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광화문을 평생 못 잊어요" 촛불지기 4인이 말하는 '2002년'

[인터뷰]의정부 농성장 지킴이부터 '인터넷 투사'까지, '촛불'을 만든 사람들

최지현 기자 cjh@vop.co.kr
입력 2012-06-13 10:08:58l수정 2012-06-13 12:28:28
“미선이 효선이 죽음 알리려고 의정부에서 74일간 천막농성 했었어요. 그때 여름이라서 비도 억수로 쏟아지고 태풍도 몰아쳤는데, 천막이 날아가지 않게 밤새도록 비 맞으면서 붙잡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황왕택

황왕택 집행위원장이 지난 2002년 미2사단 캠프케이시 정문 앞에서 '미군야간통행금지'를 요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황왕택(42) 경기북부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10년 전인 2002년 6월 13일 미선·효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뒤 의정부에 차려졌던 천막 농성장에 오고갔던 과거를 회상했다. ‘2002 한·일월드컵’ 열기에 가려졌던 미선·효선양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사고를 낸 당사자가 있던 미2사단이 위치한 의정부에서는 촛불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시 32세였던 황 위원장은 종종 농성장에 들러 활동을 도왔다. 그는 “그 당시 모든 시민들이 불의에 맞서 싸웠다. 특히 故 제종철씨를 비롯한 지역 활동가들은 시민들에게 여중생의 죽음을 알려내기 위해 집에도 안 가고 천막을 지키며 미친 듯이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때 했던 활동은 주로 여중생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불평등한 한·미 SOFA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황 집행위원장은 “시민들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다. 중학생들도 200명씩 서명을 받아오고, 줄서서 서명을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당시 30대였던 이승헌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 보좌관은 의정부 미2사단 앞에서 첫 집회가 열리던 날 의정부 여고생들이 몰려와 함께 울었다고 회상했다. 이 보좌관은 “그때 의정부 여고생들이 200여명 왔는데, ‘우리 동생들 살려내라’면서 많이 울었다. 한국 경찰들이 집회를 진압할 때 여고생들은 ‘내 동생은 죽었는데 왜 밀어내냐’면서 울분을 토해냈다”고 말했다. 미선이, 효순이의 언니들이 똑같이 의정부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여고생들의 슬픔은 더욱 컸다.

'네티즌의 힘!' 사이버 범대위 공식 출범 선언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는 사이버 범대위 채근식 대표 ⓒ민중의소리ⓒ민중의소리



서울에서도 소식을 접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채근식(50)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은 당시 봉천동에서 지역 활동을 하다가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채 국장은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직접 검은 천을 대량 준비해서 직접 가위로 잘라 검은 리본과 띠를 만들었다”며 “광화문에서 월드컵 응원하러 나온 ‘붉은악마’ 시민들에게 여중생들의 죽음 알려내고, 검은 리본 달기, 띠잇기 등의 과정을 통해 사건을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무죄판결에 분노한 국민들, 미 대사관 앞으로 쏟아져”

지난 2002년 '반미동자'로 불렸던 이승헌 보좌관.

지난 2002년 '반미동자'로 불렸던 이승헌 보좌관.ⓒⓒ민중의소리 김철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11월이 돼서야 여중생의 죽음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십만 명의 ‘촛불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진 배경에는 미군 재판에서 운전병 마크워커 등의 무죄 선고가 있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는 판결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당시 촛불집회 사회를 보며 ‘반미동자’라고 불렸던 이 보좌관은 “광화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하나 촛불을 들고 와서 잘못에 대해 항의조차 못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고 자유발언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며 “불평등한 미국과의 협정을 개정하자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목소리를 높여 날마다 감동이었다”고 회상했다.

촛불시위에는 미선·효순양의 또래 청소년들도 대거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청소년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촛불시위에 나섰던 김종민(28) 전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은 “광화문에서 10만명이 모여 미 대사관 앞까지 가서 촛불을 들었던 게 가장 인상에 남는다”며 “당시 분한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죄를 지은 건데 무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울분이 있었다. 다들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고 밝혔다.

김종민

2011년 반값등록금 관련 기자회견에서 김종민 전 총학생회장.ⓒ양지웅 기자

김 전 총학생회장은 수업이 끝나고 교복을 입은 채로 광화문에 가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집회에 나가자고 전단지를 뿌렸는데, 저희 학생주임 선생님이 ‘찌라시’라면서 다 뺏었다”며 “집회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는데, 집회에 가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멋있다고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채 국장은 온라인에서도 터져나오는 여론을 한 데로 모으기 위해 ‘네티즌의 힘’이라는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사이버 범국민 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네티즌의 힘’ 대표이기도 했던 채 국장은 “국내외적으로 20만명 정도가 온라인에서 결합했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은 온라인 서명운동을 비롯해 백악관에 항의메일 보내기, 한나라당에 항의메일 보내기 등 대대적인 사이버 운동을 벌였고, 한꺼번에 많이 몰려 사이트가 마비되는 경우도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네티즌들은 온라인에서 멈추지 않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는데, 채 국장은 “네티즌과 시민들이 최대로 모아진 게 12월 10일경 미 대사관 앞까지 진출했을 때인데, 당시 인간 띠로 미 대사관을 에워쌌다”고 회상했다.

“10년 전, 분노할 줄 아는 국민의 자발성을 믿는다”

2002년 촛불은 당시 치러지던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존재감이 컸다. 여기에는 불의에 참지 못하고 행동전으로 나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더불어 2000년대 들어 시들던 미국에 대한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후 2008년 광우병 촛불까지 역량이 모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 뒤따르고 있다.

채 국장은 “아래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힘은 그 어떤 무력도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회를 일보 전진하게 만드는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시대가 좀 혼란스럽다. 우리가 지향했던 가치관들이 많이 붕괴되고, 법과 제도에도 권력을 앞세워 파쇼화된 것이 안타깝다”면서도 “10년 전 우리가 공유했던 의식의 흐름은 민주·진보통합, 협동조합 형성, 경제민주화, 반값등록금 등 다양해진 갈래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보좌관도 “자발적인 참여의식에 의해 광우병 촛불까지 일어났는데, 이러한 것들을 이명박 정권이 많이 억압했다”며 “하지만 다시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는 저력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지금 굉장히 어려운 정세이지만 다시 한 번 국민들이 나서서 얘기할 수 있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두 여중생 사건 해결을 위해 청소년들이 나서자, 이 모습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광화문, 시청으로 모여 여중생 문제 해결을 위한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두 여중생 사건 해결을 위해 청소년들이 나서자, 이 모습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광화문, 시청으로 모여 여중생 문제 해결을 위한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사진작가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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