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창의 철학산책] 박솔뫼의 소설 ‘그럼 무얼 부르지’와 실존의 공동체

작가 박솔뫼

작가 박솔뫼가 등단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동안 그는 한두 권의 소설집을 냈다. 그리고 지난해 1월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 모음)라는 단편집을 출간했다. 나는 그가 앞서 출간한 소설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관해서 제한해 말하자면 그의 소설은 무언가 새로운 흐름의 선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소설은 형식적으로도 영화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말을 아낀다. 이미지들이 말을 대신하고 영화적인 오버랩이 자주 사용된다. 객관적으로 묘사하던 중 갑자기 뛰어드는 대화체라는 그의 독특한 문체는 영화에서 카메라의 교체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의 소설이 준 독특함은 형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의 소설은 특별한 사건을 다루지도, 특별한 성격의 인물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저 도시를 무의미하게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이태리 영화감독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무척이나 닮았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은 1950년대 말 서구에 실존주의가 풍미할 때 나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실존문학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조이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척적인 관계에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계가 199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상기하면 박솔뫼의 소설은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사상계에서는 이미 2000년대 말부터 탈(脫)포스트의 바람이 불었다. 이는 세계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이나 라캉, 지젝의 정신분석학, 블랑쇼 모리스와 낭시의 문학과 철학이 흐름을 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박솔뫼의 소설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의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를 단숨에 읽었지만 오랫동안 그로부터 받은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글은 그 충격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철학적인 개념을 찾으려는 시도 끝에 나온 글이다. 우선 내가 받은 충격부터 말해 보자. 그의 단편집을 처음 열면 <차가운 혀>라는 작품이 나온다. 내가 이 단편부터 읽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이 단편이었다. 내게 그 충격은 마치 이상의 <날개>나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준 충격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상의 <날개>나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1930년대 그리고 1960년대를 대표하는 단편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주인공인 ‘나’의 의식을 좇아 서술하며, 주인공들은 모두 밀폐된 공간에서 아무 하는 일이 빈둥거린다. <날개>에서 ‘나’는 아내의 방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밀실에 자기를 유폐하며, 아내가 나간 뒤 아내의 화장대 병들에 스며든 햇빛을 보며 즐긴다. <무진기행>에서 ‘나’는 적군처럼 진주한 안개에 갇히며 그 속에서 수음이나 하면서 시간을 잊는다. 이 두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마침내 죽음에 부딪히게 된다. <날개>에서 ‘나’는 자기 방을 빠져나와 벤치 위에서 수면제 남은 알을 모두 털어놓고 일주일간 죽음 같은 잠에 빠진다. <무진기행>에서 ‘나’는 무진에 도착한 다음 날 어머니 산소로 가는 도중에 방죽 위에서 자살한 여인의 주검을 보게 된다.

이 두 작품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그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날개>는 식민지 시대 삶의 의지를 상실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진기행>은 60년대 초 경제개발에 떠밀려 자기를 상실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시대를 넘어서 공감을 주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두 작품이 단순히 시대상을 그려내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죽음’이 다시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작품들이 다루는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닐 것이다. 그 죽음은 한편으로는 떠밀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다. 그 죽음은 주인공들이 그들이 속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다. 그들이 속한 세계가 일상의 세계 곧 세계적 존재자들이 뒤얽힌 세계이다. 반면 그들이 이행하려는 세계는 초월의 세계 곧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세계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 속에 출현하는 죽음은 곧 존재의 진리로 해방되는 계기가 된다.

‘차가운 혀’

박솔뫼 작가의 (자음과모음 출판) 표지
박솔뫼 작가의 (자음과모음 출판) 표지ⓒ자음과모음

해방으로서 죽음이라는 계기는 박솔뫼의 작품에서도 핵심적인 주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박솔뫼의 작품 <차가운 혀>를 보자. 이 단편 역시 작가는 ‘나’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간다. ‘나’는 어느 건물의 지하실에 있는 바에서 서빙하는 젊은이이다. ‘나’의 삶은 바에서 서빙하는 세계, 즉 ‘사과와 오렌지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세계’이다. 그는 이 삼각형이 무너지면 생존의 의지 자체가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그는 그런 무너짐을 두려워하며 사과 아니면 오렌지를 깎고 또 깎는다.

