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처펀드가 던진 무거운 질문, “삼성은 과연 이재용의 것인가?”

힘이 센 두 세력이 한 판 싸움을 벌이는데 딱히 누구를 응원하기가 뭐한 형국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허점을 파고든 벌처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관련기사 벌처펀드, 삼성을 정조준하다 2015.6.6)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사수에 나선 삼성그룹의 일전(一戰) 이야기다.

국적을 생각해 애국심을 발휘하자면 대한민국 대표 선수 삼성그룹을 응원해야 하는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말에 더 일리가 있다.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패러디하자면 ‘편법을 쓴 놈’ vs ‘시비 걸어 돈 챙기려는 놈’의 싸움이어서 누구를 응원하기가 더 애매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이겨라,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고 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출전 선수 중 한쪽이 ‘좋은 놈’이었으면 그나마 관전이 좀 편했을 텐데 말이다.

제일모직과 합병을 예고한 삼성물산의 주주명부가 11일 폐쇄된다. 즉 합병을 승인할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들이 이날 확정된다는 뜻이다. 시장에서 아직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 주식을 팔고 나갔다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결국 다음달 17일로 예정된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을 밀어붙이려는 삼성그룹과 이에 반대(표면적이건 실질적이건)하는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게 됐다.

삼성그룹은 진퇴양난이다. 삼성그룹은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추진해 ‘이재용의 황제 등극’에 탄탄대로를 깔았나 했다. 그런데 논리와 실력으로 무장한 벌처펀드가 밥상을 엎어버렸다. 물러서자니 ‘이재용의 삼성’이 시작부터 좌초할 위기다.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삼성이 사용했던 편법이 되레 족쇄로 작용해 삼성그룹의 앞길을 막는다. “설마 삼성이 지겠어?”라는 지극히 한국적이고 관성적인 사고는 너무 안이하다. 의외로 승패 여부가 오리무중이다. 삼성물산 주주총회의 세 가지 관전 포인트를 짚어본다.

서울 서초구의 삼성물산 본사
서울 서초구의 삼성물산 본사ⓒ뉴시스

포인트 1:삼성물산의 저평가, 사실인가?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기를 든 명분은 합병 비율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현재 두 회사의 이사회 결의대로라면 삼성물산 3주가 제일모직 1주와 교환되는 꼴이다. 이런 비율이 결정된 이유는 증시에서 평가받는 두 회사의 시가총액이 제일모직이 삼성물산보다 3배가량 크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당연해 보이는 합병비율 산정이 족쇄가 될 줄 꿈에도 생각 못한 듯하다.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회사의 총 순자산 규모다. 순자산이란 회사가 갖고 있는 모든 자산에서 갚아야 할 빚, 즉 부채를 뺀 수치다. 한마디로 그 회사가 순수하게 보유한 재산의 총합이다. 부채마저 뺀 금액이기 때문에 이 순자산은 100% 온전히 주주들의 몫이다. 순자산이 1억 원이고, 회사 주식이 10주라면, 1주를 가지고 있는 주주의 자산은 1000만 원인 셈이다.

