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2월 16일 조봉암과 당간사장 윤길중을 비롯하여 박기출·김달호·신창균·조규희·이명하·조규택·전세룡·이상두·권대복·이동화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조봉암에게는 국보법 외에도 간첩죄에 무기불법소지죄 등이 병합되었다.

조봉암은 피신했다가 당간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자진 출두하여 구속되었다. 검찰은 조봉암에 대한 기소장에서 ①박정호 등 당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된 간첩과 접선 내지 간첩의 공작목표가 진보당의 지원이라는 것 ②재일 조총련에서 파견한 정우갑과 밀회 ③북한 당국 산하의 이른바 조국통일구국투쟁위원회 김약수에게 밀사를 보내어 평화통일추진을 협의한 사실 ④북한노동당이 동양통신 외신부기자이자 진보당의 비밀당원인 정태영을 통하여 진보당에 대한 강평서를 보낸 사실 등을 열거하였다.

자유당은 1958년 24파동을 일으켜 국보법을 개정하였다. 요지는 평화통일론을 엄단하려는 목적이었다. 어디까지나 조봉암을 모살하려는 조치였다. 측근들이 조봉암을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자신도 진보당 탄압의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 없다”⑷고 거절하였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 하겠다고 전하였다.⑸ 진보당 간부들의 체포와 조봉암의 자수와 관련되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민의원선거 4개월을 앞두고 선거대책에 몰두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든 윤길중겵떡焞?조규택 씨 등은 서울에서, 그리고 박기출 씨는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약수동의 조봉암 씨 집을 급습한 10여 명의 형사대는 이미 이틀 전에 조 씨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극도로 당황했다. 이로부터 48시간 동안 시경은 관하 전 수사능력을 조 씨 색출에 투입했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조 씨는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였으며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일 밤 그는 그곳에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친구들은 이제 붙들리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모든 준비를 해줄 터이니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한다.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고, 그 친구들은 말했다.⑹

서대문형무소의 모범 사형수

조봉암을 비롯하여 진보당 관련 인사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봉암은 3?운동 때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1932년 9월 28일 상해에서 한인 반제동맹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에 피체되어 이해 10월 10일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되고, 12월 3일 신의주경찰서에 유치되었다. 1933년 9월 공판이 시작되고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1939년 7월 출옥할 때까지 신의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조봉암은 이때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진보당사건의 변론을 맡은 한격만 변호사는 조봉암이 과거 농림부장관 재직시 공금유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당시 그를 재판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은 변론을 하여 방청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때 재판석에서 나는, 피고석에 앉은 죽산 선생의 손가락들이 떨어져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진 고생을 겪은 분을, 일제시에 그래도 편히 지낸 내가 감히 재판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심리를 해나가는 도중 나는 이 사건은 정치적 모략이요, 중상이라고 판단하고 단연 무죄를 언도했던 것입니다.⑺

이승만정부는 조봉암의 농림부장관 재직시에 공금횡령 혐의로 기소했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다. 조봉암에 대한 이승만의 박해는 이처럼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일찍부터 정치적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책을 읽으며 조용히 운명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집행의 날을 기다리면서 딸 호정 여사가 차입한 소설·종교·철학 등 서적을 많이 읽었고, 한글사전·과학사전 등은 어찌나 탐독했던지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 되었다고 그의 딸은 말했다. 하루 30분가량 간수에 이끌려 수갑을 차고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가거나, 면회를 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정좌하여 독서삼매경에 잠겼고, 엄격한 감방규칙을 잘 지켜, 모범수로서 간수들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고 한다.⑻

조봉암을 죽이기로 한 이승만정부의 음모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첩자 양명산을 내세워 불순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모략속에서도 1심은 징역 5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용공판사를 죽이라는 따위의 관제시위가 벌어지고 이승만의 해괴한 발언이 언급되었다. 마침내 고등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도 그대로 따랐다.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조봉암은 7월 17일 제헌절을 맞이하여 옥중성명을 발표하였다. 제헌의원과 두 차례 국회부의장을 지낸 그로서는 제헌절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이다.