이 삼각형의 세계 속에서 ‘누나’는 지하실에 일하는 ‘나’를 무료로 도와준다. ‘나’와 ‘누나’는 오직 육체적인 섹스에 몰두한다. ‘나’와 ‘누나’는 맥주잔을 씻는 것처럼 혀를 움직이고, 맥주잔을 닦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 섹스를 나눈다. 그런 섹스 속에서 ‘누나’에게 남은 것이 ‘신음소리와 웃음소리’라면 ‘나’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혀’이다. 이런 세계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곧 사장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곧 ‘런던’이 의미하는 세계이다.

“사장이 소파로 가서 휙 하고 누웠다. 우리는 갑자기 무대 위에 서게 된 사람들 같은 기분이었다. 텅 빈 바에 음악은 흐르고 관객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누나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차가운 혀>)

이런 주인공의 삶의 모습은 마치 2010년대 오포 세대 아니 실신(失信) 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박솔뫼의 소설이 시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리라. 그러나 <날개>와 <무진기행>처럼 박솔뫼의 작품도 이 시대 고통 받는 청년을 형상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박솔뫼 역시 청년들의 자화상을 통해 해방의 계기로 죽음을 그려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차가운 혀>의 주인공은 바에서 사장에 의해 잘린다. 그것은 외부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자신이 이미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는 사장과 달리 ‘런던’에 대한 아무런 욕망이 없다. 그 때문에 그는 살이 쪄간다. 그것은 그의 습관이며 한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습관이 된다. 반면 ‘누나’에게는 ‘런던’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술이 는다. 사장은 누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고, 그 때문에 사장은 ‘나’ 때문에 괴롭다. 그는 결국 바에서 잘린다.

이렇게 바에서 잘린 다음 ‘나’는 드디어 상가 화장실 앞, 바닥을 새로 까는 일을 한다. 여기서 ‘나’는 본드를 마시기 시작하고 끝내 본드에 빠진다.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며 배도 고프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힘껏 본드를 들이마시면 떠오르는 “희고 끝없는 커다란 세계”에 빠져든다. ‘나’의 몸이 말랑말랑해진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죽어간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나는 내 시작이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빨리 흐른 적이 없었다. 늘 하루가 길기만 하다.”(<차가운 혀>)

주인공인 ‘나’가 빠져드는 이런 죽음의 의미는 <차가운 혀>에서는 더 이상 충분하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박솔뫼의 이어지는 작품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해만’의 의미

박솔뫼의 단편집에는 ‘해만’이라는 섬을 소재로 하는 두 편의 단편이 들어 있다. 그 가운데 <해만>이라는 작품은 2010년 겨울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또 하나의 작품 <해만의 지도>는 2012년 8월 <문장웹진>에 실렸다.

해만은 특별한 공간이다. 그것은 해만이 아버지를 죽인 청년이 도피했다가 잡힌 곳이기 때문이다. 작품 <해만>에서 주인공인 ‘나’는 이 사건을 신문기사에서 보고 이에 끌려서 이 해만에 오게 된다. 그러나 그가 해만에서 이 청년과 관련해 발견한 것은 음식점 벽에 걸린 현상수배전단에서 박힌 청년의 얼굴뿐이었다. 그녀가 해만에서 실제로 발견한 것은 해만에서 모든 것이 느리고 늘어져 있고 고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해만도, 나도 해만도 천천히 어디로든 가지 않고 여기에 있기만 했다.”(<해만>)

이런 해만은 주인공이 떠나온 수도와 대비된다. 그 수도는 그녀의 친구인 여주 때문에 기억된다. 여주는 주인공에게 애인과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주인공 역시 그 관계가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인공은 애인과 헤어지고 해만으로 떠난다. 주인공은 이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마치 친구 여주 때문인 것처럼 내심으로 여주에게 화를 내고 연락도 끊게 된다.

