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랙티브 | 휠체어농구 스타 조승현의 삶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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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농구 스타 조승현의 삶을 만나다

국가대표 휠체어농구선수이자 바리스타, 장애인 직업교육교사인 조승현(33)씨

프롤로그(prologue)

휠체어농구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조승현(33)선수를 만났다. 그는 바리스타이자 장애인 직업교육교사, 국가대표 휠체어농구선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때 발병한 오른쪽 다리의 골육종으로 후천성 장애를 얻게 된 그는 ‘농구선수’의 꿈을 놓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휠체어농구 국가대표로 우뚝섰다.

주경야훈.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훈련을 하는 고된 하루하루지만 생계를 위해 시작한 장애인 교육에서도 그는 열정을 불살랐다. 장애인 특별 체육교사에서 장애인 직업교육 교사로 변신했고 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해 직접 바리스타가 됐다. 지금은 작지만 교육을 위한 카페를 운영하며 장애인들의 사회진출을 돕고 있다. 불꽃같은 그의 삶은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들에게도 감명을 주기 충분했다.

조승현의 농구인생, 좌절은 없다

‘열정’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삶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그는 삶에 대한 열정으로 좌절을 이겨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휠체어농구선수로 우뚝 섰다.

조승현 선수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농구를 시작한 그는 암의 일종인 골육종이 발병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대게 다리 전체를 절단하거나 무릎 위쪽으로 절단해야 하지만 그는 무릎 일부를 살려내고 정강이를 절단해 발목을 이어붙이는 고난위 로테이션 수술을 선택했다.

무릎이 없을 경우 걷거나 활동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만 무릎 관절을 살려내면 의족을 사용해 걷거나 뛰는데 큰 문제가 없다. 의사 5명이 투입되는 대수술을 받은 그는 휠체어가 없이 의족으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몸상태를 만들었다. 이후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중학교·고등학교 ‘의족 농구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어릴적부터 꿈이 프로농구 선수였습니다. 다리가 좋지 않았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제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내가 저 녀석을 분명 이길 수 있었는데 점점 밀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장애인인 몸상태로 대학까지 선수생활을 하는데 무리가 있었고 그는 결국 좋아하던 농구를 포기해야 했다. 좌절이었다. 초중고 내내 체육 특기생으로 4교시 이후에는 수업을 들어본 적 없는 그에게 농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한참 민감한 사춘기 시절 겪은 좌절은 그를 방황의 나락을 떨어뜨렸고 그의 표현대로 “나쁜짓도 참 많이”하게 만들었다. 농구선수로 활약하던 고등학생이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폭력 조직’에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며 1년여를 허송세월한 그는 깨끗이 농구를 포기했다. 재수를 선택하고 체육특기생이 아닌 일반대학 경영학과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농구를 “아예 접겠다”고 다짐했지만 쉬운일은 아니었다. 캠퍼스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몸을 들썩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느낀 그는 지인의 권유로 휠체어농구를 시작했다. 휠체어라고는 타본적도 없는 그에게 처음 접한 휠체어농구가 쉽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열정으로 훈련에 임했고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일본이라는 골리앗을 잡아낸 다윗

국가대표 휠체어농구 팀은 지난해 인천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국가대표 휠체어농구팀은 결승전에서 아시아 최강이라 불리는 ‘디펜딩 챔피언’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땄다. 1999년 방콕 아시안게임이후 15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휠체어농구 국가대표팀 주전 가드 조승현 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제대로 찍힌 사진이 없었을 정도였다”면서 “모두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농구 우승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링 그물 컷팅’을 위해 골대에 올랐던 것이 바로 조승현 선수였다. 10여 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해왔던 그에게는 처음으로 맛보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휠체어농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일본을 꺾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은 각별한 의미다. 시쳇말로 “17:1로 붙어 이긴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휠체어농구 선수만 1만명이 넘는다. 실업팀은 100여개에 달한다. 국가대표 선수 전부가 전업 휠체어농구 선수다. 하지만 한국 휠체어농구 선수는 400여명에 불과하다. 일본의 4%에 불과한 수치다. 한국 휠체어농구계에서 제대로 된 실업팀은 단 한 곳뿐이다. 나머지 10여개의 팀은 대부분 비전업 선수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대표 선수들 역시 전업 선수와 비전업 선수가 함께 뛰고 있다.

조승현 선수 역시 비전업 선수다. 주경야훈.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코트에 나와 농구공을 쥔다. 그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정말 죽기살기로 운동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지...”라며 안타까워했다.

