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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의 수배생활, 국보법 구속자의 아내..."10년을 2030 운동에 던진 똑순이"

[인터뷰] 19대 국회 입성 유력 통합진보당 청년비례 김재연 후보

현석훈 기자

입력 2012-03-25 06:30:50 l 수정 2012-03-25 23:37:41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이변이 없다면 19대 국회의 최연소 의원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3번 김재연(31) 후보가 될 가능성이 많다. 통합진보당의 청년비례대표 선출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김 후보는 한국외국어대 총학생회장, 한대련 집행위원장, 반값등록금운동본부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오며 진보진영에서는 이미 얼굴이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청년비례 대표 선거 과정에서 탤런트 수애를 닮았단 얘기가 많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더라구요 예쁜 여배우잖아요. 보통 그런 예쁜 여배우와 비교하면 '찌그러진 수애' 뭐 이런 식으로 많이 말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수애 닮았다고 해서요. 하지만 막상 이번 선거 나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수애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제가 봐도 사진이 참 많이 닮았던데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배우 수애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랑 주변 사람들이 보는 저는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수애는 단아하고 차분한 이미지잖아요. 그런데 평소의 저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거든요."

-그럼 어떤 이미지에요?

"깐깐하고 무서운 성격?"

깐깐하고 무섭운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니 단아한 성격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할 말 '따박따박' 조리있게 잘하는 '똑순이' 같은 느낌이다.


-TV토론프로그램 나온 것을 보니 경험이 많지 않을텐데 전혀 떠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4년 동안 MBC어린이 합창단을 했어요. 그래서 남들 앞에 서는 훈련을 받은 셈이 됐죠. 공연하는 3시간 동안 게속 웃는다든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그랬으니까요. 어머니는 그때 제가 아나운서가 됐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시곤 하셨어요. 지금 말투도 어렸을 때 그런 훈련을 한 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정환경이 어릴 때부터 진보적인 생각을 하게 될만한 무엇이 있었나요?

"전혀요. 대구에서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왔는데, 정치적 성향도 다소 보수적이고 아주 평범한 집안이에요."

-프로필을 보니 외고를 나왔네요. 대일외고.

"부모님이 원해서 들어가긴 했는데, 외고의 경쟁 시스템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경쟁에 대한 저항감 반항심이 생겨서 공부 안하고 시 쓰고 그랬어요. 운동권을 동경하는 마음도 생겼고요."

- 고등학교 때 운동권을 동경했다고요?

"지금 와서 보면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때 모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저항 이런 마음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사회운동하는 사람이 훌륭해보였던 거죠."

-외국어대 99학번이네요. 그러면 대학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을 것 같습니다.

"대학 들어갈 때 세상에 대한 회의가 많았어요. 세상이 온통 비리로 가득차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뭐가 바뀔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대학에 오니까 기자들은 기자들만의 조직이 있고 교직이라면 교직만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교원들의 조직이 있더라구요. 고등학교 때는 운동권이라는 게 그냥 아주 추상적인 것이었는데, 대학 와서 전교조, 민주노총, 학생회 같은 수많은 조직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사회적 충격이었어요. 아, 사회는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바꿔나가는 거구나 하는. 그렇게 학생회에 들어가서 활동하게 됐어요."

-다닌 과가 운동권 학생이 많은 과였어요?

" 제가 러시아어과 다녔는데, 저희 과는 데모하는 분위기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학과의 공동체는 굉장히 살아있었어요. 학과 행사도 많고 농활도 가고 술도 같이 많이 먹고 그렇게 1학년을 보냈죠."

-1학년 때는 이른바 '활동'을 많이 한 건 아니었네요?

"그런 셈이죠. 그래도 아주 적극적이긴 했어요. 5.18을 앞두고 광주순례 포스터를 보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과 선배들한테 꼭 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 선배들은 운동권은 아니었던 거죠. 그래도 선배들이 후배가 가고싶다니까 서로 눈치보다가 결국 5명이 같이 갔던게 기억나네요."

- 그럼 본격적으로는 언제부터 학생운동을 했습니까?

"2학년 때 단과대 학생회 집행부를 지원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때가 2000년 이었는데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 폐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정의감에 불타서 전경들한테 쫓겨다니면서 열심히 데모를 했죠. 그때가 2000년인데 연일 신문 지상에 사격장 폐쇄 문제가 대서특필되고 주한미군 범죄 같은 것을 비롯해서 미국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졌어요. 결국 미군사격장도 폐쇄됐고 용산 기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도 국민적 이슈로 떠올랐고 그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가는 것이 신기했어요."

-부모님이 데모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길 바라진 않았어요?

"당연히 바라셨죠. 그런데 솔직히 귀에 잘 안들어왔었어요. 대학 들어가고 얼마 있다가 부모님이 다시 대구로 전근을 가시게 됐는데, 부모님이 '이제 우리 평생 같이 살 수는 없겠다'고 아쉬워 하셨어요. 그 때가 봄농활 가야하는 시기였는데 저는 그저 봄농활을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부모님이 그런 말씀 하시는 것도 귀에 안들어오고 그랬어요."