주인공인 ‘나’는 해만에서 이렇게 애인과 여주, 심지어 가족과도 천천히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해만에서 그녀는 심지어 생각조차 잊어버린다.

“그리고 시간이라든가 나 자신이라든가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잘 되지 않았다.”(<해만>)

그렇다면 해만이라는 공간이 주인공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고여 있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죽음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공간은 주인공에게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무엇은 아니다. 오히려 이 죽음의 공간은 어떤 해방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 해만이 곧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청년은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폭력을 견디지 못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한다. 이런 설정은 해만이 어떤 전복적인 해방의 기억을 갖고 있는 곳임을 암시한다. 물론 이 사건이 실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실제 그 흔적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소문만으로도 이미 해만은 그런 해방의 기억을 갖고 있는 곳이 된다.

이 해만에서 ‘나’는 이제 생각조차 사라져 버린다. ‘나’는 이제 “가볍고 바람이 통과하고 흔들거리고 텅 비어 있는” 존재가 된다. 이런 텅 빈 존재로서 ‘나’는 해만에서 몇몇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만남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 말(일상의 대화 외에 깊이 있는 말)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대감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연대감은 그들 모두가 해만에 있다는 것, 수도를 싫어한다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의 연대감은 말이 없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이다. 이를 작가는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다.

“모두가 아무 말이 없다. 캔커피를 따서 마시는데 커피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 테이블에 캔을 놓는 소리가 났다. 캔커피를 마시는 소리와 남자가 마시는 술잔의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났다.”(<해만>)

이 장면에서 작가는 어떤 고요함을 전제로 한다. 이 고요함 속에서 캔커피의 소리와 술잔의 소리가 마치 정밀한 교감을 나누는 듯이 서로 어울리고 있다. 또는 아래와 같은 장면을 보라.

“남자는 나를 보며 물었다.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남자는 웃고 있었다. 조금 쓸쓸할 것 같긴 한데, 그런데 곧 잊어버릴 것도 같아요.”(<해만>)

서로의 고독 속에 서로 나누는 교감이 이런 곧 ‘잊어버릴 것 같은 쓸쓸함’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단편은 이렇게 주인공이 해만을 다시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단편의 끝에 작가는 주인공 ‘나’의 입을 통해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은 곧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해만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에 대해 작가는 그런 질문조차 곧 빠져나가게 되면 그야 말로 텅 빈 공간에서 “자신만이 강렬해질 뿐”이라 한다.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 그것이 바로 곧 실존이 아닐까? 그 실존은 고독한 실존이지만 그렇다고 타인과 완전히 절연된 고립된 존재는 아니다. 실존으로서 내가 실존으로서 타인과 나누는 연대감과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실존의 공동체’라 이름붙이고 싶다.

실존의 공동체

그 뒤의 작품인 <해만의 지도>에서 해만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물들은 더욱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해만의 기억을 담은 지도를 그리다가 우연히 해만에서 만난 우석이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산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그저 밥 먹고 부산타워에 올랐다가 술을 마신 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인 ‘나’는 <해만>에서와 같이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의 흔적을 찾아 해만에 갔다고 말해진다. ‘나’가 발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해만을 그린 지도 위에 해만에서 만난 원그리스도교정의 목사를 만난 곳에 동그라미를 표시한다. 그것은 ‘나’가 해만에서 특별히 기억하는 것이 목사임을 말해 준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더불어 해만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우석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부산에서 만난 우석은 그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술이 취한 다음 그는 사실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 이야기는 그가 청년의 동생이라는 서나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다. 서나 역시 자신의 오빠의 흔적을 찾아 해만으로 왔다. 그는 청년의 동생인 서나를 만난 장소를 노트에 그린 해만의 지도 위에 특별히 별표로 표시해 둔다.