얼마 전까지 조승현 선수 역시 전업 농구선수였다. 운동만 해도 경제적 걱정이 없는 꿈같은 시간이었지만 이내 그만둬야 했다. 낮은 연봉으로는 은퇴 이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정말 제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젊었을 때는 그런 말 일체 하지 않았죠. 하지만 중간 고참 선수가 되고 보니 후배들만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운동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단 한명이라도 기사를 보고 휠체어농구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조승현 선수의 마지막 목표는 올림픽 메달 획득이다. 운동 선수에게 올림픽 무대에 나가는 것은 더 없는 영광이자 메달 획득은 반드시 성취하고픈 최후의 목표다. 아시아를 재패한 그에게 올림픽이라는 꿈의 무대에서 또 한 번 메달을 따낸다면 더 바랄게 없다. 2016년 브라질 장애인 올림픽 출전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 계획도 세워 놨다.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기 위해서라도 전업선수로 다시 복귀하고 싶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것 역시 경제적 문제다. 7개월 된 딸을 보면 지금 안정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전업선수로 들어선다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자괴감이 든다. 그가 꾸는 마지막 꿈을 위해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늦은 저녁 퇴근 이후에야 코트에 나선다. 조승현 선수는 “지금도 밤마다...여전히 고민은 진행중”이라며 쓴 입맛을 다셨다.

국가대표 선수에서 바리스타로

조승현 선수의 또다른 이름은 바리스타 겸 직업훈련교사다. 코트에서 언제나 저돌적인 플레이로 승리를 쟁취하는 그는 일상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며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6년 전인 지난 2008년 그는 홀트아동복지회 휠체어농구팀에 입단했다. 선수 생활도 할 수 있고 복지회 내에서 자리도 제공받는 정책에 따라 그는 특수체육교사로 발령 받았다. 낮에는 장애아동들의 재활 체육을 지도하고 밤에는 훈련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체육교사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재활 체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승현 특수 체육교사는 직업훈련교사로 변신했다.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전공한 그는 보다 나은 장애인 직업교육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승현 교사는 진행 중인 콩나물 재배나 쇼핑백 접기 같은 단순 임가공과 더불어 보다 색다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교육을 고민하던 그에게 떠오른 것이 바로 바리스타였다. 그는 “장애인들의 특징이 하나를 배우기는 힘들지만 배우고 나면 완벽을 추구하는 성형이 있다”면서 “최근 커피 소비가 늘어나고 카페도 늘어나니 커피 교육을 해서 최고의 바리스타로 만들어낸다면 취업의 기회도 늘어나고 좋은 일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복지회에 제출할 기획안을 작성하고 후원자들 중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던가. 홀트아동복지회 후원을 하던 카와커피(Qahwa coffee) 김태훈 대표가 흔쾌하게 도움을 자청했고 조승현씨는 “우선 내가 먼저 배우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교육을 해주겠다던 김태훈 대표는 2개월 내내 설거지만 시켰다. 조승현씨는 “아니 내가 돈 벌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직업교육을 시키겠다고 나섰는데 설거지만 시켜서 화가 많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대표에게 따졌더니 “그래서 더 제대로 가르치려고 그러는 것이니 잔말 말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설거지 두 달 하고 3개월만에 처음으로 커피머신에 손을 댔어요. 지금 돌아보면 설거지만 하면서 카페 분위기도 익히고 손님들 성향도 파악하면서 배운 게 정말 많은 것 같아요. 1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정말 제대로 배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 저도 교육생들은 설거지부터 차근차근 가르칩니다”

혹독한 교육을 받은 조승현씨는 정식 바리스타가 됐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일산홀트아동복지타운 홀트보호작업장 1층 내부에 커피숍 오픈을 제안했다. 커피숍은 작은 수익원이 될 수 있을뿐더러 그 자체로 직업 훈련소가 될 터였다. 그는 김태훈 대표의 도움을 받아 내부 인테리어 공사에서부터 운영까지 발 벗고 나섰다. 조승현씨의 열정으로 탄생한 ‘Qahwa coffee with HOLT’는 일산홀트아동복지타운의 명물이 됐다.

‘카와 커피 사장님 이제 커피 좀 만드시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조승현씨는 “커피 세계도 농구만큼 방대하더라고요. 제가 농구 10년을 넘게 했는데 아직 한참 남았거든요, 커피야...한 30년은 해야 ‘좀 만든다’는 소리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에필로그(epilogue)

인터뷰는 조승현 선수가 손수 만든 ‘카와 커피 위드 홀트’ 카페에서 진행됐다. 1시간으로 예상했던 인터뷰는 1시간이나 더 걸려 끝이 났다. 휠체어농구의 현실, 장애인 직업 교육,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까지, 조승현 선수는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선 첫 번째 목표는 올림픽 메달 획득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달려야겠죠. 그리고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고 나면 제가 하는 일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에요. 장애인 취업에 대해 일반 기업들이 달리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바리스타를 만들어 놔도 대형 프렌차이즈에 취업이 안되는 게 현실이에요. 기업이 장애인 취업을 늘리고 휠체어농구단을 만드는 것은 그저 매년 몇 억씩 기부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겁니다. 기사를 보는 분들은 그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홍민철 기자
최종편집 : 2015-02-23 11:4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