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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 허준영 청장의 옷을 벗긴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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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영 청장의 옷을 벗긴 사진 한 장

[민소스토리] 전용철농민 사인논란 잠재우고 경찰청장 사퇴 이끌어내

김동현 기자 abc@vop.co.kr 발행시간 2010-02-24 10:04:16 최종수정 2014-12-27 14:06:06

<민중의소리>가 창간 10년을 맞이합니다. 오는 5월 15일이 되면 <민중의소리>는 열 살이 됩니다. 여지껏 저희들은 '자랑'하는 것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를 앞세우기 보다 몸을 낮추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10년이 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저희를 너무 궁금해 하십니다. '도대체 밥은 어떻게 먹느냐'부터 시작해 '진보진영 배후조종하는 세력 아니냐'는 과분한 억측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저희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이야기가 있듯 <민중의소리> 10년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기억할 만한 10가지를 골랐습니다.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대회 현장은 ‘전쟁터’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민중의소리>가 투입한 기자만 총 9명이었다. 쌀개방 저지를 위한 ‘마지막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요구는 절박했고, APEC 정상회담을 앞두고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경찰의 의지는 이날 낮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집회는 일찌감치 끝났다. 농민들은 ‘국회를 부숴버리겠다’고 별렀지만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 앞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농민들의 목을 겨냥해 방패를 들이댔다. 방패에 맞은 농민들이 쓰러져갔다. 농민들은 주변에 있는 나무와 공사장에 있는 각목이라도 들어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농민들은 여의도 공원으로 몰렸다.

이날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는 총 3천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4시 15분경 시작된 경찰의 진압은 밤 10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경찰의 곤봉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노소를 상관하지 않았다. 여의도 공원 집회 무대 밑으로 들어간 여성의 머리를 방패로 내리 찍는 장면까지 김철수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될 정도였다. 김 기자는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몸이 하나인 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사방에서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해가 저물 무렵 김철수 기자는 여의도 공원 농구대 근처에 있었다. 긴 대열을 이루고 진압 준비를 하는 경찰이 보였다. 김 기자는 경찰 대열을 카메라에 담았다. 반대편에 서 있던 농민들도 찍었다. 몇 분 후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은 다시 시작됐고 곳곳에서 쓰러진 농민들이 보였다. 사람들에 사지가 들려가는 농민의 모습이 보였다. 셔터를 눌렀다. 그 사람이 바로 2005년 겨울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전용철 농민이었다.

전용철 농민이 사람들에 의해 사지를 들려 실려가는 이 사진 한 장은 '사인논란'을 종결짓고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사퇴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용철 농민이 사람들에 의해 사지를 들려 실려가는 이 사진 한 장은 '사인논란'을 종결짓고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사퇴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전용철 농민은 이날 집회가 끝난 지 이틀 후 고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8일만에 숨을 거뒀다. <민중의소리>로 연락이 온 것은 24일. 두 명의 기자가 충남 보령으로 내려갔다. 집회에 참가했던 농민의 사망소식은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찰은 “집앞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주장해 나섰지만 농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뿐이었다. 전용철 농민의 시신은 긴장감 속에 서울로 올라왔고 25일 새벽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민중의소리>는 당시의 상황을 총 16신에 걸치는 긴 기사로 보도했다.

충격적 소식에 농민들은 물론 시민사회도 경악했다. 언론들은 ‘사인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분명했다. 전용철 농민은 2005년 11월 15일 집회에 참가했고 이틀 뒤 쓰러진 것이다. 곳곳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주변 농민들은 전용철 농민이 구토 증세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집에 가는 길에 밥도 제대로 못먹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듣지도 않았다. 언론도 신중했다. 농민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답답했다. ‘분명히 경찰이 때려서 죽었는데...’ 전용철 농민의 형 용식씨는 그 어떤 언론과도 접촉하지 않았다.

며칠 간의 설득 끝에 전용식 씨와 <민중의소리>의 인터뷰가 성사됐다. 농민들을 향한 <민중의소리>의 애정을 전국농민회총연맹 간부들이 며칠간 전용식 씨에게 전해줬다. ‘믿을 수 있는 언론이다. 이 친구들이라면 인터뷰해도 된다.’

며칠 간 벌어진 이른바 ‘사인논란’은 김철수 기자의 사진 한 장으로 종결됐다. 논란이 한창 벌어지던 와중에 김철수 기자는 다른 보도를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며칠을 보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3천장이 넘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확인했다.