주인공인 ‘나’와 우석은 해만에서 만났으며 특별하게 가까워진다. 그들이 가까워지는 것은 해만이라는 기억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만의 지도를 노트에 빽빽하게 그려놓았다. 해만이 그들에게 특별한 것은 그곳이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이 도피했던 곳이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누구도 그 청년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석에게는 서나와의 만남이 있다. 그는 서나를 위해 청년을 만났다는 사실을 지어내기도 한다. 그는 서나가 청년의 동생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일까? 작가는 굳이 그것을 밝히고자 하지 않는다.

반면 주인공은 원그리스도교정의 목사를 기억한다. 주인공은 목사를 우연히 편의점에서 마주쳤다. 목사는 주인공이 산 영화잡지를 함께 보며 어떤 영화배우의 인터뷰를 읽는다. 그 기사에서 배우는 “저는 제가 몹시 연기하고 있지 않나”하고 스스로를 경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옆의 목사를 보면서 “이 사람은 스스럼없이 목사처럼 보이지 않는 목사를 몹시 연기하고 있네”하고 생각한다. 그런 만남 뒤에 일주일 후 다시 편의점에서 만나 목사는 맥주를 마시며 “붉어진 얼굴로 엉엉 울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붉은 얼굴’은 작가가 이 단편집 곳곳에서 상징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 붉은 얼굴은 물론 술에 취한 얼굴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얼굴은 아직도 현실 속에서의 어떤 열정을 간직한 얼굴이다. 이런 얼굴들은 죽음에 이른 존재들이 지닌 느낌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우석이 기억하는 서나는 “서늘한 바람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붉은 얼굴은 목사에게 아직 어떤 열정(아마도 구원의 열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과도 의미상 연결된다.

해만에 대한 이런 기억들 때문에 주인공과 우석은 아주 가까워진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내적인 연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래 서술을 통해 분명하다.

“기도하듯이 종이 두 장을 손바닥 안에 모으고 있는 우석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나의 손 안에는 내 손보다 큰 우석의 손이 있고 우석의 손바닥 안에는 해만의 지도와 별로 된 몇 개의 표시가 있다.”(<해만의 지도>)

이들의 만남은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주인공은 목사를 기억하며 우석은 서나를 기억한다. 물론 주인공이 기억하는 목사의 모습에는 우석의 모습이 어려 있다. 반면 우석이 기억하는 서나의 모습에는 주인공 자신의 모습이 어려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존재를 기억한다. 아마도 사랑한다면 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사랑보다 더 깊은 연대감이 발견된다. 그러기에 우석은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랑 서나랑 너랑 그리고 또 누가 있지? 숙소에 있는 내 친구? 아니면 젊은 목사? 아니면 너 친구 아무나 그렇게 넷이서 살면 좋지 않을까? 우리는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그렇게 살다가 밤에 집에 돌아와 넷이서 꼭 껴안고 자는 거. 그러면 다음 날도 행복해지고 우리는 힘들지 않을 거야”(<해만의 지도>)

우석의 말에 대해 작가는 주인공의 태도를 이렇게 서술한다.

“우석은...말했다. 아 좋겠다 하고 무릎을 꿇고 벽에 기댔다. 나는 손바닥으로 우석의 머리를 툭툭 하고 쳤다. 그리고 우석이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머리가 얼굴을 자꾸만 가려서 손으로 머리를 넘겨야 했다.”(<해만의 지도>)

‘바람’의 이미지 역시 작가가 좋아하는 이미지이다. 작가에게서 바람은 새벽과 항상 통한다.
이 두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연대감은 곧 해만이라는 공간을 통한 연대감일 것이다.

