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남 칼럼] 교복 입은 ‘학생’이 아니라 먼저 ‘인간’을 보라

‘학생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 이는 제4차 세계여성회의(1995년)에서 채택한 베이징여성선언의 한 구절인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를 차용하여 내가 만든 문장이다. 학생의 지위에 관한 현재의 모습과 한계, 그리고 미래의 당위까지 암시하지만 내가 굳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면에 있다. 사회와 그 구성단위들에게 주어지거나 그들이 쟁취한 권리들은 그 나름의 정교한 논리와 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학생들에게(초·중등교육법이 적용되는 학생을 말함. 이하 같음) 주어지는 이런저런 권리들 역시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권리처럼 그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은 권리보다는 인권의 속성과 역사성, 그리고 정치성을 갖고 있음에 유의하고 싶다(여성인권의 그런 내용에 관해서는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소식지] 2012.6. 참고할 것).

우선, 권리 그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찾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학생회가 법제화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학사운영과 자치에 관한 학생들의 참여와 의견이 보장되므로 학교민주주의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녀 비율이 비슷한 학교에서 여학생에 비하여 남학생들에게 학생의 대표성을 과도하게 인정하거나 학생회가 스스로 혹은 학교운영자와 협의하여 학생들의 두발 길이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규정을 제정한다면 참여민주주의의 후퇴 내지 남용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뭔가의 심각한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학생회장직선제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학생회장을 선출해야 한다며 후보자의 학생부성적을 상위 50%로 제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또한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가? 그 논거에는 인권이 먼저인가 아니면 권리가 먼저 고려되는가? 비록 학생인권담론에서 이처럼 인권의 가치와 법, 권리, 정책의 논의가 뒤섞여 있더라도 가능하다면 이것들을 구별하여 그 정당성과 획득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제도적·정치적 측면의 권리, 인간본성의 가치 측면의 인권

권리와 인권은 엄연히 다르지만 이것들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 역시 여간 쉬운 게 아니다. 아마 학생의 권리와 학생인권을 구별하여야 한다고 할 경우 그 어려움은 더 클 것이다. 권리의 탄생과정은 매우 다양하다. 투쟁 끝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정치적 타협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학생회의 법제화가 이루어질 경우도 그렇다. 반면에 인권은 흔히 정치나 이념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권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권력의 갈등에 주목하다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이견으로서 인권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근대의 개념이라는 주장에 관하여 린 헌트, [인권의 발명], 돌베개, 2009 참고).

권리는 전적으로 관계와 제도의 효과이며, 다양한 개인이나 집단들의 정치적 타협이다. 이로써 민주주의의 수준과 내용이 정해진다. 민주주의의 수준은 개인들 그리고 집단들 사이에서도 얽혀있는데, 권리는 그 민주주의의 수준과 비례하여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사회관계 속에서 풍부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진보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잃기도 했고, 아이들의 인권이 외면되거나 유보되는 경우 화려한 교육진보의 축복 속에서도 자살하거나 학업성적으로 차별하는 등 인간을 소외하는 역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학교교육이 보편화되고 국민의 수업권이 헌법에 의하여 보장되는 등 교육에서의 진보가 현저하게 드러났어도 학생들에게서 확인되는 인간의 본성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결국 정치와 제도로서의 권리는 인간 그 자체의 본성, 다시 말해서 인권과는 필연적이지 않음을 말해준다.

권리가 지닌 제도적·정치적 측면과 달리, 인권은 인간의 본성에서 시작하여 타자, 집단, 그리고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그 가치가 확대된다. 인권은 인간의 본성에서 시작하므로 무엇보다도 사회나 세계라는 공간,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에 의하여 제약될 수 없다. 의무교육을 받는 데 인종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학교급식을 먹는 순서를 정하는 데 학업성적이 수월한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인권은 오로지 인간의 본성 차원에서 골고루 인정된다. 또한 비록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고 해서, 수학과목에서 낙제를 했다고 해서, 교사의 지갑에 손을 댔다고 해서, 학교담벼락 밑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고 해서 그 아이의 뺨을 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 인간으로서의 학생으로부터 확인되는 인권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자유로움’과 ‘같음’이라고 설명해왔다. 그 자유로움의 원천은 생각, 감정 그리고 몸인데 그것들이 애초 형성할 때부터 시작하여 그 표현과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자유로움은 내 멋대로의 사고나 행동이 아닌,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므로 당연히 저항이 담겨있으며 그 고유함에는 끝이 없다. 따라서 획일적인 교복착용이나 명찰패용 등은 물론 이런저런 이유에서 관례화되어 있는 체벌 역시 이 ‘자유로움’에 반한다. 또한 ‘같음’은 그 자유로운 인간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온 세계 속의 만물 사이에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이 ‘같음’에서 학생인권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인권의 역사 속에서 곡해된 것은 인권을 권리의 하나로 하부화하면서 이를 정치적으로만 획득되는 이익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권을 법률과 제도 속에 가둬왔다는 점이다. 여성인권도 그렇고 학생인권도 마찬가지였다. 인권은 결코 다른 누군가에 의하여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이미 천부적인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보편적이며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인권은 ‘이제부터라도 학생에게 인권을 인정해주자’는 정치적 시혜나 공약(公約)이 아니라, 학생에게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자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인권’은 학생을 공부하고 더 성장해야 하는 미숙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바라보자는 것일 뿐이다. 요즘 말을 빌리면 인권의 차원에서만큼은 오히려 학생을 결코 미생(未生)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학생의 권리는 곧 인권’이라는 선언은 학생이 갖는 권리조차 비록 제도나 법의 옷을 입고 있으나 그것은 학생이나 그 제도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기 이전에 오로지 인간이라는 이유로써 획득되어진 자유와 저항 그리고 같음, 배려와 연대의 의미를 지닌 ‘인권’이므로 학생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성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다. 무상급식을 예로 들어보자. 헌법이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교육의 가치를 지닌 학교급식 역시 의무교육단계에서는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도 결국 ‘권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의무교육단계가 축소되거나 확대될 때마다 무상급식을 요구하는 권리의 폭도 달라진다는 논리에 포위될 수밖에 없다.

경남지역 학부모들은 지난달 4일 경남도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내년 무상급식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22만명의 아이들이 학교급식을 지원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남지역 학부모들은 지난달 4일 경남도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내년 무상급식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22만명의 아이들이 학교급식을 지원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구자환 기자

무상급식은 권리에 앞서 인권이다

학교급식을 무상으로 하려는 정당성은 이렇게 포장된 권리담론이 아니라 인권, 즉 노동하거나 공부하다가 또는 놀다가 배고프면 당연히 배 속을 채워야 하는 ‘몸’의 자유로운 반응에 따른 것이다. 학교교육을 보편화하여야 비로소 국가와 사회가 지탱된다면 그 학교에서 교육과 학습, 그리고 배움을 공유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한 그릇의 밥’은 자유로움과 같음이 흔들림 없이 고려되는 인권의 내용이다. 여전히 금전과 교환적으로만 성립하는 급식의 권리, 혹은 의무교육의 반대급부로서의 급식권리로 포장되어 있는 논리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뿐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 학생이 누리거나 갖고 있는 권리와 이익들의 대부분은 비록 투쟁과 타협, 그리고 관용이나 관례에 의하여 주어진 것처럼 보이나 찬찬히 보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기 외롭게 걸어오는 한 학생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교복 입은 학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를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학생으로서 무엇을 고민을 하는지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먼저 묻는 2015년 을미년(乙未年)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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