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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재야(在野), 그 끈질긴 50년의 인연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

입력 2009-08-20 11:16:56 l 수정 2009-08-21 12:08:35

1960년대 이후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5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야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선생’으로 불렸다. 1997년 국민의 정부 탄생과 함께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던 김 전 대통령과 재야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로 변모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사독재가 민중들을 집어삼켰던 1960년부터 이명박 정부가 ‘독재의 망령’을 쓰고 맹위를 떨치고 있는 2009년 오늘날 까지 DJ와 재야의 관계는 50여년 간 공조와 대립을 거듭하며 뗄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김대중과 재야, 그들은 지난 50여 년 간 ‘독재타도’를 한 목소리로 부르짖다가도 경제노선을 놓고 극심한 대립각을 세웠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연합했다. 그 끈질긴 50년의 인연을 되짚어 보자.

재야운동의 '상징'이었던 DJ

1958년 당시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당하면서 3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진보당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진보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이를 동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고자 했던 재야세력들도 혹한기를 맞게 된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 법. 이승만 독재정권하에서 억눌려 있던 학생들은 4.19 혁명을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를 계기로 그 동안 쌓였던 민중의 분노가 분출되면서 재야세력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김대중은 61년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 출마해 낙선과 당선을 거듭하며 재야 세력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 급기야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김대중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주의와 토건주의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하며 재야 민주화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대선 당시 미분화 단계에 있던 재야 민주세력들은 김대중을 통해 ‘독재타도’,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박정희가 죽고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1980년 정치적 과도기를 기점으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른바 3김이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 초기 보복성 사형선고를 받은 뒤,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라는 운동이 국내외로 광범위하게 일면서 DJ와 재야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말그대로 김대중은 80년대 이후 재야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민주노동당 이의엽 정책부의장은 “당시 김대중은 재야운동의 상징이었다. 운동진영의 정신적 지주, 리더, 진짜 선생님이었다. 사형까지 받아가면서 우리와 한 몸으로 싸웠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87년 이후 일대 전환기를 맞은 DJ와 재야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재야세력들과의 관계에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전두환 군사정권 이후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발표했다. 이후 김대중은 김영삼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난항을 겪자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DJ-재야 간 굳건했던 공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의엽 부의장은 “어떻게든 김영삼과 단일화 해서 노태우가 되는 일을 막았어야했는데, 냉정하게 평가해서 DJ가 역사적 과오를 저지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재야에서는 "결국 DJ는 민주화에 대한 여망으로 생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이 앞선 사람이었구나"라는 비판도 있었다.

앞서 재야 운동진영은 84년 사회구성체논쟁을 계기로 의견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재 진보진영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NL(자주파)과 PD(평등파)의 시초였던 것이다. 이후 심화된 갈등은 87년 대선 당시 직선제 개헌 바람을 타고 3개 분파로 분리됐다.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비판적지지파’, 김영삼과 단일화하기를 원하는 ‘후보단일화파’, 재야진영 독자출마를 주장하는 ‘독자후보파’로 나뉘게 된 것이다. 당시 재야 세력 중에는 김영삼을 지지하는 극소수 세력도 있긴 했으나 곧 소멸됐다.

당시 ‘다수파’는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탈피라는 당면 과제를 우선 해결하려면 연대·연합을 해야한다는 성향이 강해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지지했다. 반면 '소수파'는 독자적 계급대표성을 가지는 지도자를 지지해야한다며 백기완 선생을 대선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87년 대선 결과 김대중은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에 그쳐 패배의 쓴 잔을 맛봐야 했다.

김대중은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대선 당시 재야세력 중 ‘비판적지지파’였던 임채정, 이해찬 등을 중심으로 평민련이 결성되고, 김대중은 이들을 평민당으로 입당시켜 제1야당으로 도약한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1992년 대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당시 재야 세력의 ‘다수파’들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견지하며 하며 표를 몰아줬으나, 김영삼이 당선되자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97년 DJP 연합..멀어지기 시작한 DJ와 재야

영국으로 간 지 6개월여 만에 돌아온 김대중은 일부 재야세력 및 종교 인사들과 함께 국민회의를 창설,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이 때 재야 세력 다수는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두고 “권력에 대한 과욕”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1997년 대선을 기점으로 DJ와 재야 다수 세력 간의 간극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김대중은 김종필, 박태준과 함께 DJP연합을 이룬다. 이 모습을 본 재야는 “군사독재정권의 잔당과 연합한다”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마침 재야에선 90년대 초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창설되면서 전국적 현장 대중조직이 확장됐고, 이들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재야 ‘다수파’는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을 창당, 권영길(당시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을 독자 후보로 추대했다. 독자출마가 가능했던 것은 민주노총과 전농이라는 대규모 조직이 생기면서 현장출신, 기층출신 중심으로 재야세력의 틀이 다시 잡혔기 때문이다.

권영길을 필두로 한 국민승리21은 대선에서 1.9%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지만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는 성공했다. 반면 나머지 ‘소수파’로 남아있던 이른바 ‘명망가’라 불리는 재야운동가들은 대부분 국민회의로 흡수됐다.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은 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만들었고, 99년에는 '민주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이때부터 재야는 정치적 안착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DJ 집권..신자유주의 VS 반신자유주의

김대중이 집권하고 나서부터 DJ-재야 간 관계는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구도로 명확히 갈리게 됐다.

1998년 외환위기와 함께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하에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추종자’란 비판까지 받으면서도 김대중은 기업 구조조정, 비정규직 대량 양산,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이어갔고, DJ와 진보진영은 대립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과 진보진영은 경제노선,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문제 등을 놓고 서로 치고 받았으나 항상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은 통일운동세력 가운데 중도적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와 공조를 취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등 급진적인 통일단체들의 활동도 많은 부분 용인됐다. 결국 김대중과 민간 통일운동단체들의 꾸준한 활동의 성과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김대중은 이처럼 집권기간 내내 진보세력과 대립과 공조를 거듭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반독재 투사’의 모습으로 돌아오다

노무현 정권을 거쳐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 초기부터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일어섰다. 이 정권은 촛불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2009년 초 용산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타 죽은 사건을 계기로 87년 이후 22년 만에 야당과 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장외 집회가 열렸다.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22년 전 6월 항쟁의 모습이 재현되는 듯 했다.

이어 택배 노동자 고 박종태 열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례로 정권의 희생양이 됐다. 김대중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의 위기에 저항하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며 담벼락을 쳐다보면서 욕이라도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대중은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위기가 심화됐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친일, 군사독재의 줄기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국민은 이미 독재 정권을 좌절시켰다. 그 누구도 독재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의엽 부의장은 "민생민주와 남북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면서 한국사회가 과거로 회귀하고,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후퇴하는 걸 보면서 이명박 정권을 독재로 규정한 것이다. DJ와 재야가 반독재 투쟁 전선에서 다시 접점이 만들어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독재'에 맞서기 위해 김대중이 제시한 무기는 '연합'이었다.

지난해 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난 DJ는 “앞장서서 외치는 사람, 길을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굳건하게 손을 잡고 시민사회단체 등과 손을 잡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역주행을 저지하는 투쟁을 한다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대중이 서거하자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시민사회단체는 이제 DJ의 '유훈'을 받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군사독재에 맞선 DJ와 재야의 연합이 2009년 MB 정권에서 닮은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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