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내란모의’사건과 ‘공산당 해산’은 나치 부역자들의 반대세력 제거작전”

[인터뷰] 로버트 슈타이거발트 맑스엥겔스 재단 명예의장

최호현 독일통신원
입력 2014-01-19 19:59:36l수정 2014-01-20 10:43:30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 재판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청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내란음모’ 재판 구형이 27일, ‘정당해산’ 재판 첫 변론기일은 28일로 예정돼 있다. 설 명절 가족들이 둘러앉은 자리에 올라온 정국 현안이 될 전망이다.

두 사건은 59년 전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 사건과 비교된다. 한국 정부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을 청구하면서 독일 사례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독일공산당은 1968년 재건됐고 당시 판결은 사문화됐다. 최근 독일에서는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을 폐기하는 운동이 일기도 했다. 독일의 부끄러운 역사 중 하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로버트 슈타이거발트

로버트 슈타이거발트ⓒ로버트 슈타이거발트 제공


독일의 좌파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1925년 태어나 1948년 독일공산당에 가입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슈타이거발트는 당시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이 독일의 재무장화 반대,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슈타이거발트는 “미국과 독일의 제국주의 세력과 재무장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공존할 수 없었다”고 당시 정치 지형을 설명했다. 당시 독일공산당은 독일의 재무장을 반대하는 국민투표 운동을 벌였는데, 탄압 속에서도 대중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투표에 1100만명이 참여했고 900만명이 재무장화를 반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교롭게도 독일공산당 해산 청구 직전 일군의 활동가들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로버트 슈타이거발트 역시 독일공산당 해산 청구 전 투옥돼 당이 해산되는 모습을 감옥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의 절친한 동료 중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는 의원마저 내란모의 사건으로 투옥됐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현재 맑스엥겔스 재단의 명예의장으로 재임 중이며, 8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연과 저술활동 등을 통해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1951년 아데나워 정부에 의해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이 청구 되었고 1956년에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판결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당시 제국주의 세력에겐 독일 제국주의와 전쟁 기구를 재건하여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전쟁 중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대다수의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1922년 태어난 사람 중 4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당시 국민 여론이 어떠했을 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군대를 재건하겠다는 제국주의 세력의 구상은 민중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데나워 정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호전적인 정책들을 추진했습니다. 과거 나찌 치하의 장성들을 다시 군 요직에 앉혔고, 동독지역은 미 수복 지역이므로 통일이 아닌 해방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공산당은 미국과 아데나워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재무장기도를 폭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했습니다. 그 중 재무장을 반대하는 국민투표 운동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정부의 금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100만 명이 참여했고, 그 중 900만 명이 재무장화 반대에 투표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과 아데나워 정부에게 독일공산당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쟁 준비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군수자본의 토대를 복구해야 하고 정치적으로는 잠재적 반대세력을 제거해야 합니다. 독일 공산당 해산은 후자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요구에 따라 잠재적 저항세력이 될 수 있는 모든 조직과, 단체들이 해산 되었고, 이 조직의 지도부들은 감옥에 갔습니다. 미, 독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던 재무장화와 이에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데나워의 주장은 과거 한국의 이승만이 주장했던 ‘북진통일론’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최근 한반도 주변의 정세도 크게 긴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독일공산당 해산 심판은 제국주의 세력의 지정학적 요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정세로 보자면 많은 나라들이 소위 제국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도 그 힘을 확장시켜가고 있었습니다. 발칸반도마저 사회주의의 영향권 아래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 미국으로 하여금 독일 제국주의가 가진 잠재력을 활용할 생각을 하게 만든 겁니다. 나치체제가 가지고 있던 숙련된 전쟁 인력, 군수자본, 풍부한 자원, 유럽의 중심지로서의 지정학적 가치 등, 독일 제국주의가 가진 잠재력을 활용해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확실한 거점을 만들려고 했던 거죠.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기도를 폭로하고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은 반드시 제거 되었어야 했던 대상이었던 것이고요.

현재 한국의 상황도 당시 독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미국과 아데나워 정부를 자극했던 것이 소련의 존재였다면 지금 미국과 한국 정부를 자극하는 존재는 중국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겠지요.



다음으로 독일 공산당 해산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이 판결의 결과 1968년 까지 총 25만여 명이 경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중 만 오천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수치인데요.



맞습니다. 워낙 오래 전 일인지라 통계마다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탄압을 받았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독일 공산당 해산 판결은 정말 폭 넓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판결이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범위를 대폭 확대시켰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행위 없이도 공산당원이거나 당에 대한 지지의 사를 표명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처벌대상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독일 공산당 해산판결에 대한 백서 격인 알렉산더 폰 브뤼넥의 책을 보면 공산당원 다섯 명 중 세 명꼴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사실 저는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 과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감옥에 있었거든요. 저는 1948년 공산당에 가입 했습니다. 당시 저는 헤센주 라디오방송국 청소년라디오 프로그램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 했다는 이유로 바로 해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53년에 내란 모의 혐의로 구속되어 1960년까지 감옥살이를 했고요.
당시 자유 독일 청년 의장이었던 나의 절친한 동료 아겐포르트는 노르트하인베스트팔렌 주 의회 의원으로서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혐의로 체포되어 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혐의 내용은 정부에 의해 금지된 재무장 반대 국민투표운동을 조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판결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날 민주당 등 한국의 소위 중도 정당들은 통합진보당과 거리를 두려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의 정당들은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독일의 상황도 지금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말로는 공산당 해산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12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 한명의 재판관이 지병으로 인해 재판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는 소수거부권이 있어 네 명의 판사가 해산 판결을 거부하면 위헌판결은 좌초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민당 성향의 네 명의 판사들은 법정에서 모두 위헌판결에 찬성 했습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던 거죠.



