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gory Elich 칼럼] “온 마을이 울고 있다”...알렉시나츠의 경우

나토가 전쟁을 벌인 직후인1999년이었다. 나는 나토 범죄를 기록하기 위해 대표단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했다. 전쟁 범죄의 증거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마을과 도시들은 파괴되어 남은 게 없었다.

방문지 중 하나인 알렉시나츠(Aleksinac)는 작은 탄광 마을로, 나토가 맹렬하게 조준폭격했던 곳이다. 이곳 지자체는 강한 사회주의 성향이었는데, 나토가 이 마을을 주목했던 것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방 공무원은 우리에게 놀라운 수치를 보여줬다. 767개의 주택과 908개의 아파트, 302개의 공공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공개 면담에 참석한 Dragoljub Todorovich는 74세의 은퇴 교사로, 다리에 금속 버팀대를 차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의 집은 미사일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난 40-50년간 미국은 우리의 친구라고 들어왔다” 그는 회상했다. “러시아인들과 함께 미국인들은 평화를 파괴했다. 초당파였던 나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찾아온 전쟁으로 Todorovich 씨는 살아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면담 후 우리는 Todorovich의 집을 찾아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폭발로 흩어진 콘크리트와 벽돌뿐이었다. 잔해 더미에 발을 디딜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벽돌 소리는 그의 증언을 떠올리게 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내 다리가 피부 몇 조각에 의지해 겨우 내 몸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Todorovich는 수술로 다리를 구했지만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14주동안 치료를 받았고, 끔찍한 통증에다 심장마비까지 겪어야 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 집요하게 그의 머리속에 머물렀던 한 가지 생각은 이것이었다. “미국이 고른 것은 가능한 최악의 수였다.”

나토 전투기가 그 해 4월 5일 지역 전체를 쓸어버린 Dushan Trivunac 거리를 우리는 걸어 내려갔다. 공격이 있던 그날 밤 Vukoman Djokich 는 머리 위로 나토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Djokich씨는 전투기 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부인에게 주의를 줬다. “이제 알렉시나츠의 차례가 된 것이다. 전투기들은 우리를 폭격할 것이다.” 전투기 소리가 사라졌지만 2분 후 소음이 되찾아왔다. 천둥같은 폭발음이 터졌고, Djokich씨는 활활 타오르는 불빛을 봤다. 폭발은 계속되었고 집안에 불빛이 환하더니 Djokich씨는 의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집의 출입문이 날아가고 지붕이 무너졌다. Djokich씨와 그의 아내는 겨우 복도를 통해 빠져 나왔다. 그러자 그들 앞에는 “거대한 불길과 연기, 먼지 구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도와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있었다.”

처절하게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문했을 즈음 이 지역의 폭격 잔해들은 제거되었고 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막 자리를 뜬 공사장에는 벽돌과 건축 자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덤프트럭과 타워크레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폭탄의 파편으로 움푹 패인 구멍들이 남아있는 아파트 건물이 유일하게 그날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를 좀더 내려가면 또 다른 폭격 현장이 있는데 이곳도 새로운 건물의 기초 공사가 이미 진행되었다.

우리는 Vuk Karadzhich 거리를 돌아 내려가 꽃이 가득한 발코니와 붉은 색 지붕이 있는 2층 주택들이 늘어선 매력적인 동네로 들어섰다. 거리 끝 자락에 4월 5일 폭격을 당한 주거 단지가 있었다. 공습이 벌어진 2주 후 녹취된 증언에서 Srboljub Stojanovich 는 이렇게 말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유리창이 터졌고, 천장은 우리 위로 떨어졌다. 벽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벽 잔해에 묻혔다. 나는 가족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들었고, 내 몸 전체가 부상을 입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잔해 더미 아래를 파내어 겨우 빠져 나왔지만 끔찍한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축 자재들과 유리, 파손된 차량들이 무더기로 있었고 여기에 묻힌 사람들을 꺼내기 위해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모든 것이 끔직했다.”

