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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의 진보당 그리고 2008,2012년 진보정당의 분당

[김갑수의 통합진보당 사태 다시보기②] 희극도 비극도 아닌 광란극

김갑수 정치평론가

입력 2012-09-24 11:09:42 l 수정 2012-09-26 11:11:04

널리 알려져 있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한 헤겔의 말에 덧붙이기를,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맞지만, 처음은 비극 다음은 희극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헤겔은 빠뜨렸다’고 했다. 그런데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말대로 역사는 두 번(만) 반복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단 한 번에 끝나는 것도 있을 테고 세 번 이상 반복되는 것도 있을 터이다. 이 경우 세 번째는 비극이나 희극이 아닌 ‘광란극’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한 어느 한국인 학자의 글을 나는 어디에선가 읽고 동감한 적이 있다.

금단과 배제의 표적, 진보정당

1945년부터 1953년에 이르는 신생국가 형성 시대에 한국 사회는 격렬한 좌우 갈등과 대립, 그 극한적 형태로서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을 거치면서 ‘반공규율사회’와 ‘피난사회’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냉전분단반공체제와 반공규율사회라는 역사적·구조적 조건은 국가폭력과 우익독점정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핵심기제로서, 오랫동안 한국의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전선에 질곡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형성을 억압하여 ‘금단과 배제의 정치’를 주조해 냈으며 정치 발전의 대전제인 사상적 개방성과 이념적 포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채 ‘우익보수독점의 정당체제’를 고착시켜 버렸다.
- 오유석 외 저, 『한국 진보정치운동의 역사와 쟁점』 p.17-18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치가 개화하는 데에는 분단체제와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이 빚어낸 상황적 한계가 너무도 명백하다는 이 논문의 취지는 타당해 보인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볼 때 진보 정당은 언제나 ‘금단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한국의 우익 세력은 진보가 세력 면에서 미미할 때는 그리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문제는 진보 세력이 커질 때 매번 불거진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금단과 배제의 표적이 되어온 진보정당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로 반복된 ‘진보 죽이기’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정당은 조봉암의 진보당이었다. 그런데 진보당에는 조봉암 외에도 서상일 장건상 윤길중 신도성 등 이념과 대북관이 조금씩 다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것은 조봉암이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바람직했는지에 대해서는 논구가 더 필요하다. 조봉암은 ‘평화통일’과 ‘피해대중구제’를 표방한 민족적 사회주의자였다. 여기서 피해대중이라 함은 4·3항쟁와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내전으로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중을 뜻한다.

조봉암은 1956년 5월 15일 제 3대 정·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그는 예상을 깨고 놀라울 정도로 약진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제1야당인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급서하는 변수가 작용한 점이 컸다. 하지만 조봉암이 얻은 216만 표는 이승만과 우익 집단을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는 185만의 무효표로 나타났고 이승만은 504만 표를 얻어 당선했다. 하지만 전면적으로 자행된 부정선거를 감안해 볼 때 조봉암의 성취는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봉암은 진보진영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케 함으로써 민주당 후보 장면이 이승만의 러닝메이트 이기붕을 이기고 부통령에 당선되도록 하는 정치력을 과시하기까지 했다.

없음

누가 보아도 조봉암 세력은 유력 정당으로 자리를 잡아야 마땅했다. 마침 8월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통합진보정당을 결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상일 장건상 등의 동료 진보정치인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민주혁신세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봉암의 이념이 너무 강하다(북과 가깝다)고 비판했다. 그러다 난데없이 조봉암더러 2선으로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정작 서상일 등이 내세운 ‘혁신과 대중화’라는 것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지방선거가 목전에 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겠다.

당시 야당과 언론은 거의 조봉암 편을 들지 않았다. 야당 핵심세력이었던 김준연 조병옥 등은 드러내 놓고 조봉암을 견제했다. 이로부터 조봉암에 관한 악성 루머가 난무했고 언론은 이를 받아쓰는 데에 급급했다. 조봉암 집단에는 여러 차례 무서운 테러가 자행되었다. 이후 조봉암이 간첩죄로 몰려 사형을 당한 비극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첫 번째 진보 죽이기는 이토록 비극적으로 종료된다.

2008년 분당, 비극에서 희극으로

두 번째로 2008년의 민노당 분당 사태를 회고해 보자. 조봉암 사태는 ‘대선 직후, 지방선거 직전’에 발생했고, 2008년 민노당 분당 사태는 ‘대선 직후, 총선 직전’에 빚어진 점은 과연 우연의 소산일는지를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노당은 2004년 총선에서 정당투표 비례제가 채택되어 10개 의석 획득의 개가를 올렸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3년 후 2007년 대선 당내 경선에서 당권파는 권영길을, 비당권파는 심상정을 내세운다. 당시 비당권파가 내건 구호는 ‘혁신과 대중화’였다. 하지만 비당권파의 심상정은 경선에서 당권파의 권영길에게 분루를 삼킨다.

문제는 대선 직후에 불거진다. 권영길이 3.1%밖에 득표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이전 2002년 대선에서 얻은 3.89%보다 적은 수치였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 휘몰아친 보수 열풍과 진보를 표방한 문국현(5.8% 득표)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그것은 그리 심한 패배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혹자는 진보정당이 총선에서 10% 이상의 정당 투표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 진보정당의 지지율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선이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저지하기 위해 전략 투표가 행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실제 2007년 대선에서 민노당 지지자의 64%가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아무튼 대선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권파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여기에 홍세화 진중권 손호철 등의 진보 표방 지식인이 가세했으며, 여론 역시 그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 주었다. 홍세화는 당권파를 ‘광신도 사교집단‘이라고 증오했으며, 진중권은 ’기생충과 숙주‘라는 저주적 표현을 퍼부으며 종북몰이에 앞장섰다.

