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누르고 민중의소리를 페이스북으로 구독하세요

부용화, 기적은 기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행동으로 이뤄졌다

[서평] 초조대장경을 운반하려는 사람들의 역경과 사랑

이동권 기자 su@vop.co.kr

입력 2013-01-04 17:07:29 l 수정 2013-01-04 17:28:07

부용화

부용화



오랜만에 훈훈한 소설 한 편이 출간됐다. 상상력으로 복원되는 미시 역사의 짜릿한 묘미, '부용화'다. 이 소설은 고려시대 몽골군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 고구려 왕권회복을 위해 초조대장경을 육로로 운반하려는 사람들의 역경과 사랑, 음모와 모험을 그린 팩션이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장르를 뜻하는 말로,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다.

이 소설은 대장경을 소재로 로맨스와 미스터리, 긴박감 넘치는 반전을 거듭하면서 천 년 전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낸 기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대장경판 모서리에 새겨진 정체 모를 이름들의 기원을 상상력으로 찾아다니며 절망으로 가득 찼던 고려 사람들의 절박한 삶을 훌륭하게 재현해냈다.

'아제아제바라아제'나 '우담바라' 같은 불교 색채의 소설들이 큰 화제를 모았던 이래 그동안 주목받는 작품이 나오지 못했다. 완성도 높은 소설들로 금세 틀 지워진 종교적 소설의 선입견 때문일지 모른다. 이 소설은 글 곳곳에 불교적인 소재가 풍부하지만 불교 소설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지 않다. 권력의 암투라는 미스터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전개가 역동적인 스릴러를 방불케 한다.

소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기적은 언제나 기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행동으로 이루어졌다고.

이 책은 팔만대장경을 소재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장경판의 마구리 글자가 소재다. 이 글자들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이 작업에 허수정 작가가 역사학자들보다 먼저 손을 댔다. 허 작가는 누가 왜 이름들을 신성한 경판의 모서리에 남겨놓았는지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상상력이 복원한 글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사랑'이었다.

몽골의 침략과 실권을 쥔 최우에 눌려 무력하기만 한 허수아비 왕은 비밀 계획을 세운다. 전소된 줄 알았던 초조대장경을 세상에 밝혀 민심을 얻으면 왕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예전에 거란의 군사도 단숨에 몰아냈던 대장경이었다. 왕의 법사인 우송이 대장경 운반의 총 책임을 맡고, 대장경이 불탈 때 목숨을 걸고 일부나마 빼낸 감무의 여식 부용과 학승 진오가 동참한다. 그리고 뒤늦게 출현한 왕의 그림자무사 양무가 호위를 맡는다.

경주 황룡사에서 출발한 이십여 명의 운반대는 금산에 이르러 몽골군의 침략이 다시 시작됐다는 첩보에 따라 가까운 성으로 피신한다. 다음날, 수만 명의 몽골군이 성을 에워싸고 대장경 반환을 종용한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네 사람의 정체는 일련의 상황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음모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성을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주인공들은 제각각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며 충돌한다.

몽골군의 대공세가 임박하자 중과부적인 성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오직 사랑만이 기적을 이루어내겠지만 그런 기적을 믿는 사람은 아직 성 안에 아무도 없다.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