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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없는 경계도시

[영화평론] 경계도시 2

강성률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입력 2010-03-19 19:24:50 l 수정 2010-03-19 20:18:51

경계도시2

경계도시2

<경계도시2>는 참으로 난해하고 혼돈스러운 텍스트이다. 이 영화가 난해하고 혼돈스럽다는 것은 영화 자체가 난해하고 혼돈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는 너무도 쉽고 명확한 텍스트이다. 이 영화가 한없이 난해하고 혼돈스럽다는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송두율을 둘러싼 모든 것,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남한 사회가 혼돈스럽고 난해하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혼란은 송두율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경계도시>의 송두율과 <경계도시2>의 송두율은 분명 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반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도 <경계도시2>의 송두율은 귀국 초반과 이후가 판연히 갈라진다.

다시 문제는 송두율이 아니라 송두율이라는 존재를 통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이다.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국가보안법이라는 그물망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송두율이 노동당에 입당했다는 사실과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청받았다는 것을 알고 혼란에 빠진 감독, 송두율을 옹호하다가 레드 콤플렉스의 역공세에 당황하는 진보 세력, 송두율을 측은히 바라보며 웃고 있는 우익 세력, 송두율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총궐기하고 있는 보수 ‘꼴통(!)’ 들까지 남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송두율과 송두율을 다룬 이 영화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경계도시>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처럼 카메라워킹이 화려하고 편집이 극 영화적이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불평을 늘여놓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거의 비슷한 형식의 영화지이만 두 영화는 확연히 다른 영화로 갈라선다. 귀국이 성사되지 못한 이후의 아쉬움을 잔잔하게 보여주던 <경계도시>와 달리 귀국 후의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급작하게 흘러간다. 송두율을 지켜보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는 감독은 전편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영화는 너무도 역동적으로 흘러간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다.

송두율은 2003년 9월 22일 37년만에 귀국해서 10월 21일 구속되었고, 이듬해 7월 21일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8월 5일 독일로 출국했다. 그가 머문 315일은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영화는 정확히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최근에 본 영화 가운데 이처럼 남한 사회의 모습을 골고루, 제대로, 거침없이 보여주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진보의 비겁한 생존 본능과, 어떻게든 송두율을 죽여 자신들이 살아남으려는 골수 우익의 동물적 본능이 이 한 편의 영화에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송두율이 무죄를 판결 받고 독일로 돌아간 이후 아무도 송두율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두율이 구속되어 있을 때 국내에 들어와 사정을 살핀 송두율의 동료 교수는 송두율이 국내의 여러 정치 사회 세력들의 ‘놀이공’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는데, 이것은 너무도 정확한 지적이다. 정말로 송두율은 놀이공이었다. 확장된 세력을 선전하려다 결국 자신이 살고자 송두율을 버린 진보 세력의 놀이공이었고, 송두율 죽이기 총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보수 세력의 놀이공이었다. 아무도 ‘송두율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관심을 가진 것은 송두율이 노동당에 입당했다는 것과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점이다.

정말로 문제는 왜 송두율이 경계인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가와, 송두율을 옭아맨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야만적인 법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송두율 죽이기’에 성공한 보수 언론은 송두율이 독일로 돌아간 순간, 그를 망각해 버린다. 왜냐하면 더 이상 활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송두율에 데였다고 생각한 진보 역시 더 이상 그를 거론하지 않는다. 아픈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남한 사회에서 송두율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송두율은 진정한 경계인이 되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두 장면. 서강대 박홍 총장이 송두율을 초청해 만찬을 베푼다. 거기서 박홍 전 총장은 송두율을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여기에는 가진 자의 우월성이 드러난다. 박홍은 술이 얼큰히 취한 얼굴로 공식 자리에서 “예수를 닮아 좆나게 터지기도 한” 송두율을 위로한다. 단상에서 손을 잡고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정말로 측은한 사람은,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한 사회가 아직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송두율이 아니라 남한 사회가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색깔론을 펼친 박홍 아닌가.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아이러니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송두율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진보 세력은 대책회의를 한다. 여러 의견이 오가지만 결국 남한에서 살았던 이들이 강요하는 것은 송두율이 노동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며,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을 하라는 것 등이다. 이것은 송두율에게 전향을 떠나 항복하라는 것이다. 송두율의 부인 정정희 여사가 그것은 전향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결국 송두율은 이 네 가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어야 했다. 진보 세력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송두율 부부를 죽인 것이다. 여기서 진보 세력들이 얼마나 비겁한 집단인지, 얼마나 개인 위의 집단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지닌 세력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전향을 한 송두율을 남한 사회는 끝내 포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구속되었다. 도대체 그 당시 송두율은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인가?

영화는 송두율이 석방된 후 밟은 제주의 바닷가를 엔딩 부분에 보여준다. 그가 어릴 적 살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곳의 바닷가는 향기가 다르다고 한다.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였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바닷가를 맨발로 거닐고 있는 송두율. 가장 평온한 풍경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왜 하필 나는 그때 제주의 4.3이 떠올랐을까? 그러고보니 송두율이 어릴 적 살았다는 광주가 기억이 난다.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제 그의 삶은 현대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송두율은 정말로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계인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나 진보 모두 그를 버렸다. 결국 우리는 남과 북을 이어줄 하나의 끈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레드 콤플렉스가 살아있는 한, 그런 체제에서 살았던 사람이 있는 한 남과 북을 이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편에 서 있냐고 지금도 묻고 있는 이 사회에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사치이다. 경계인이 없는 경계도시, 성찰이 없는 망각의 도시가 지금의 서울이다.

* 이 글은 계간 <독립영화> 39호에 게재했던 글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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