광주의 기억

박솔뫼 작가
박솔뫼 작가ⓒ뉴시스

하이덱거는 예술 작품이란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을 과제로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일상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서 존재의 세계로 초월한다. 이런 존재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은 무를 통과하는 길이다. 그런 무란 이런 저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무란 곧 세계 내 모든 존재자들이 일체 사라지는 심연이다. 그 심연은 죽음의 경험이다. 이 죽음의 경험 앞에서 느껴지는 것이 실존적 체험이다. 하이덱거는 이런 실존적 체험을 불안에서 찾았다. 사르트르는 그런 경험을 구토에서 찾았다. 작가 박솔뫼는 그런 체험을 질문조차 사라진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느끼는 것”으로 설명한다.

실존철학에서 제시한 이런 실존적 체험은 고독과 우수의 체험이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의 철학자 낭시는 이런 실존적 체험을 통해 ‘무위(無爲)의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 무위의 공동체란 곧 죽음을 통해서 서로가 존재의 진리 속에서 만나는 경험이다.

이런 무위의 공동체란 흔히 말하듯이 서로의 공통성을 매개로 또는 공동의 일을 매개로 하는 개념적 공동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잊고 타자 속으로 넘어 들어가는 혼연일체(渾然一體)로서의 공동체도 아니다. 이런 무위의 공동체는 자신의 실존적 고독을 유지한 채 서로가 무언(無言)으로, 서로 접촉하는 일이 없이, 그러면서도 서로 내면으로 일체감을 느끼는 공동체이다. 낭시는 이런 공동체를 블랑쇼가 제시한 문학적 공동체를 통해 제시하려 했다. 문학적 공동체란 작품을 매개로 작가의 죽음의 경험이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 자신의 죽음의 경험을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낭시가 말한 ‘무위의 공동체’라는 표현은 너무 익숙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를 쉽게 ‘실존의 공동체’라 이름붙이고 싶다. 이런 실존의 공동체는 카뮈가 <페스트>라는 작품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연대감을 통해 설명하려 했던 적이 있다.

박솔뫼의 이번 단편집을 대변하는 작품 <그럼 무얼 부르지> 역시 이런 실존적 공동체의 경험을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광주라는 기억을 매개로 만난 서나와 주인공이 그저 일없이 광주를 하루 쯤 함께 걸어다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작가에게서 ‘광주’는 또 하나의 해만, 또는 해만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연대감을 보여준다. 그 연대감은 광주 출신인 주인공과 미국의 해나 그리고 일본의 교토의 바의 주인이다. 그들 모두 광주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인연을 통해 간접적으로 광주를 기억한다. 서나는 김남주의 시 <학살>을 통해 기억하고, 교토의 바 주인은 '광주city'라는 하큐류의 노래를 통해 기억한다.

그들에게 광주란 무엇일까? 작품에서 작자는 설명이 없지만 그 광주는 한때 사회적인 저항이 일어났던 곳이다. 박솔뫼의 인물들에게 저항이란 단순히 사회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들에게 저항이라는 것은 오히려 실존적 문제이다. 이 저항은 일상적 존재자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광주는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이 숨어들었던 해만과 같은 곳이다. 그곳은 곧 죽음의 공간이며 따라서 해방의 공간이다.

이런 죽음의 공동체를 통해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깊은 연대감이 출현한다.

“나의 검지는 해나의 검지를 밀듯이 해나의 검지는 나의 검지에 붙어 있는 듯한 모양으로 움직였다...두 검지는 종이를 두드렸다. 툭툭 하고 서로의 손가락도 두드렸다.”(<그럼 무얼 부르지>)

공동체의 가능성

낭시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개인만이 존재하는 유아론적인 세계라고 본다. 낭시는 이런 시대 공동체의 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한 기투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 그가 찾은 것이 바로 실존의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대로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개인과 연대가 공존하는 공동체이다. 박솔뫼의 소설이 이 공동체를 형상화했다. 그의 소설은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이 시대 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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