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진 칼럼]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재작년 한 포럼에서 모대학 로스쿨 교수와 이야기 하던 중 그 교수가 내 초등학교 1년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그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김교수, 정말 B초등학교 나왔어요? 이상하네 B학교 나오면 그럴 수가 없는데...”

그렇다. 나는 전형적인 서울 강남사람의 삶과 닮아 있었다.

나는 당시 부산에서 6개밖에 없는 사립초등학교 중 하나를 다녔다. 남들 운동화도 제대로 못 신던 그 시절 난 예쁜 교복에 맞춤구두를 신고 학교버스를 타고 다녔다. 외할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집에서는 만화가게에서 쪼그려 앉아 만화 보는 거 흉하다고 만화책도 항상 사줬고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수천 권의 책이 집에 쌓였다. 고전부터 여고생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하이틴로맨스소설까지.

다섯 살 때부터 중3 어느 날 내가 하는 건 기술이지 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음대를 포기하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피아노 과외도 받았다. 다만 옷이나 외모 등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부모에게 졸라본 적이 없을 뿐 정말 편하게 살았다. 대학을 입학했을 때는 그 유명했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외갓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입학해서는 당시 법대 학장이던 교수가 학생회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해서 진짜로 학생회관 근처에도 안 갔다. 대신 책 읽는 게 좋아서 법학과 문학회에 가입했다.(요건 학생회관이 아니니까)

그리고 깨달은 사회는 너무 충격이었다. 내가 읽은 ‘올리버트위스트’, ‘죄와벌’ 등등 모든 것이 외국의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1980년대 우리나라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내 생활이 바뀌진 않았다. 난 여전히 친구들이랑 술 마시며 놀았고 돌아다녔고 즐겼다. 내게 학생운동이라는 것은 그저 그런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을 뿐 거기에 인생을 걸 무언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원을 가고 농업 관련법에 필이 꽂혀 농민들과 만나 얘기하고 놀면서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녔다. 대학원 공부는 뒷전이고 농민들 만나 노는 게 일상인 생활을 몇년 보내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첫애가 돌이 지난 어느 날, 친환경농업육성법을 만들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고 박사과정을 들어가고 둘째를 낳고 미국에서 장학금 받아 유학을 가고 귀국해서 시간강사를 하고 그러면서 또 짬짬이 농민들이랑 만나서 놀고 그러는 사이 어느 날 문득 난 사람과 생명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책임져야할 생명 내지는 사람이 둘이나 생겼고 그 아이들이 내가 대학 때 받은 충격을 받지 않고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난 나름 참 열심히 살았다. 농업에 관한 한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농민 편에서 모든 일을 수행했고, 정책을 만들 때나 의견을 낼 때나 난 극소수에 속하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물고 늘어졌다. 초등학교 1년 선배가 보기에 그런 내 삶은 ‘강남스타일’과는 동떨어져 보였나 보다. 적어도 가진 자들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남 위에서 남의 삶을 논평하면서 너는 어떻고 너는 어떻다고 저울질 해가면서 군림하고 살아야 했다. 돈과 권력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렇게 상위 1%의 삶을 꿈꾸며, 각자의 삶은 각자의 팔자라고 여기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한 것으로 여기며, 그 속에서 내가 이룬 것을 맘껏 누리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각자 자기가 속한 계층 속에서 그 계층에 맞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야 했다.

도저히 그렇게는 못 살겠다

그러나 도저히 그렇게는 못살겠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고도 무릎 꿇고 아이들 구해달라고 빌어야 하는 이들, 아침에 침몰한 배에서 경찰이 오고 헬기가 떴으니 배에서 시키는 대로 가만히 기다리면 구조될 줄 믿고 농담하면서 선실을 지켰던 아이들과 저녁이 되자 서로 모여 손잡고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봐야 하는 현실, 구조한답시고 온 해경이 창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만 배에 태우고 돌아가버리는 모습, 그 와중에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이 사회가 정말 정상적인 사회라고 믿고는 못살겠다.

청와대 앞에서 소중한 딸을 가슴에 품고
세월호 참사 24일째인 9일 세월호 유가족 100여명이 KBS 항의 방문을 하고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행진을 하다가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청와대 진입을 저지하는 경찰에 가로막히자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김철수 기자

사고 후속조치를 책임지고 해야 할 그 많은 국가기관들 절차와 책임 소재 따지고 우왕좌왕 하다 결국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고, 해군 특수부대와 경험 많은 민간 잠수사들이 해경과 특정 업체에 밀려 제때 구조작업에 투입되지 못하며, 사고대책본부는 구조작업보다 대통령 의전과 홍보에 더 많은 인력이 배치되고 관심이 쏠려 있었다. 며칠째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아이들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는 부모들 옆에서 유유히 장관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부모들은 체육관 바닥에서 쪽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데 그 옆 호텔급 숙소를 정부 부처와 공영방송 관계자들이 몰래 전용하고, 이런 무능과 무책임과 혼선을 비판하면 사건을 정치와 연결 짓지 말라거나 한 면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라거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는 비겁한 말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말이다. 고2 학창시절 마지막 수학여행 간다고 옷 사고 신발사고 한껏 들떠 있다가 결국 가지도 못한 우리 딸이, 그 수학여행 기간 동안 학교 미술실에서 미술부 친구들이랑 전교생을 위한 노란손수건 900장을 직접 천연염색하느라 주무르고 말리고 매염하고 말리면서 수학여행의 아쉬움을 털어버리는 것을 봤다. 안산에서, 서울에서, 전국에서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젊은 친구들을 봤다. 그래서 아직 이 친구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내 또래는 이제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더 짧은 나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6월 4일에 남은 인생을 한번 걸어본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사람이 소중한 사회가 될 기회다.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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