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진 칼럼] ‘농업’에 빠진 25년, 잘못 살아온 것일까

기쁘고 행복했던 일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많았던 2014년이 저물어갑니다. 올해를 돌아보는 민중의소리 필진들의 릴레이 기고를 며칠간 게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2년하고 1개월 전 나는 이 칼럼을 통해 ‘이정희펀드’에 가입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또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사람이고 여전히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전문가’가 됐다

사실 나는 비교적 만학도(?)에 속한다. 석사를 마친 후 박사과정을 들어가기까지 5년이 걸렸으며 박사과정을 들어가서 논문을 내고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대학 입학에서 박사학위까지 23년이 걸린 셈이다. 그 세월 중 농업관련단체에서 보낸 세월이 19년이다. 그러니 대학 4년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농업관련단체와 함께 해왔다. 공식적인 직함이 있었을 때도 있었고 소위 자문위원 내지는 정책위원 등의 이름으로 일한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나라에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게 2007년이다. 그리고 약 50여개의 대학교가 법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하고자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위한 기준에는 법학과에 여자 교수 비율이 최소 10%여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사실 법학과에서 여자교수를 보기가 거의 힘들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여대에 조차 법학과 교수는 대부분 남자들이었던 시절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이 10%의 기준은 법학과에 때 아닌 지각변동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다. 계산을 해보라. 50여개의 대학에서 교수가 20명씩이 된다고 치더라도 10%면 100명의 여자 교수가 필요하다. 거기다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교수 1인당 학생의 비율을 다른 학과에 비해서 파격적으로 낮게 책정했다. 거의 10명의 학생당 교수 1명꼴이니 당시 여성 법학박사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교수로 채용되었다. 못해도 200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농업관련단체에 일하던 내게도 기회가 왔다. 그렇게 나는 교수가 되었다. 내 친구들이나 후배들은 지금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너는 농업관련단체에서만 일하고 법학과 관련한 학회나 이런 곳에 얼굴도 거의 내밀지 않는 걸 보면서 평생 교수는 물 건너 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교수가 되었구나.”

그런데 교수가 되고 나서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롭고도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농업관련단체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는 아무도 나를 전문가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교수가 되고 나서부터는 나를 전문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농업관련단체에서 일하는 동안 때로는 목청 높여 싸우고 때로는 토론을 하면서 알게 된 많은 공무원들과 교수들이 내 전공이 법이라는 것에 놀라고, 그것도 명문대(?)라는 것에 놀라는 것을 보았다.

굳이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나는 농업관련단체에서 일할 때나 교수가 되고 나서나 언제나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주장을 해왔는데 교수 임용이라는 사건 하나가 나를 전문가로 등극시켜 줬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교수가 되기 전 날의 나와 교수가 된 날부터의 나를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는 이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한동안 고민도 했다.

25년만에 처음 봉착한 문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다. 어느 기사를 봤더니 오랜 동안 통합진보당을 지지해왔고 변함없이 그 지지를 이어온 단체가 농민단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동안 농민단체들이 통합진보당을 지지해온 이유가 무엇인지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난 이게 더 이상하다. 난 당원도 아니고 혹시 미래의 언젠가는 어떤 특정한 당의 당원이 될 마음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꿈꾸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지지할 권리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정당에 대해 지지를 보낼 권리도 마찬가지이다.

농민단체에서 끊임없이 싸워왔던 문제들, 기초농산물국가수매제, 우루과이라운드에서부터 각종 FTA협상에서의 농업에 대한 원칙, 쌀시장 개방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들을 선거공약의 전면에 내세우고 농민단체와 함께 싸워준 정당이 있다면 내가 그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이었고 그것을 위해 같이 싸워주는 정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이정희펀드’에 가입했다. 그 후로도 이 지지의 마음을 접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정당만이 찌는 더위에도, 살을 에는 추위에도 항상 농민들과 함께 싸웠으며 그러다 의원직을 상실한 국회의원까지 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50년을 살면서 그 중 25년은 농업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나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아니 많은 고민들을 좀 더 구체화하고 나 스스로 더 성숙했을지도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농업문제를 고민하면서 그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전에는 몰랐던 농업의 가치를 알았고 농업/식량문제는 생존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농업은 단순히 식량생산이라는 생존권뿐만 아니라 환경과 생태계 등 인간이 살아가야 할 지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생존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25년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나의 이런 변화에 대해 이념이라는 잣대를 들이댄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잣대를 보고 나니 통합진보당을 지지해 온 나는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비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끄떡없는 집단들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결정하기가 무섭게 몇몇 단체에서 전체 당원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웃기는 일이지만 뭐, 그런 기회만 노려온 사람들이니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수사에 나선 검찰은 또 뭐란 말인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겠단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주민단체 회원들에게 강연하는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주민단체 회원들에게 강연하는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김은진 교수 페이스북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난 2년 1개월 전에 분명한 이유와 함께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대표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내가 왜 지지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까? 겨우 직업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기 전과 교수가 된 후의 나를 달리 취급하는 이 사회가 나를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대표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기 전과 선언한 후를 달리 취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2014년을 보내면서 나는 평생 당해보지 않았던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왔던 가치들이 ‘종북’이라는 색안경을 낀 사람들에 의해 평가절하를 넘어서 아예 무시를 당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같은 가치를 꿈꾸던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휘두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칼날이 나를 피해서 다행이라고, 내가 당원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어야 하나?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잣대로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농민들에게 배워온 사람이다. 올해의 내가 작년의 나와 같음을, 그리고 재작년의 나와 같음을, 더 나아가 10년 전이나 20년 전의 나와 같음을, 그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난 여전히 농민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이고 그 자리를 함께 하는 통합진보당과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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