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의지 있으면 쌀 관세화 유예 가능하다”

한국이 쌀 개방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게 된 건 지난 1993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WTO 회원국들은 쌀 관세화를 기본으로 한 농산물 개방 방침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 특별대우를 인정받아 1995~2004년까지 쌀 관세화를 유예했고, 만기가 되던 해인 2004년 한차례 더 협상을 벌여 2014년까지 추가로 유예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정부는 올해 쌀 관세화를 더이상 유예하는 건 국제법상 불가능하다며 오는 9월까지는 쌀 관세화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WTO에 전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친 바 있다.

쌀 관세화 시행은 곧 쌀을 전면 개방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동시에 매년 일정 물량 이상의 쌀 수입을 금지해온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세계 각국의 수입쌀들은 ‘관세’라는 방어막을 두른 채 무차별적으로 유입될 수 있다.

현재 일각에선 쌀 자급률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 쌀 관세화를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부는 "유예는 더이상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쌀 개방 해법 모색을 위한 국제 토론회에서는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관세화 유예는 가능하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쌀 개방 해법 모색을 위한 국제 토론회
쌀 개방 해법 모색을 위한 국제 토론회.ⓒ민중의소리

쌀 관세화 연장, 반전 이끌어낸 필리핀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WTO 농업협정 부속서5의 제8항과 9항을 근거로 “협상을 통해 우리가 상대방에 ‘추가적이고 수락 가능한 양허’를 제공하고, 여기에 합의가 된다면 특별대우는 계속될 수 있다”며 “관세화 유예 협상은 당연히 가능하고, 또 시급히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속서5의 8항은 유예기간이 종료된 후 특별대우를 지속할 수 있는 협상 가능 기간(이전 유예기간 마지막 해)을 명시하고 있고, 9항은 특별대우에 합의하게 될 경우 해당 국가는 추가적인 양허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정해진 기간 내 추가 협상을 통해 쌀 관세화 유예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도 “WTO 회원국은 자국의 사정을 고려한 협상방안을 WTO에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도 특별대우의 지속 여부에 대해 협상을 제시할 권리가 있다”며 “현상유지를 포함해 특별대우의 지속을 요청하는 협상을 진행하는 건 관세화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장 부소장은 “결국 현상유지를 포함해 쌀 시장개방 문제에 관한 최선의 해법을 찾는 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통상협상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사례는 충분히 협상을 통해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의 추가 연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쌀 관세화 유예 협상 과정에서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라울 몬테마이어(Raul Montemayor) 필리핀 자유농민협동조합연맹 대표는 “WTO 농업협정 부속서5에 의거해 쌀 관세화 연장에 대한 의사를 통보했다. 부속서5는 연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추가로 허용하는 데 대해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규정이 모호했다”고 처음 협상을 시도할 당시 처한 어려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어 “여러 법무법인에 자문을 구한 결과, 웨이버(의무면제)를 허용하고 있는 UR 협정문 3절 9항에 한시적 유예를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WTO는 이를 받아들여 웨이버를 한시적으로 적용해 쌀 관세화를 유예해주겠다고 인정했다”고 말했다. 애초 불리한 상황에서도 다각도로 방안을 모색한 끝에 반전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고율 관세를 매기면 된다?...“FTA 리스크를 과소평가한 것”

토론자들은 쌀 관세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관세를 높이면 된다는 이른바 ‘고율관세론’에 대해서도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해영 교수는 고율관세론의 가장 큰 문제로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두가지 측면에서 고율관세의 안정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두가지 측면은 FTA 리스크에 대한 과소평가와 DDA(도하 개발 어젠다) 협상의 답보상태다.

FTA 리스크는 현재 진행중인 한중FTA를 예를 들어 설명 가능하다. 한중FTA의 경우 양허협상을 통해 품목수의 10%를 개방 예외 품목으로 두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쌀은 초민감품목으로 분류돼 있는데, 문제는 WTO 쌀 관세화 문제와 FTA와의 관련성을 ‘별개 사안’으로 본다는 정부의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설사 우리가 양허안에서 쌀을 제외하더라도 상대방의 요구가 있으면 협상을 해야 한다. 우리가 쌀을 협상 대상에서 빼고자 하면 대신 다른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며 “쌀이 최대 약점인 것을 모를 리 없는 상대방으로서 양허요구안에 쌀을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이에 따라 한중FTA에서도 쌀 관세율이 쟁점화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DDA(도하 개발 어젠다) 협상이 답보상태라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만약 이 협상에서 한국이 선진국 지위를 부여받을 경우 WTO 신고관세를 대폭 내려야 하고, 의무수입 물량도 현재보다 20만톤 가량 더 늘려야 한다. 이 교수는 “물론 가까운 장래에 DDA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높진 않다”면서도 “쌀과 관련한 정부의 DDA 대책은 개도국 지위를 받도록 노력해보겠다는 수준 이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의지만 있다면 관세화 유예는 가능…다양한 방법 모색해야”

쌀 관세화 유예기간 연장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협상에 의지를 갖고 여러가지 대내외적 시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필리핀의 경우 이례적으로 정부가 먼저 농민단체 대표를 협상단에 포함시켰다. 몬테마이어 대표는 “일단 협상을 시도해보자고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었다. 그래서 협상 패널이 만들어졌는데, 초기부터 쌀 생산자 대표(농민단체 대표)도 패널에 포함돼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입제한 조치 연장 여부에 대한 쌀 농가들의 의견수렴이 진행됐고, 이해 당사자와의 정례적인 의견 수렴도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인도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인도의 자프리(Afsar H. Jafri) 식량주권 연구위원은 “인도의 경우 최초로 인도 정부대표단이 농민시위를 지지하면서 우리와 함께 했다. 정부 입장에서도 식량주권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불법적인 WTO에 이의를 제기해야 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자프리 연구위원은 “인도가 가장 잘한 것 중 한가지는 G30 국가들과 공동 대응을 했다는 것”이라며 “이는 일종의 전략인데 한국도 이런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개도국들과 함께 연대해 WTO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정부가 통상관료를 전부 교체하고, 범국민협상단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국회에는 쌀 관세화 통보 이전 비준동의안 수준의 사전 처리, 국회가 중심이 된 WTO 삼자협의체 구성, 야당의 쌀 개방 대책기구 구성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해영 교수는 “쌀 고율관세 유지에 대한 확고한 약속을 담은 법률을 제정하거나, 농업계와 정부가 쌀 관세 뿐 아니라 종합적 쌀 산업 대책을 담은 농.정 협약을 체결하고, 그 이행을 국회가 보증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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