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창의 철학산책] 북한미술전시회에서 무한한 고요를 보다

북한미술전시회

정말, 정말 뜻밖으로 나는 북한 미술전에서 ‘무한한 고요’를 발견했다. 북한 미술전시회에서 많은 작품들은 기대했던 대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아래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부드럽고 활기찬 운동감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 굳이 북한적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그 속에 조선의 고유한 민족적 색채와 형태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여러 작품들이 백두산을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물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렸으며, 곳곳에서 조선 여인들의 치마와 같은 단홍색 색감이 흐드러졌다. 몇몇 작품들 속에서, 예를 들어 평양 거리를 그린 작품들이나 가을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 같은 데서 인상주의의 기법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북한 리얼리즘의 현재적 모습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수집가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들이 북한의 신진화가라고 하니 새로운 흐름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이런 작품들을 스쳐 지나가다 나의 발걸음은 문득 어떤 작품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 작품은 김일수의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화폭 가득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과수원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복사꽃의 분홍빛과 과수원 나무 밑의 풀빛이 대비되어, 반 고흐가 그린 과수원을 연상시킨다. 인상주의적인 작품일까 하면서 바라본 순간 나는 이 작품이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일수는 나무에 부딪히는 햇빛조차 세밀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이 작품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을 그려낸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 작품은 대상을 지극히 세밀하게 그렸기 때문에 오히려 대상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이 이 그림을 통해 밀고 나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앞에 섰다. 그리고 흐드러진 복사꽃 저 너머에서 흘러넘치는 것 속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바로 한없는 고요이었다. 세찬 충격의 파문이 나를 사유의 바다로 떠밀었다.

김일수의 복사꽃 그림, 작품명과 연도는 알지 못함.
김일수의 복사꽃 그림, 작품명과 연도는 알지 못함.ⓒ이병창

고요함이란 무엇인가?

이 ‘고요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8세기 말 그리스 미술사를 쓴 빙켈만(Winckelmann)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고요한 위엄’이라는 한 마디로 규정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곧 운명의 압도하는 힘에 의해 파멸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고요한 위엄은 중세 스토아주의자들의 ‘아파테이아(apatheia, 불혹:不惑)’라는 정신적 자세로 전해졌다. 그것은 곧 어떤 외면적인 힘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의미한다.

예술의 역사에서 이런 고요함은 불교 미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석굴암 부처님이 가부좌한 자세로 가만히 눈을 내리뜨고 있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 고요함일 것이다. 부처님의 고요한 자세는 이 풍진 세상의 어떤 흔들림조차도 눌러 멈추게 하는 내적인 중심의 힘으로 보인다.

나는 어릴 적 고요한 달빛 아래서 월정사 구층석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약사보살상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기원하도록 만드는 역사보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곧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마음이 아닐까? 달밤을 가득 채우는 약사보살의 존재는 자재(自在) 즉 스스로 존재함 그 자체이었다.

또 다른 고요도 있다. 즉 한없는 피로라는 것이다. 이런 한없는 피로는 반 고흐의 작품 속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쌓아 놓은 거대한 밀짚가리 아래 부부인 듯한 두 농부가 잠들어 있다. 한낮의 고요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오전의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이런 잠을 통해 푸는 것이리라. 그들은 이 영원한 잠을 통해 대지의 힘과 하나가 된 듯하다.

나는 반 고흐와 같은 한없는 피로를 느낀 적이 있다. 나는 젊었을 때 가끔 모든 것을 내팽겨 친 채 외할머니의 시골집으로 도망간 적이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의 집에 이르면 한없는 피로가 나를 덮쳤다. 나는 초가집 마루에서 거의 사나흘을 누워서 잤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눈을 떴고 밥을 먹으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 한없는 피로, 그것도 역시 고요의 일종이리라.

존재의 현현

그러나 내가 북한미술전시회에서 발견한 고요함은 지금까지 말한 고요함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처음 무한한 고요를 발견한 김일수의 복사꽃 과수원 그림은 화면 전체에 흐르는 색조가 오히려 그 고요함의 빛을 가리고 있었다. 반면 허남일이나 장현일의 작품들에서 그 무한한 고요함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허남일의 작품을 보자. 그는 여름, 한낮의 호수를 그렸다. 그 역시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고요하게 머무르고 있는 수면을 그려냈다. 그가 그려낸 수면에는 나뭇잎이 떠있고 파란 하늘의 구름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그 수면은 깊고 고요한 어둠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어둠이 지닌 고요 때문에 거꾸로 그의 그림으로부터는 한 여름의 풀벌레 소리가 마치 소나기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예가 있다면 바로 장현철의 작품 ‘일요일에(2007)’일 것이다. 그 작품의 한 가운데는 잔디밭이 있다. 잔디 하나하나가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폭의 윗부분을 가로지르는 시퍼런 강물과 화폭의 왼쪽을 지배하는 거대한 나무그루터기와 그 그림자에 대조되면서 잔디밭 위에는 고요한 햇볕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 햇볕의 무게가 바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일요일에 (장현철, 2007)
일요일에 (장현철, 2007)ⓒ이병창

그 햇볕을 나는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카메라로 오랫동안 빈 터를 비추어 준다. 그 빈 터에 시들어가는 풀들이 어지러이 피어 있고 그 위에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密陽)’과 장현철의 그림 속에 그려진 햇볕이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작품들에서 표현된 무한한 고요는 외적인 힘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도 아니고, 자재하는 중심의 힘으로서의 고요도 아니고 한없는 피로로서의 고요도 아니다. 이 고요는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는 순간의 고요로 보인다. 그 고요의 순간에 모든 것은 멈추어 있다.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있는 가상의 세계를 뚫고 나오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앞에서 본 작품에서 호수의 수면에 일렁이는 어둠이며 메마른 잔디에 빛나는 햇볕의 무게일 것이다. 이 어둠과 햇볕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이제 막 출현하려는 그것은 그저 하나의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막 탄생하려는 그것은 생명의 전체, 새로운 세계 전체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새로운 세계 전체를 ‘존재’라 규정하면서 개별적인 존재자들과 구분했다. 그는 존재자들 가운데 이런 존재가 출현하는 순간을 ‘존재의 현현(현재)'으로 규정했다. 이 존재가 출현하는 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위의 작품들에서 발견하는 고요는 바로 이런 존재가 현현하는 순간의 무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런 작품들이 왜 극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였는지 하는 물음도 풀려지리라. 그 점은 마그리트의 그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그리트는 현실적 사물을 거대한 규모로 과장하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마찬가지로 최근 서구나 한국의 화가들은 극사실주의적 기법을 이용하여 이런 초현실적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화가 고영훈의 극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이미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현실적인 대상이란 기억에 의해 추상화된 대상들이다. 우리는 몇 가지 색깔, 몇 개의 선들, 몇 가지 감촉들만을 기억할 뿐이다. 반면 이런 대상들을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면 그 대상들은 우리의 기억을 넘쳐흐르면서 오히려 현실적인 대상성을 상실해 버린다. 이제 현실적인 대상은 가상적인 현실이 되어 버린다. 이런 대상의 가상화(假象化)를 통해서 대상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것, 초현실적인 것, 초감각적인 것의 현현으로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상의 북한 작품들이 극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집념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바로 이처럼 현실 자체를 가상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무한한 고요가 그려진 작품이 출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작품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그저 물음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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