- 단과대 회장과 총학생회장을 했습니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불과 10년 전이지만 여성이 총학생회장을 하는 일이 흔치는 않았습니다. 신문 지상에 00대 첫 여성 총학생회장 등장 이런 기사가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첫'이란 단어를 많이 달고 사는 것 같아요. 첫 여성 단과대 회장, 첫 여자 총학생회장 등등. 당시에 대학에 신자유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다들 자기 살 길 찾기에 바빠졌어요. 그러면서 학생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기 시작했고요. 외대다 보니까 남자들이 카투사로 군대를 많이 갔어요. 남자들은 카투사 가야한다 군대 가야한다 하면서 학생회 일을 잘 안맡으려고 한 것도 제가 학생회장을 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어요."

- 남자들이 한다고 나섰어도 학생회장을 했을까요?

"아마도요. 단과대 학생회장 할 때도 부학생회장은 남자 선배였고 총학생회장 할 때도 남자 선배가 부학생회장이었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마음이 정말 컸었던 것 같아요."

-다른 학생들처럼 학생회 일을 계속 하는 데 대한 갈등은 없었어요? 학생회 일을 맡아서 하면 개인적으로는 손해가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잖아요?

"대부분 학생들이 군대나 취직 같은 문제로 고민했죠. 군대 늦게 가게 되고 취직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고민을 안해본 걸 스스로는 저의 일종의 핸디캡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지금도 그런가요?

"얼마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것을 보고 연락한 지 오래됐던 친구들이 연락을 해왔어요. 친구들이 하는 말이, 어쩜 그렇게 10년전이랑 똑같냐는 거에요. 10년전에 학생회장 할 때 주장하던 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똑같다는 거죠. 선배들이 자기 개인과 공적 이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면서 나는 안그래야겠다 끈질기게 끝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2002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고 나서는 한총련 혁신을 주장하며 한총련 의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습니다.

"96년에 연세대 사태, 97년 한양대 프락치 사망사건 등을 거치면서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불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한총련의 운영과 활동이 갈수록 대중들과 함께 호홉하질 못했어요. 문서나 간부들의 말투를 보면 보통 말하는 '운동권 사투리'가 대부분이라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었어요. 또 한총련 간부를 선임할 권한이 사실상 의장에게 없었어요. 집행부들이 의장을 뽑는 것에 가까웠으니까요. 그래서 조직을 혁신하자 대중들과 함께 호홉하자 이런 구호를 내걸고 경선에 뛰어들었죠. 당선되지는 못했지만요."

-총학생회장 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죠. 많이 울기도 했었구요. 지금은 촛불집회가 일상화되었지만,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당시 학생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밝히던 때는 평생 잊기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를 만들었던 것도 기억에 많이 나요. 당시는 국회의원 한 명 없던 때니까요. 그 때부터 정당운동을 시작했으니까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총학생회장 임기가 끝나고는 뭘 했습니까?

"당시 수배 상태였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넘어가던 시기였는데 그 때까지도 한총련 이적규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여서 단과대 학생회장은 자동적으로 수배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3년을 수배상태로 학교를 다녔어요."

각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이 대의원이었던 한총련은 김영삼 정권 말기인 97년 공안탄압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이적단체로 규정됐다. 이후 매년 600여명에 달하는 전국 각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경찰로부터 탈퇴 강요를 받았고 이에 불응한 대의원들에 대해서는수배와 구속이 진행됐다.

-3년이나 수배였는데 어떻게 안잡혀갔습니까?

"학교에만 있었어요. 학교안으로는 경찰들이 못들어오니까. 저희 학교가 무척 작거든요. 외대는 건국대 호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농담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척 갑갑했죠. 특히 삼시세끼를 학교 안에서 다 해결해야 하는 것과 학교 앞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걸 못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수배는 언제 끝났습니까?

"2004년 겨울에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논의가 한창이었어요. 국회밖에서도 진보진영 단체들이 다 모여서 한겨울에 농성을 계속 했구요. 그해 국회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다 연행돼 기소됐어요."

-그러면 구속이 됐었나요?

"아뇨. 한총련 탈퇴서 쓰면 구속이 안되고 안쓰면 구속되던 시절을 지나 한총련 이적규정이 유명무실해져가던 때였고, 한창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활발하던 때라 구속은 안됐습니다. 사실 단과대 학생회장, 총학생회장 했다고 구속시킨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2006년부터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맡은 역할이 뭐였어요?

"민주노동당 중앙당의 학생위원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학생들을 위한 정책과 정치 활동을 만들고, 한대련과 각 학교 총학생회 등 학생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을 연계하는 일을 했죠. 지금은 진보적인 대중단체들과 통합진보당의 방향이 상당히 유사한데 그때만하더라도 대중단체들이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아요. 그래서 설득하고 같이 연대해서 투쟁하게끔 하는 일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그 때 만든 법안은 어떤 게 있습니까?
"제가 만든 건 아니고 당에서 만드는 데 참여했죠. 등록금 상한제라든가 학자금 대출 이자 관련 법안 등등이 있었어요."