NATO전투기들이 마을을 폭격하기 시작할 당시 13세의 Dushan Miletich는 부모, 형제와 함께 집에 있었다. “끔찍한 폭발이 있었고 전기가 나갔다. 그리고는 천장과 유리조각, 나무 조각들이 우리 위로 떨어졌다.”고 그는 조사관에게 말했다. “나는 부상을 입었다. 특히 머리부분, 아래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은 우리를 창문으로 겨우 밀어 냈다.” 폭발로 아버지 Slavimir가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Slavimir씨는 “무언가가 머리를 강타한 듯 했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솟구쳐 나와 얼굴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일어나서 부인과 두 아들이 있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방으로 갔다.” 창문을 통해 탈출한 후 “우리는 깨진 유리와 타일, 벽돌, 기둥 더미를 뛰어 넘어 연기와 먼지 사이를 헤치고 달렸다. 나는 울부짖음과 흐느낌, 도와달라는 외침을 들었다. 거리에는 아기를 안고 피난처를 찾는 가족도 있었다.” Slavmir씨의 부인인 Verica는 “거리는 울부짖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Vukica Miladinovich는 NATO의 전투기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매우 낮게 날고 있는” 소리를 듣고 가족들과 함께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궜다. “그 직후 두 번의 폭발 소리를 들었다. 순간 내 몸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평정심을 잃게 된다. 최강의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방이 흔들렸다. 침대 옆에 서 있었던 나는 공기 압력으로 붕 날았다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여전히 오른손으로 내 아이들을 감싸 침대에 붙잡아 놓고 있었다. 방은 연기와 먼지로 어두컴컴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와 시아버지를 강타했다.”

Vukica의 안경이 깨져 그녀는 눈을 다쳤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았다. 시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내 어둠속에서 그림자를 인식하게 되었다. 불이 붙은 것이다. 지하실은 잡동사니들이 많았고 공기가 부족했다. 우리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아이들을 불렀고 어둠속에서 그들을 찾았다. “침대의 봉이 아들인 Marko의 다리에 박혔는데 아들이 스스로 빼냈다. 시아버지와 시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시어머니는 부상을 당했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Vukica는 밖으로 나가려고 쌓여있는 잔해더미들을 손과 발로 파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파편이 떨어지며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길을 내어, 아들들과 시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Bratislav씨는 미사일 폭격이 이루어질 당시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부모와 여동생을 잃었다는 괴로움에 Bratislav 씨는 자살할 생각도 했다.

나토의 폭격으로 희생된 친척들에게 꽃을 바치는 주민들. 세르비아의 알렉시나츠에서는 1999년 나토의 폭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사진은 2012년 3월 24일에 열린 추도식에서 촬영됐다.
나토의 폭격으로 희생된 친척들에게 꽃을 바치는 주민들. 세르비아의 알렉시나츠에서는 1999년 나토의 폭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사진은 2012년 3월 24일에 열린 추도식에서 촬영됐다.ⓒ신화/뉴시스

“우리는 미국을 친구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알렉시나츠의 사회주의 청년모임(Socialist Youth) 대표인 Danijela Dimitrijevich 는 우리를 안내하고 통역도 했다. 마을이 폭격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Dimitrijevich 는 새벽 폭격이 벌어진 날 출근을 위해 마을에 왔을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장면을 보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울었다. 그 순간 내가 유일하게 느낀 감정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마을 전체가 울었다. 마을 전체가”

폭격으로 ZAGO Militich의 가족들은 모두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미국인들과] 친구로 지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우리는 항상 그들이 우리 친구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가 65세인데, 새 집을 찾아 나서야 한다.”

