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칼럼]‘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김복동 할머니의 20년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봐야지”.. 아흔을 앞둔 할머니의 청춘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입력 2012-11-07 11:29:39l수정 2013-06-26 15:01:52
지난 7월 말, 김복동 할머니와 미국동행 캠페인을 앞두고 할머니도 명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명함에 소개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할머니를 상징할 수 있는 단어들을 써보았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여성인권운동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주춧돌위원, 나비기금 창시자…. 할머니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이 많으니 참 감사하다. 그만큼 우리도 변했고, 할머니도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대협이 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지난 22년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변화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운동은 언제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1992년, 정대협이 김복동 할머니를 만나면서 할머니의 침묵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새로운 시작이었고, 정대협이 피해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복동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이승빈 기자



1992년 1월의 첫 만남, 단숨에 ‘정대협’으로 뛰어든 할머니

그 때는 내가 정대협 간사로 일을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1992년 1월 중순 경이었다. 부산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는 뉴스를 듣고, 수소문 끝에 할머니 연락처를 확보하여 전화를 하였다.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부산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깐깐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할머니는 어린 ‘아가씨’인 나를 편하게 대해 주셨고,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신고하라는 뉴스가 나와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일로 인해 신고를 반대했던 언니와 남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등. ‘아가씨’인 나에게 하기 힘들었을 이야기들도 할머니는 담배를 피워가며, 소주를 마셔가며 뿜어내셨다. 그 날 밤, 할머니 아파트에서 둘이 누워 첫날밤을 보냈다. 처음 만났음에도 전혀 첫 만남 같지 않게 여겨지던 그 날 밤, 그 때 일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무실 소식도 전해드리고,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소식도 알려드리고, 수요시위 소식도 전해드렸다.

그 후 할머니는 정대협 운동의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셨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게 싸우던 때였다. 한국정부도, 한국사회도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5시간 이상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서울까지 오셔야 했지만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에게 항의집회를 한다고 연락을 드리면 고무신에 ‘몸빼’ 바지 차림으로 올라오시곤 했고, 그 때는 영락없이 전경들 차에 실려 서울 시내 엉뚱한 곳에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면 다시 한 곳에 모여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90년대 초 우리의 활동은 공권력과 대치, 대중으로부터 봉쇄, 연행을 반복했지만 할머니들과 우리는 한국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행동으로 뿜어냈다. 일본 시민집회에도 참석하여 할머니가 겪은 경험을 들려주며 ‘진실’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도 참석하여 할머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성들에게 명확하고도 절절하게 전쟁에서 자행되었던 여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던 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남달리 구체적이었던 할머니의 기억력과 사리판단력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읽어내시는 것 같았다. 기자들과 만났을 때, 작은 포럼을 할 때, 대중집회를 할 때, 그 때마다 할머니의 파워는 다르게 드러났다.

세계인권대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장수월 할머니가 참석하셨다. 두 분이 콘크리트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아서 담배를 피며 나누던 그 정겹던 모습, “나이가 몇 살이오?”, “나보다 동생이네.” “전쟁 때 어디에 있었느냐”, “아픈 데는 없느냐” 등... 식민지를 같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분단으로 인해 50년 이상을 만날 수 없었던 애잔함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분단되어 있지만 저 두 분 사이에는 분단이 사라졌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두 분 옆에 서있던 내 모습도 내 뇌리 속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대로 기억되어 있다.

그러나 그 때 너무 힘드셨을까? 1998년 게이 멕두걸을 만나기 위해 미국 워싱턴행 비행기를 다시 타기까지 몇 년 동안은 국내에서 진행되는 활동들에는 여전히 열심히 참석하셨지만 비행기를 전혀 타지 않으셨다.

다른 피해자를 돕는 인권운동가로, ‘나비기금’ 창시자로

필자가 다시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찾아뵙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였다. 4년 동안 정대협을 떠난 공백이 있었음에도 할머니와의 만남은 여전히 따뜻했고, 반가웠고, 좋았다. 그러나 많이 늙어 있었다. 대부분을 아파트 안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고, 소주병이 싱크대 위에 얹혀있었다. 예전에 그렇게 적극적이던 활동가 김복동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기쁜 것이 하나도 없다, 술하고 담배 말고는…” 안방에는 담배냄새가 늘 배여있었고, 도배지는 담배연기로 인해 누렇게 변해있었다. 할머니는 늘 내복차림이었다. 마르기는 왜 또 그렇게 말랐을까? 눈은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그나마 나머지 한쪽 눈도 문제가 생겨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찾아 뵐 때마다 부엌에는 식사한 흔적은 없었고, 보리차 한 사발에 소주잔이 상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가 많았다.