“고인의 억울함을 풀지 않고서 다시 어떻게 농민들을 취재하겠느냐”라고 생각했다는 김 기자는 마침내 11월 26일 고인의 사진을 찾아냈다. 사지를 들려 후송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민중의소리>는 사진이 찍힌 시간대 전후의 사진들을 확보해 정황을 확인했고 관련자들의 증언까지 확보해 다음 날 이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사인논란’을 끝내는 결정적 증거였을 뿐 아니라 이후 대통령 사과, 경찰청장 사퇴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용철 농민의 시신이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시민사회는 긴급하게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시민사회 대부분의 단체들은 물론 각계 전문가들도 결합했다. 범대위는 대통령 사과, 경찰청장 사퇴를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광화문에서 촛불문화제와 대중집회 등 투쟁을 시작했다. <민중의소리>는 11월 26일 긴급 기고를 통해 “촛불이 아닌 응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강력한 민중연대를 통해 이 투쟁을 확대시켜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인이 밝혀지면서 청와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황인성 대통령시민사회수석이 빈소를 방문해 ‘진상규명’을 약속했다. 범대위는 ‘대통령 사과’ ‘경찰청장 사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투쟁은 본격적인 대결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범대위는 11월 30일 광화문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12월 1일과 4일에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경찰 진압에 억울하게 죽은 농민’이 원인이 된 집회에 경찰은 물대포를 동원한 진압으로 응수했다. 영하 10도의 강추위에 쏟아지는 물대포도 투쟁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4일에는 3백여명의 청년, 학생,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달려가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사퇴를 요구했다.

농민들은 당시 홍콩에서 열리는 WTO각료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천여명의 농민들이 홍콩으로 향했다. 국내에는 문경식 전농 의장이 남아 투쟁을 이어갔다. <민중의소리>는 7명의 기자를 홍콩으로 보냈다. 국내 투쟁에도 연일 기자를 배치해 투쟁상황을 알렸다. 사실상 모든 기자들이 농민 투쟁에 ‘올인’할 정도였다.

12월 17일 3차 범국민대회에는 상당수 농민들이 홍콩으로 간 자리에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용철 농민과 함께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 구타에 다쳐 투병하던 홍덕표 농민이 숨을 거뒀다. <민중의소리>는 다시 홍덕표 농민의 빈소가 있는 김제로 기자를 급파했다. 홍덕표 농민의 사망은 경찰조차도 폭행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했던 사건이었다.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12월 17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경찰 대응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고 홍덕표 농민이 사망한 다음 날인 19일 공식사과를 하고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다.

범대위는 12월 20일 ‘경찰폭력추방의날’을 선포하면서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정권의 뿌리를 흔드는 투쟁으로 번져갈 것임을 경고했다. 444개에 이르는 시민사회단체들이 21일 기자회견을 열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청와대는 27일 대통령 공식사과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경찰청장 경질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기자회견 직전 자신의 거취는 자신이 결정한다면서 사퇴가능성을 일축했다. 범대위는 단식농성으로 맞섰다. 경찰청장은 결국 29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는 오만함을 버리지 않았다.

2005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전용철 농민과 홍덕표 농민 장례식이 열렸다. 이 장례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김철수 기자가 함께 했다. 김 기자의 카메라에 마지막으로 잡힌 사진은 두 농민을 땅에 묻고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문경식 전농 의장의 얼굴이었다.

김철수 기자는 이듬해 사건 해결의 공로를 인정받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과 인터넷기자상을 수상했다. 김 기자는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현장에 강한’ 기자로 통한다. 정지된 ‘예쁜’ 사진보다 노동자, 농민들의 숨소리와 표정이 살아있는 사진이 끌린다는 김 기자. 그는 “민중의 곁에 있는 것, 그것이 <민중의소리>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놓칠 수 없는 가치이자 존재이유”라고 말한다.

전용철 농민을 땅에 묻고 슬퍼하는 문경식 당시 전농 의장
전용철 농민을 땅에 묻고 슬퍼하는 문경식 당시 전농 의장ⓒ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전용철 농민 1주기 추모제에서 오열하는 문경식 당시 전농 의장.
전용철 농민 1주기 추모제에서 오열하는 문경식 당시 전농 의장.ⓒ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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