다음으로 판결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현재 한국에서도 통합진보당 위헌 심판 청구의 주요 근거가 이 당이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것이고,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 청구의 핵심 근거 역시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독일공산당 해산이 민주주의 질서 확립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널리 통용되고 있는 거짓말입니다.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파괴한 것은 독일 공산당이 아니라 당시 아데나워 정부였습니다. 아데나워 정부의 반민주성과 독일 공산당 해산 판결의 기만성은 1951년에 자행된 소위 특별 형법개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소위 “번개 법 개정” 이라 불리는 이 형법 개정안을 통해 “국가위협 죄목”이 형법 조항에 추가 되었습니다. 이는 소위 예방 규정의 적용 시점을 극도로 앞당긴 것인데, 이로 인해 법 조항이 자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확대 되었습니다. 이 죄의 적용을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위협이 객관적으로, 구체적으로 입증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비폭력적인 정치행위가 금지 되었고, 심지어 파업과 비폭력적인 시위들도 불법화 되었습니다. 이런 정책들의 연장선상에 독일 공산당에 대한 해산 판결이 나왔던 겁니다.

당시 서독 정부의 뿌리를 보아도 당시 서독 정부는 민주주의를 논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당시 서독 정부에는 나치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 명의 독일 연방 대통령은 과거 히틀러를 위해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르 호이스는 과거 나치 정부에 전권을 부여하는 법령에 찬성한 바 있고, 괴벨스가 사설을 쓰던 나찌 신문 “제국”의 주요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2대 대통령 하인리히 뤼브케는 나치수용소의 설계자였고, 5대 대통령 카를 카르스텐스도 나치 준군사조직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서독의 세 번째 총리였던 키싱어는 괴벨스의 선전선동부 출신이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당시 정부 측 법률대리인이었던 리터 폰 렉스는 히틀러 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했고, 나찌 치하에서 9만여 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던 나찌 판사들 중 그 누구도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파시스트 수괴들과 함께하는 법치국가, 민주주의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독일을 나찌 잔재 청산의 모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전후 초기 나찌 부역자들이 처벌 되는 듯 보였으나 미국의 전략이 수정되고 나서 나찌 부역자들이 다시 관직에 등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찌에 맞서 싸웠던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감옥에 가고, 나찌 부역자들은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된거죠.
1950년 당시 1800여명의 나찌 부역자들이 국가 기관 주요 관직에 있었습니다. 그 중 21명이 장, 차관, 102명이 장성급, 245명이 외교라인의 수뇌급 인사였고, 207명이 중간, 고위급 경찰, 정보기관 인사였습니다.
그 중 가장 치욕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프라이슬러 케이스입니다. 그는 나찌 치하 독일 법원의 의장으로 복무하면서 당시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던 영웅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전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미망인은 그의 이름으로 연금을, 그것도 인상된 액수로 받으며 살았습니다. 행정법원에서 그가 전범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도 재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당시 재판에서는 맑스와 레닌의 프롤레타독재, 혁명이론 등이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17번째 공판에서 정부측 대리인이었던 리터 폰 렉스와 뷘터펠트는 맑스레닌주의를 전염병균, 독성물질에 비유한 바 있는데요, 덕분에 이 재판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맑스주의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 이 재판의 주목적 이라는 점 말이죠.
당시 그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맑스와 레닌의 저작이 전 세계적으로 9억3천1백만권이 출간 되었고 심지어 이 출판은 부르조아 헌법체제 아래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이 모두 처벌되어야 하는데, 이런 발상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 당시 판결의 정당성에 대해 더 짚어볼 것이 더 있을까요?



매우 위험한 당시 판결의 특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었던 뷘트리히는 “헌법재판소는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역할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관점입니다. 법학자인 아벤트로트 교수도 이에 대해 권력분립 원칙을 파괴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법원은 기존의 규범을 적용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닌 의회와 같은 입법기관의 몫입니다. 만약 특정 의도를 가진 관점이 헌법재판소를 통해 표현 된다면 헌법은 나찌 시절 바이마르헌법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가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2006년에 이를 폐기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으로 아는데요.



당시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의 폐기를 위한 서명운동 등이 벌어졌지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50년이 넘게 지난 일인지라 젊은 세대들은 당시의 판결에 대해 거의 모르고, 나이 든 세대들의 의식 속에서도 이 판결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재건된 독일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독일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 있기 때문에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이 청구 되었던 당시 독일과 현재 한국의 상황은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 됩니다. 위헌 심판청구의 목적도 그렇고 이 과정이 미국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책의 배후에 궁극적으로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진실과, 현대식 무기로 치러지는 전쟁이 초래하게 될 파멸적 결과에 대해 대중 앞에 명확히 알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곳에는 한국의 상황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쉬운 일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대중들에게 위헌 판결과 한반도 정세의 위험성을 알려내기 위한 많은 노력을 부탁드립니다.

  • 1
  • 2
  • 3
  • 4
  • 5
  • 6
  • 7

  • 1
  • 2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