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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5월 혁명
'); }1968년 봄 낭테르 대학에서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알리는 학생들의 집회가 시작됐다. 이들은 당시까지 프랑스에 만연하고 있던 관습과 권위주의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이들의 저항은 전국적인 학생 시위로 확산됐고, 각계각층의 사회적 불만이 표출되는 도화선이 됐다. 곧이어 노동자, 지식인, 시민 등이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마침내 천만 명의 파업이 시작됐다. 도시의 경제는 마비되고, 정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통령 드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국의 역전을 꾀했다. 전대미문의 '대통령 실종사건'이다.
프랑스 68년 혁명의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68년 5월 혁명'이 출간됐다. 이 책은 당시의 복잡하고 다난했던 상황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해낸 다큐멘터리 만화의 역작이다.
이 책은 프로듀서인 사미아, 미술대 교수 프랑수아즈, 은퇴한 교육가 루이, 전직 고위 공무원 샤를, 이 네 명의 기억으로 독자들을 68년 혁명 당시로 이끈다. 사미아와 프랑수아즈는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운동원 내부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으며, 루이는 평범한 대학생의 눈으로 당시의 정황을 들려준다. 샤를은 총리의 비서로서 정치권 내부에서, 보수주의자의 시각으로 그때의 상황을 복기하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은 고증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매 정황마다 다루어진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을 통해 확인된 것들이며, 만화 칸 중간에 등장하는 포스터들과 벽에 쓰인 낙서, 슬로건들은 68년 당시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들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이 책은 또 어떤 정파나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한 작가들의 노력이다. 긴 기간 역사의 공백과 더불어 과거의 이념에서 자유로운 작가들은 어떤 기록보다도 냉철하게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냈다.
아울러 알렉상드로 프랑의 그림은 5월 혁명을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이다. 68년 당시 포스터들은 주로 보자르(미술대학)에서 실크 스크린으로 인쇄됐으며, 1도 인쇄, 또는 2도 인쇄로 제작됐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간명한 이미지로 슬로건을 극대화해냈다. 이 책의 그림 또한 그러한 당시 그래픽 경향을 따르며, 그날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5월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취재원들의 대답으로 책을 시작한다. 어떤 이는 '사랑과 평화', 어떤 이는 '여성의 해방'이라고 답한다. 어떤 이에게 그날은 '아름다운 혼란'으로 '위대한 지성인들의 시대'로 기억된다. 또한 이 책은 희망과 열정이 모여 소란으로 소용돌이쳤던 날을 규정하려는 작가들의 귀중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작가들은 무엇보다 5월 혁명이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불씨였다'는 말로 그날의 기억에 다가가고 있다.
당시 프랑스는 급속하게 근대화를 완수해낸 시기였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 성과에 도취돼 있었다. 공산당, 사회당, 노조들은 체제 안에 안착했으며, 겉으로 보기에 모든 갈등들은 제도 안에서 해소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반항적인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지는 못했다. 1960년 2십5만 명이었던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1968년에 이르면서 오십만 명을 헤아리게 됐는데 이들 베이비부머 세대들 또한 아직까지 40년대 도덕적 코드를 벗어나지 못한 주류 사회의 권위주의와 관습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프랑스 청년체육부 장관이 새롭게 건설 중인 수영장의 진척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낭테르 대학에 방문했을 때 붉은 머리 콩-방디가 담배불을 빌리면서 무례하게 행동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반항이었다. 이에 학교 측은 콩-방디를 제명시키려고 했고, 이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해지자 콩-방디는 유명 인물이 됐다. 그러나 콩-방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피하지 않았으며, 학생운동의 리더로서 발언하고 행동했다. 실제로 콩-방디의 실용주의 노선은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수많은 종파로 분열돼 있던 학생운동가들이 연합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지점의 유리창을 깨뜨린 과격파 학생들이 체포되자, 142명의 낭테르 대학 학생들이 공동 행동에 들어갔다. 총장실을 점거하고, 토론과 파티를 열었으며, 이후 조직적인 행동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외 학생 대중의 참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위가 학생 대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의외의 계기였다. 소르본 대학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교내에 진입한 경찰이 시위대를 닭장차에 태워 이송하려는 순간 수많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경찰에 맞선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학생들은 학교를 박차고 나와 거리로 향했고, 68년 5월혁명은 시작됐다. 파리의 중심가에서는 거대한 행진이 이어졌고,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르 고프 거리에 최초의 바리케이드 진지가 구축됐다.
이어 노동조합, 교원노조, 전국적 노동단체들이 학생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전국 방방골골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고, 공장점거, 관리자 감금, 도청 난입 등의 직접 행동이 일어났다. 경제 성장에 가려졌던 불만들이 마침내 뿜어져 나올 분출구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드골은 전대미문의 '대통령 실종 사건'을 만들며 집권층의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의회의 해산과 국민 투표를 제안한 드골의 대국민 연설을 기점으로 우파, 중산층이 대대적으로 결집했다.
반대로 혁명적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지금까지의 전개 양상이라면 당연히 새로운 권력이 만들어져야 할 시점이었지만, 축제에 지친 국민들은 신속하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운동의 지도부는 투쟁을 속행하자고 외쳤지만, 대중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져갔고, 그럴수록 더 급진적 슬로건을 제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6월 10일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파업이 막을 내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드골의 국무총리였던 퐁피두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프랑스의 정국은 '원래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기존의 정치권력이 건재했다고 해도, 5월 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기존 프랑스와 같을 수 없었다. 5월 혁명은 정부 개혁과 함께 전혀 새로운 과제들을 프랑스 사회의 수면 위에 올려놓았다. 페미니즘과 호모섹슈얼 운동, 지방분권주의, 환경보호주의, 평화주의, 자주관리 운동, 귀농 등이다. 무엇보다 혁명을 꿈꾸었던 그들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교훈을 남겨 두었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로운 공동체의 경험, 이상적인 개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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