-프로필을 보면 독특한 경력이 눈에 띕니다. 2008년 총선에서 강남에서 출마했다고 나옵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분당사태를 겪고 한창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래서 당에서 최대한 많은 지역구에 후보를 내자고 했었어요. 강남에는 출마할 사람이 없었는데, 후보등록 2주전쯤에 저한테까지 요청이 왔어요. 그래서 출마를 결정했죠.

-몇 %를 얻었습니까?

"4.9%인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도요. 강남에도 5% 정도는 죽어도 민주노동당 찍는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한거죠."

-선거 끝나고 얼마 안돼 지역구를 정리하신 것 같던데.

"강남에 뿌리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출마를 했어요. 정치이벤트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선거 끝나고 발품 팔고 다니면서 사무실도 구했었고요. 그런데 5월에 광우병 촛불사태가 터졌어요. 비상상황이 된 거죠. 학생위원회에서 돌아와줬으면 한다는 요청이 와서 다시 중앙당 학생위원회로 복귀했어요."

-결과적으로 강남 주민들과 약속은 못지킨 셈이 됐는데요.

"그런 면도 있죠. 하지만 저 개인의 약속보다 민주노동당이 강남에서 약속을 한 거고, 당시 저를 후보로 내세워 함께 선거를 치뤘던 당원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통합진보당 강남지역위원회가 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강남 지역구 출마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사회로 나온 셈인데, 다시 학생운동으로 돌아간 것이네요.

"2008년에 광우병 사태가 지나고 나서 어떤 운동을 할까 고민을 했었어요. 결론은 지금과는 다른 청년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광우병 사태를 지나면서 20대들의 에너지가 마구 분출됐었고, 저도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른이라는 나이도 잊어버리고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물꼬를 터주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생각했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었습니까?

"대학생 멤버십 카드를 만드는 일을 했었고, 약학, 공학, 예술 등등 각 계열별 대학생들의 연대조직을 만드는 일도 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는 한대련 집행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박자은 의장과 함께 반값등록금 촛불집회를 기획하고 만들었죠."

-미혼인 걸로 아시는 분도 상당수 있는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에 결혼했어요. 2009년 초부터 연애를 시작했었구요."


김재연 후보의 남편은 지난해 '자본주의연구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최호현(38)씨다.

-남편되시는 분이 지난해 3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이 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창 언론상에서도 시끄러웠는데, 자본주의연구회라는 학술단체를 남편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이적단체라는 거죠. 하지만 검찰은 남편을 연행할 때는 마치 간첩이라도 되는 양 하더니 법원판결은 고사하고 검찰 스스로 기소할 때 이적단체 구성 혐의를 공소사실에서 뺐어요. 80년대부터 흔히 보던 모습이었죠. 당시 공안당국이 대학생들의 순수 학술단체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 활동을 벌였다는 게 밝혀져 문제가 되기도 했었어요."

-신혼에 남편이 구속돼서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기면서 가정의 소중함이나 서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부의 소중함 같은 것을 서로 많이 느꼈어요. 서로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 힘이 되어주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두 사람 중 누구라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함께 비를 맞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어요."

-보수세력의 색깔론 시비가 예상되기도 합니다.

"진보세력에 대한 그런 색깔론 시비가 한두해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특히 민주노동당에 대한 색깔론 공격은 출범때부터 계속돼 왔던건데 이제 국민들이 그런 데 속아넘어갈 수준은 아니라고 봐요. 남편이 관련됐던 자본주의연구회 사건만 해도 광범위한 사찰활동 등 인권침해 요소가 있어서 인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다가 공안당국의 발표와 조사가 너무 터무니없고 엉성해서 그만 두기도 했었어요. 아무런 실체도 없는 사건이었으니까요."

-아직 아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회 입성은 거의 확정적인데, 의원 임기 중에 출산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마한다니까 제 나이 또래 주변 선후배들이 보육문제에 대한 공약을 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30대 초중반 젊은 층과 강한 공감대를 이루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올해는 등록금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에 집중해 반드시 성과를 내고 이후에 보육 문제 등 청년들의 요구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생각이에요."

-국회의원이 출산을 하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출산이 보통사람들에게 경사인것처럼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죠. 더구나 저출산 시대에 국회의원이 아이를 낳는다는 건 본보기도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국민들의 삶과 얼마나 밀접해있고 대변할 수 있느냐가 국회의원의 자격이잖아요.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아이도 기를 수 있고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그런 여건을 만드는 것 자체가 국회의원이 해야할 역할이죠."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국민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는 분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봐요. 제 또래 지지자들이 남성들이 훨씬 많은데 빨리 애 낳아서 우리 부인 생각을 대변해달라는 얘기를 제일 많이 들었어요."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김재연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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