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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의 유혹

[영화평론] '인디에어'의 스노비즘 풍자에 대하여

박우성 영화평론가(동국대 강사)

입력 2010-03-12 15:17:32 l 수정 2010-03-15 14:10:16

확실히 그의 삶은 범박한 우리의 삶에 비할 때 때깔난다. 특이한 직업상 그는 1년 중 320여일을 타지에서 보낸다. 반대로 그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은 40여일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는 집에서의 그 짧은 생활을 ‘지옥’이라 말한다. 전통적 용어를 빌린다면 역마살에 포박된 것임에 틀림없다. 반대로, 그의 창조적‧개성적‧전문적 능력이 발휘되는 곳은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에 걸맞게, ‘공항’에서이다. 게이트 보안검사를 받을 때, 신혼여행이 아니면 국제공항 출입이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네의 ‘미개한’ 생활양식과는 달리, 깔밋한 양복을 입고 아담한 캐리어 하나 사뿐히 쥔 채 필요한 모든 수순을 능수능란하게 선취하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기세등등하다. 그렇다. 그에게 공항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락거릴 수 있는 우리네의 현관문과 동일하다. 그것은 일상일 뿐이다. 그의 집은 집이 아니라 비행기인 것이다. 고로, 언제나 그는 날아다닌다. 날아다니는 일상, 이 얼마나 때깔나는가?

영화 <인디에어>는,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이 집(=비행기)에 들어오기에 앞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현관문(=공항)을 통과하는 ‘일상’을 포착하며 시작된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족이 없다. 아니, 두 명의 누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물리적 가족일 뿐이다.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얽매일 자식도 없다. 강연회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그가 말한다. 자식을, 부모를, 형제를 내려놓으시라고, 그리하여, 아니 그래야만 자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실 수 있다고….

그 대신, 공항에서, 호텔에서, 사무실에서, 심지어 마음에 드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가 선택하는 접촉의 비밀번호는 ‘신용카드’라는 표상이다. 축복받은 직업 덕에 그는 어디서든 열심히 긁을 수 있다. 긁은 만큼의 성대한 대접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카드적 관계에서 그는 초특급 VIP인 것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심지어 영화의 말미에서 인간적 관계(=사랑)로 뻗어나갈 여주인공 알렉스 고란(베리 파미가)과의 첫 만남 역시 ‘카드’를 둘러싼 무용담으로 추동된다. 예컨대 “저 이런 대단한 카드도 있어요!”라고 자랑하니 “와우, 어떻게 그런 대단한 카드를!”라는 식으로 말이다. 최종 목적이 무엇이냐는 여자의 물음에 빙햄은 수줍게, 정말이지 몇 번이나 망설이며 부끄럽게 고백한다. 세계에서 오직 7명만 성공한 마일리지 천 만점!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를 기각시킨 후 가상의 우월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빙햄의 삶은 확실히 탈근대적이다. 범박하게 말해, 탈근대적 징후란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불가능한 상태, 그리하여 도리어 가상이 현실을 압도해버리는 사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탈근대적 삶의 화려함, 그러니까 카드적 관계의 화려함이 아니다. 한발 더 나아가 영화는 탈근대적 징후에 드리워진 낙조(落照)까지 들춘다. 그러니까 <인디에어>는 단순한 탈근대 예찬이 아니라 그런 예찬을 향한 풍자로 읽혀야 한다. 가족이라는 근대적 장치를 걷어낸 탈근대적 삶이 결국에는 절대자본주의적 소비욕망에 다름 아니라는 역설이 거기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인간과의 절연 끝에 도달한 삶이란 기껏해야 자본욕망의 표상적 확장으로서의 ‘카드적 삶’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풍자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디에어>는 확실히 괜찮은 코미디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빙햄의 모습 속에서 절대자본주의에 포획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것이야 말로 스노비즘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직능적 수월성에 빠져 현실적 비참을 외면하고 가공의 욕망을 욕망하는 속물들. 착한 ‘척’, 똑똑한 ‘척’, 고귀한 ‘척’, 있는 ‘척’, 스스로를 온갖 웰빙 혹은 명품으로 위장하는 이른바 ‘얼짱‧몸짱’ 속물들. ‘자기’를 향한 엄격하고도 진중한 성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구적 성찰(성찰하는 ‘척’)에 빠져 결국에는 절대자본주의의 소비욕망에 포획된, 그리하여 카드를 긁고 마일리지 축적을 자랑스러워하는 ‘고급’ 속물들. 물론 빙햄이 그런 것처럼 스노비즘 자체가 악의 화신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를 잊어버린 채 재벌 상인을 추종하는 편집증 환자에 가깝다. 많이 소비하라, 그럴 때마다 0.5%의 마일리지가 쌓일 것이니! 어쩌면 우리는 바보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밝히지만 화려한 마일리지를 선사했던 빙햄의 특이한 직업은 ‘해고대리인’이다. CEO의 곤란한 입장을 대신해 회사를 위해 평생 몸 바쳐 온 사람들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이른바 해고전문가 말이다. 물론 그는 냉정한 해고자가 아니다. 차라리 해고당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 전문가에 가깝다. 그런데 ‘퇴직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라는 식의 ‘전문가적’ 위로는 결국 속빈강정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위로인 ‘척’하는 해고장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인디에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도가 숨어 있다. 날아다니는 일상을 실컷 즐겼던 빙햄 스스로가 실은 절대자본주의의 폭력적 불확정성을 대리표상하는 ‘카드’에 불과했던 것이다. 화려한 때깔의 이면에, 긁은 존재였지만 실은 실컷 긁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조락하는 비루한 그림자…….

<인디에어>의 정확한 영어 제목은 'Up In The Air'이다. 주지하디시피 이것은 하늘 위에서라는 뜻도 있겠지만 하늘에 있으니 조금 있으면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것은 절대자본주의의 화려한 때깔 이면에 숨은 불확정성의 기표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그러하다면 빙햄을 닮은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떠해야만 하는가? 스노비즘의 화려한 불확정성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보이지 않는가? 마일리지의 유혹에 속지 말 것! 왜? 손해보고 장사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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