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방의 선물’이 현실로?...10년 옥살이 청년 “살인하지 않았다”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증인에서 용의자로, 범인으로...뒤바뀐 운명

김백겸 수습기자
입력 2013-04-24 22:48:43l수정 2013-04-25 07:02:34
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용구(류승룡 분)가 억울한 살인누명을 쓰고 결국 사형당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7번방의 선물’처럼, 살인 혐의로 10년간 옥살이한 20대 청년이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사건의 시작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10일 전북 익산시 영등동 내 버스정류장 근처에선 택시운전기사 유모(당시42세)씨가 10여차례 칼에 찔려 숨지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씨가 무전기에 남긴 말은 “약촌사거리, 강도야”가 전부였다.

당시 인근 다방에서 배달일을 하던 최모(15)군은 애초 목격자로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최씨의 증언으로 몽타주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이틀 만에 경찰은 최군을 참고인이 아닌 용의자로 지목했고, 선배들과 천안에 있다 익산으로 돌아온 최군은 긴급체포됐다.

“경찰서 아닌 여관에서 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어느덧 28세 청년이 된 최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익산역에서 체포한 최군을 경찰서가 아닌 한 여관으로 끌고갔다. 형사들은 최씨의 뺨과 머리를 때리며 자백을 요구했고, 겁에 질린 최씨는 구타에 못이겨 자기가 살인을 했다는 자백을 했다.

최군에 대한 폭행은 경찰서에서도 계속됐다. 대걸레와 경찰봉으로 발바닥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위를 골라 때렸다. 최씨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 마다 “왜 번복하느냐”며 폭행은 이어졌다.

최군은 검찰에게도 폭행을 당한 사실을 밝히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2001년 2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1년 5월 2심에서는 최군은 갑자기 혐의에 대해 순순히 자백을 했다. 당시 최군의 변호를 맡았던 국선변호사가 ‘혐의를 인정해야 형량을 줄일 수 있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 결국 2심에서 최씨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상고를 포기했다. 불과 16살이었던 소년은 살인범이 돼 그대로 교도소로 가야했다.

2003년 최군은 자신의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자신이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김모(당시 22세)씨가 긴급체포 된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진술을 번복했고, 당시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은 김씨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최군은 한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국가인권위에 긴급구제조치 신청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인권위는 이례적으로 ‘1년 이상 경과해 위원회가 조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국가인권위가 나서 누명을 풀어달라”

결국 10년의 복역기간을 마치고 20대 후반 청년이 된 최씨는 최근 자신의 누명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최씨와 가족들은 22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씨의 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길 촉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인권위가 재심 청구에 입장을 내지 않는다면 국가기구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며 “이제라도 책임지고 반성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기관이 되려면 이번 재심 구제를 처리해야한다”고 요구했다.

재심 청구를 담당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징역 10년을 받게 된 억울한 상황을 바로 잡자는 것”이라며 “가혹행위를 한 경찰들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조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재심 진정 촉구 기자회견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재심 진정 촉구 기자회견ⓒ다산인권센터



“누명 벗고 남들처럼 살고 싶다” 최모씨 인터뷰



처음에 목격자로 경찰서에 갔던 것인가?


처음에 목격자로 진술하고 그 다음날도 목격자로 진술을 하러 경찰서에 갔다. 몽타주를 만들러 갔다 온 다음 나를 잡아갔다.



천안에서 어떻게 다시 익산으로 오게 됐나?


나와 지인이 천안에 갔었는데 같이 온 사람들이 용의자로 잡혀갔다는 걸 듣고 서둘러 익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내 증언으로 만든 몽타주와 지인들이 닮아서 잡아갔다고 했다.



익산역에 도착해서 어떻게 여관까지 갔나?


역에서 경찰이 3명 있었다. 경찰이 어디 조용한데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며 여관으로 데려갔다. 이동과정에서는 폭행이 없었는데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돌변했다. 여관 안에는 경찰이 6명 더 있었다.



폭행은 어떻게 당했나?


여관에서는 뺨이나 머리를 때렸다. 경찰서에 가서는 대걸레나 경찰봉으로 발바닥처럼 외관상 보이지 않는 곳을 때렸다. 경찰은 내가 안 했다고 할 때마다 왜 번복하느냐고 때렸다.



교도소에서는 뭐가 힘들었나?


안에 있는 자체가 힘들다. 특별히 힘들었던 건 명절 때 부모님이랑 가족들이랑 같이 있지 못하는 게 힘들었다.



다른 수감자들에게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 해봤나?


재판 전에는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형이 확정된 다음엔 안했다.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도소 안에서 어떤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나?


그 당시에는 다른 생각보다 우선은 빨리 나가고 싶었다.



출소 후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다하고 싶었다. 돈 많이 벌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나오면 다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출소 후 어떤 게 힘들었나?


출소 후 1년 정도는 힘들어서 그냥 집에만 있었다. 사회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대인기피증 같은 게 생겨서 사람들 많은 곳에 가지도 못했다. 집에만 있었고, 외출할 때는 부모님과 같이 나가던지 했다.



취업하는데 어려움은 있었나?


지금은 건설회사를 다니고 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통해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 바람은?


재심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에 재심이 잘 안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께 효도도 하고 남들 사는 만큼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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