국법에 의하여 사(死)의 재결을 받고 나는 제헌절에 임하여 국민과 동지들에게 한 말씀을 올리려고 합니다. 나는 비록 법 앞에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은 생사를 초월한 나의 신조이고 또 어느 우국자를 막론하고 다 같은 심경일 것입니다. 특히 과거의 우리 동지들은 현실의 포로가 되지 말고 조국번영과 우리의 이념을 살리기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⑼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도 기각되었다. 대법원의 주심 판사였던 김갑수가 재심의 주심이 된 것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일반적으로 사형수는 몇 차례 재심청구를 하고 확정판결 뒤에도 한두 해 정도는 형의 집행이 연기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감옥에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집행이 유예된 사형수가 여럿 있었다. 조봉암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조봉암은 형이 집행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 2사상 15방에 갇혀 있었다. 사형수들이 갇힌 옥사였다. 사형이 확정된 1959년 7월 30일, 진보당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무죄선고를 받은 권대복 등 관계자들이 조봉암이 수감된 방 앞으로 몰려가 울분에 찬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승만 도당이 선생님을 모살할 것입니다.” 조봉암은 껄껄 웃으며 쇠창살문으로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노여워들 하시오. 한 사람이 죽어야 한 사람이 사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 박사가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 하지 마세요.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많은데 평화통일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하게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⑽


“내가 마지막 희생자 되길”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법무장관 홍진기는 대검찰청에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고등검찰청의 안문경 검사가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집행장에서 형 집행을 지휘하였다. 수많은 의병겣떳냄諍염〉湧?형이 집행된 바로 그곳이다.

머리를 산뜻하게 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은 사형수는 가슴에 2310이란 번호를 붙인 채 10시 45분에 형장에 도착하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으로 태연한 모습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다음 순간이면 이 세상과 영영 이별해야 될 자신의 운명에는 아랑곳없는양 양손을 묶인 채 창백해진 얼굴에 담담한 표정으로 집행관의 의례적인 인상조서를 듣고 있었다.⑾

집행관은 의례적인 철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⑿

이 대통령의 정치적 희생양이 된 조봉암은 입회목사에게 누가복음 제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때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는 심경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이승의 모든 절차는 끝났다. 형의 집행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두 눈에 하얀 수건이 가려졌다. 사방은 깊은 물속같이 조용하다. 집행관과 목사, 형무관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집행명령이 내렸다. 사형수 조봉암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이어 ‘철썩!’ 소리와 함께 사형수가 앉은 의자 밑의 마룻바닥이 떨어져나가면서 일은 끝난 것이다. 시작은 11시 3분, 1959년 7월 31일 한낮의 일이었다. 11분 후인 11시 14분에는 이미 조봉암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검시관의 검시를 받았다.⒀

이승만정권은 조봉암의 처형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치안국장 이강학의 명의로 각 언론사에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 독립운동가이고 진보적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봉암의 처형 사실은 모든 언론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국일보가 1단 6행으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죽산조’와 ‘봉암새’의 신화가 수인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졌다.

1) 이상두,『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118~119쪽, 범우사, 1972.
2) 박태균,『조봉암 연구』, 331쪽, 창작과 비평사, 1995.
3) 이상두, 앞의 책, 123~124쪽.
4) 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상)』, 206쪽, 역사비평사, 1999.
5) 임홍빈,「조봉암은 왜 죽어야 했나」,『신동아』,1983년 3월호.
6) 임홍빈, 앞의 글, 368쪽.
7) 이상두, 앞의 책, 134~ 136쪽, 재인용.
8) 임홍빈,「죽산 조봉암의 죽음」,『신동아』1965년 8월호, 377쪽.
9) 『한국일보』, 1959년 7월 17일자.
10) 오연호,「조봉암 처형 전야의 미국 공작원들」,『월간 말』,1993년 8월호, 145~146쪽.
11) 박태균, 앞의 책, 395~396쪽.
12) 임홍빈, 앞의 글, 381쪽
13) 박태균, 앞의 책, 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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