폭격 다음날부터 이 지역을 촬영한 사진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파괴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알렉시나츠의 다른 지역처럼 우리가 방문할 당시 이 지역은 폭격 잔해 더미들이 거의 제거되었다. 굴착기 한대가 잔해 더미들을 퍼냈고, 땅을 굴착하기 시작했다. 인근에 지붕이 거의 사라진 집이 있었다. 아파트 건물 두 개는 폭격에 따른 파편으로 수십개의 구멍이 생기고 유리창들이 뒤틀려 있었다. 파괴된 주택들은 갈 곳을 알 수 없는 계단과 건물 벽만 남았다. 주택이 있었다는 신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Dragoslav Milenkovich의 집은 피해를 입은 아파트 건물 중에 하나이다. “모든 것들이 흔들리면서 깨져 부서졌다. 어디로 떨어질 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말했다. “큰 포탄 파편이 벽을 관통했고 이내 불에 휩싸였다.” Milenkovich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갈 곳이 없는 그는 이웃 집에 더부살이 하고 있다.

4월 5일 밤 NATO의 공격 목표였던 Angrokolonijal 식품 가공 공장에서는 야간 경비원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저장창고는 잠겨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구멍을 통해 완전히 파괴된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출입구 인근의 안내 사무실은 폐허 상태였다. 길 건너 상무부의 보조 건물도 지붕들이 거의 떨어져 나갔다. 폭발열로 뒤틀리고 구부러진 울타리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건물 한쪽 끝에서 우리가 본 것만으로도 내부가 심각하게 파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방문 당시 이미 조사관들은 이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야 할 것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다음에 방문한 곳은 가정과 공장의 전등이나 신호등을 제작하는 노동자 협동조합인 Empa 였다. 4월 5일 Angrokolonijal의 폭격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후엔 직접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다. 약 30만달러 이상 피해가 발생했다. 공장 관리자인 Slobodan Todorovich 는 공격으로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전쟁 중에는 거의 매일 공습 사이렌이 울렸고 폭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노동자들은 나토에 저항한다는 표시로 근무지에 머물렀다. Empa는 알렉시나츠에 대한 NATO의 세 차례 공격 중 가장 마지막에 폭격을 당했다. 5월 28일 이른 새벽 나토 전투기는 이 마을에 21개의 미사일을 투하했다.

Nishka과 Uzhichka 거리 근방은 그 마지막 공격 목표 중 하나였다. 벽돌로 지어진 많은 집들의 벽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똑바로 서 있었지만, 지붕들은 사라졌고 내부도 텅 비었다. 한 집은 직격탄을 맞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피해자를 애도하는 추모물품을 벽에 놓아 두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지역에서 희생자가 목숨을 잃은 곳에 애도의 추모 물건들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애도의 글과 함께 희생자의 사진과 이름을 담긴 종이나 천 조각들이 벽과 나무, 전신주에 걸려 있었다. 희생자는 잊혀지지 않는다. 공동체 사회에서 희생자는 공동체 전체의 상처로 여겨진다.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죽은 이들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을 보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이웃들이 죽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나토가 죽인 희생자 중 한 명인 Dushanka Savich는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과자공장의 기술 매니저였다. “그녀는 아주 좋은 이웃이었다”고 이 여성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을 후회했다.” 나는 부모가 되는 꿈을 이루지 못한 이 여성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다른 어떤 꿈을 꾸든 이젠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을텐데. 모든 꿈들이 인생의 기쁨, 고통, 즐거움과 함께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증인은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내 아이들도 지은 죄가 없습니다.”

다른 여성은 폭격으로 무너진 벽에 깔려 죽은 Predrag Nedeljkovovich라는 사람에 대해 말했다. 그는 1년 전에 알렉시나츠에 자신의 집을 지었다. “어떤 어머니도 그런 아들을 다시 낳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심성이 좋은 그는 그가 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병원의 세탁업무에서 일반 관리까지 어떤 일이든 했다. 항상 사람들과, 특히 아픈 사람들과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만하지 않았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가고 없다. 이 여성은 서구 지도자들에 대해 씁쓸한 감정만 남았다. “우리는 지옥을 겪고 나왔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잠시 멈춘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Predrag는 내 마음, 여기에 있다”며 그녀는 가슴에 손을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고통스런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Gregory Elich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칼럼은 앞으로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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