희극적인 것은 당시 민노당원이었던 홍세화는 이미 대선 한 달 전부터 자기 당 후보가 아닌 문국현 지지발언을 해놓고는 자기 당의 대선 패배를 비판하는 모순을 보였다는 점이다. 또한 진중권은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당권파 김종철을 발이 닳도록 지원하고는 득표율이 3.0%에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했다.

그들의 요구대로 심상정 비대위가 결성되었다. 그들이 당권파에게 요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북핵실험에 반대 표명할 것, 둘째 일심회 관련자를 제명할 것, 셋째 심상정 비대위에 차기 총선 지휘 권한(비례대표 후보 선발 포함)을 줄 것 등이었다. 당연히 앞의 조건 두 가지는 종북몰이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성격의 것이었다.

2008년 분당

2008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에서 비상대책위 혁신안 중 일심회 사건 관련자 제명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 당시 제명안은 대의원 과반수 이상의 반대로 부결됐고 민주노동당 분당의 기폭제가 됐다.

당원투표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이 부결되었다.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것은 민노당의 강령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제명하는 것은 당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일이 된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일심회 제명안 부결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투표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당권파더러 비민주적인 집단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을 떠난다. 만약 이때 심상정 비대위에 차기 총선 지휘 권한, 다시 말해 비례대표후보 선발 권한을 다 주었다면 과연 그들이 당을 떠났겠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터이다.

아무튼 그들은 이렇게 희극적으로 당을 떠났고 그 결과도 여지없이 희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만든 진보신당은 단 한 석의 지역구 당선자도 못 냈을 뿐 아니라 정당 투표에서도 3% 미만을 기록, 개표 날 밤이 새도록 단 한 명의 비례대표 의원도 내지 못했다.

2012년의 분당 사태는 광란극?

2008년 분당이 ‘대선 직후, 총선 직전’에 발생한 반면, 2012년 분당은 ‘총선 직후, 대선 직전’에 발생한다. 하지만 둘 다 선거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2012년 총선이 다가오자 심상정과 노회찬은 그들이 만든 진보신당을 방기하고 통합진보당으로 회군한다. 또한 ‘유빠당’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혈혈단신 국민참여당에서 고투하고 있었던 유시민 역시 부채 8억과 함께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다.

역시 총선 결과가 좋았던 것이 문제였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다시 커진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13석의 의석을 얻어 사상 최다의석을 기록했다. 하지만 유시민과 심상정·노회찬은 당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당권이란 당원 수와 의석수와 당직자 수가 좌우한다. 당원 숫자야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의석수와 당직자 수가 많아진다면 당원수까지 견인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의석수에서 밀려 버렸다. 특히 유시민의 참여계는 지역구 하나만을 건졌을 뿐 비례대표에서 전멸했다. 총선 결과를 부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조준호를 통해 ‘진상보고서’라는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위력에 힘입어 그들은 경쟁부문 비례후보 전원사퇴와 당 대표단 총사퇴를 요구했다. 동시에 한편에서는 그 지긋지긋한 종북몰이가 또다시 전개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은 일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에 고무된 그들은 전국운영위원회를 열어 당원들이 투표로 선출한 당선자들을 사퇴시키려는 성급함을 보였다. 그들이 선배들처럼 당의 ‘혁신과 대중화’를 내세운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목전에 닥친 대통령 선거가 문제 아니었을까? 만약 자기편에서 대선후보를 거머쥔다면 가장 간단히 당권과 자금을 장악하게 된다. 안고 들어온 부채 8억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권파에는 이정희라는 유력자가 있었다. 그들이 당권파에게 백의종군을 추가로 요구한 것은 이정희의 대선 출마를 사전 봉쇄하려는 포석처럼 보인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아니라고 펄쩍 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잘 쓰는 논리대로 ‘아니라는 점을 한 번 증명해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에는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었다. 하루아침에 부정·종북 집단으로 내몰린 민노당파에게 그것은 필시 비극이었을 것이다. 회의장에서 내지른 그들의 고함, 완력과 밀어붙이기, 그들 중 하나가 저지른 ‘머리끄덩이’ 등은 모두 비극적 감정의 발로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하여 당 대표는 진한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 ‘침묵의 형벌’이라는 비극적 레토릭에 은신해야 했다. 그리고는 급기야 어느 한 분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댕기는 처절한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반면 탈당파들의 행태는 희극으로 초지일관했다. 이석기·김재연 제명을 위한 의원총회, 그들은 민주적 절차를 따른 의원총회 투표 결과까지 무시하면서 민노당파를 비민주적이라고 공격하는 모순을 보인다. 더욱이 유시민의 7번째 당적 이적, 심상정·노회찬의 시계추 왕복 탈당, 김제남·박원석·정진후·서기호의 셀프제명 등은 세계 어느 정당사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특히 셀프 멤버 중 하나인 김제남의 제명 사유가 의원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제명에 찬성하지 않은 점이라는 것은 희극의 정점을 이루었다.

없음

하지만 어디 이뿐이랴. 유시민·심상정의 ‘오빠가 지켜줄게’ 버전, 8억 부채를 질러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참여계의 ‘돈떼보이’ 행적, ‘한 번 사는 인생’ 으로 논점을 희석한 아메리카노 논쟁, 익일 아침 심상정에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덜어주던 장면, 그러면서 커피 CF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유머의 썰렁함, 이석기에게 함께 죽자고 절규한 노회찬의 물귀신 아이디어 등은 어느 것 하나 희극의 소재가 되기에 일말의 나무람도 없어 보였다.

역사는 무수히 반복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제3자, 즉 다수의 국민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것은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광란극’으로 비치지는 않았을는지. 아니 실제로 그럴 것이며, 바로 이 점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폭폭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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