오랜 설득과 권유 끝에 할머니는 4년 전, 부산에서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쉼터로 오셨다. 정말 신기한 기적이 일어났다. 할머니의 에너지, 아파트에서는 할머니의 생이 ‘꺼져 가고 있구나’ 하고 느꼈었는데, 다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매주 수요시위에 참석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술도 끊으셨다. 정기적으로 눈 치료를 받으며 하루 3끼 영양가 있는 식사도 드시고 원기를 회복하셔서 그렇게 할머니의 운동가다운 면모도 다시 회복되 있었다.

87세. 아흔을 앞둔 나이에 할머니의 활동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 살아있을 때에 일본정부가 해결 안한다. 저거들 하는 걸 봐라. 그래도 우짜겠노.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봐야지.” “쥐구멍에도 해 뜰 날 있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긍정적 힘과 희망적 운동관은 할머니를 더욱 더 적극적인 인권운동가로 변모시켜 주었다.

정대협, 일본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4개국 연대 집회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日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는 집회를 해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위회(이하 정대협)이 광복절을 앞두고 10일 4개국과 연대한 특별 집회를 열었다.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님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수습기자 이승빈



정대협과 함께 활동에 참여하시면서 미군기지촌여성들과 연대도 하게 되고,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통일운동하시다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던 선생님들과도 연대하게 되고, 드디어는 아프리카에, 아시아에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강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그리고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올해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위대한 선언을 하셨다. “일본정부에게 배상을 받으면 그 돈 전액을 우리와 똑같이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후원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정대협은 할머니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비기금’을 만들어 7월부터 매월 500불씩, 콩고의 한 피해자단체에 지원을 시작하였다. 이 지원은 앞으로 계속 확대될 것이다. 일본정부가 배상하는 날, 이 기금은 할머니들의 이름으로 많은 전쟁피해여성들에게 해방의 나비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지난 7월 말에는 두 주 동안 미국 워싱턴과 LA를 순회 방문하며, 미국 정부 대표들과의 면담, 하원의원들과의 만남, 기자회견, 대학강의, 시의회방문, 미국 평화운동단체 및 연구단체들과의 면담, 한국 동포들과의 모임 등등 할머니는 엄청난 일정을 감당하시며 생존자의 목소리로 현지 시민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셨다. 슬픔과 분노가 절제된 목소리가 이렇게 힘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림비를 세우기 위해 동포들이 힘겹게 모금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1000불’을 기부하셨고, “이 돈을 밑천삼아 꼭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하니 누가 힘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뚝테러‘에 여유만만한 웃음으로 응수한 이유

일본의 한 우익단체의 회원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비에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는 말뚝을 박았을 때도 언론과 한국여론은 ‘말뚝테러’ 운운하며 감정적 대응으로 치달았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수요시위에서 “작대기”를 비웃으며, “그 사람한테 대응하지 마라. 그런 놈 대응해봤자 오히려 더 좋아한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놈 때문에 평화비와 박물관을 모르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 하며 여유있는 웃음으로 응수하셨다. 역시 할머니는 멋진 인권운동가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할머니의 활동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 얻은 힘은 10월,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방문은 당신이 자청해서 만들어졌다. “일본을 가야겠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우리를 놀라게 했고, 당장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쿄로, 오사카로, ‘강제연행을 입증하라, 증거를 대라’며 폭언을 해대는 일본 노다 총리와 하시모토 오사카시장에게 “직접 겪은 당사자가 증거다. 증거가 왔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라” 하셨고, 재일동포들의 차별받는 현장의 가장 핵심인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접하시고는 기자회견을 하거나 발언을 할 때 늘 일본군‘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중지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일본사회에 던지셨다. 할머니의 메시지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재인조선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100만원을 후원하셨으며, 이꾸노쿠 조선초급학교를 방문하셨을 때 만난 어린 손주들을 보시고는 “차별한다고 기죽지 마라. 당당하라!”고 힘주시고, 전교생 아이들에게 지갑을 열어 공책과 연필 하나씩 선물하며 할머니한테 편지도 하고 소식도 전하자며 사랑을 주셨다.

할머니의 활동은 지금 여전히 청춘기를 지나고 계신 듯하다. 그리고 할머니와 그렇게 그 과정들을 함께 걸어온 정대협도 청춘기를 지나고 있다. 할머니의 활동이 우리들에게, 미래세대들에게 역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희망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가, 할머니가 저렇게 큰 에너지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현실의 벽앞에서 주저해서 되겠는가. 할머니의 활동에 부끄럽지 않은 인권활동가들이 할머니 뒤에, 옆에, 앞에 많이 함께 서서 걸어간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그 대지들에 분명히 평화의 싹이 자랄 것이다. 희망! 그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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