그런데 삼성물산의 순자산은 13조 원이다. 반면 제일모직의 순자산은 5조 원을 조금 넘는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재산 가치가 제일모직의 두 배 반이 넘는다. 두 배 반이 넘는 재산을 가진 삼성물산 주식 가치를 거꾸로 5조 원밖에 안 갖고 있는 제일모직 주식의 3분의 1로 쳐서 합병을 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냐면, 제일모직 주가가 삼성물산에 비해 터무니없게 높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주가는 단순히 회사가 축적한 부(富)의 규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미래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주가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제일모직은 에버랜드를 합병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다. 반면 삼성물산은 비록 돈은 많이 갖고 있지만, 영위하는 사업이 건설과 무역이라는 다소 진부한(?) 영역들뿐이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 제일모직 주가가 부유한 삼성물산 주가보다 훨씬 높게 평가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이번 합병이 삼성물산에 불리하다”고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합병 비율을 결정할 때 시가총액 기준이 아니라 순자산 규모로 결정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주가란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어 편법이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삼성그룹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사실 이번 합병은 삼성물산 주가가 기업 가치에 비해 현격하게 저평가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삼성그룹이 의도한 이번 합병의 최우선 가치는 제일모직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삼성물산의 부(富)를 몰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성물산이 고평가됐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합병을 해도 물어줘야 할 비용(이 부회장이 희생해야 할 제일모직 지분)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삼성물산은 제일모직에 비해 훨씬 저평가 상태였다. 그래서 합병만 성사되면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4.1%, 약 8조 원의 가치)도 쉽게 이재용 부회장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었다. 그래서 삼성이 ‘패션-엔터-건설-종합상사’를 아우르는 괴상한 기업까지 만들면서 두 회사의 합병에 집착한 것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이미 법원에 삼성물산과 이사진들에 대한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출했다.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게다가 명분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분에서 앞선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도 이 명분에 따라 곳곳에서 세력을 형성해 엘리엇 매니지먼트를 지지할 의사를 보인다. 소액주주들은 10일 ‘삼성물산 소액주주 연대’라는 카페를 통해 이미 25만 주를 결집해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주총 의결 권한을 위임했다. 0.16%에 해당하는 작은 지분이지만 파장이 적지 않다. 합병 반대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이 더 널리 퍼지면 소액주주들의 결집 속도는 훨씬 더 빨라질 수 있다.

포인트 2:오리무중의 유권자(?) 투표 성향

합병 반대 선언 이후 주가가 오르면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단기 먹튀하고 퇴장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일단 폐기됐다. 이변이 없는 한 엘리엇은 합병 반대 가처분소송과 주주총회 표 대결 등을 통해 사태를 장기전으로 끌고 갈 태세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음달 17일로 예정된 주주총회다. 주총에서 합병 결의를 얻으려면 참석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의 지지와 전체 발행 주식 3분의 1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과반수 지지’가 아니기 때문에 주총 통과가 만만치 않다. 증권가에서는 주총 참석률 등을 고려할 때 삼성그룹이 최소한 전체 발행주식의 50% 정도는 확보해야 주총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성이 부린 꼼수가 다시 덫으로 작용한다. 삼성물산에 대한 삼성그룹의 지배력은 의외로 강하지 않다. 삼성그룹의 지분율은 19% 정도다. 게다가 이 중 5.76%는 주총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였다. 10일까지만 해도 삼성그룹의 지배력은 13%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그래서 삼성그룹이 합병을 시도한 것이다. 제일모직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은 이미 확실하니, 이번 합병을 통해 지배력이 약했던 삼성물산의 부(富)를 꿀꺽 삼키려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비를 당하고 보니 삼성물산에 대한 약한 지배력이 독이 돼버렸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지분율은 7.12%(3대 주주)다. 핵심 변수는 2대 주주(단일주주로는 1대 주주)인 국민연금(보유 지분이 9.79%)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삼성물산 뿐 아니라 제일모직의 주요 주주이기도 한 국민연금이 결국 삼성그룹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소액주주의 여론이 완전히 합병 반대로 기운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민연금의 각종 의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자문을 제공하는 자문기관 ‘서스틴베스트’가 10일 “두 회사 합병이 삼성물산 주주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반대 의사를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스틴베스트는 자문기관일 뿐이어서 국민연금이 이들의 의견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국민연금 스스로가 지정한 공식 자문기관의 의사가 이처럼 분명해졌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쉽사리 삼성그룹 손을 들어줄 명분이 크게 약화됐다. 게다가 서스틴베스트는 이 같은 입장을 국내 주요 기관투자자들에게 모두 돌리며 합병 반대를 독려했다. 서스틴베스트는 세계적 평가 기관인 서스테널리틱스(Sustainalytics)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한국 기업들에 대한 평가를 전 세계 200여 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회사다. 34%에 육박하는 삼성물산 외국인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충분한 계기가 된다. 게다가 삼성물산 지분을 2.05%나 들고 있는 일성신약이 엘리엇 지지를 공식화했다.

다급해진 삼성이 재벌 그룹인 KCC에 SOS를 요청했다. KCC가 삼성물산이 보유한 자사주 899만557주를 주주 확정일인 11일 장외거래를 통해 통째로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번 분쟁이 시작된 이후 KCC는 백기사를 자처하며 삼성물산 지분 0.2%(약 230억 원 안팎)를 매집, 합병 지원군으로 나섰다. 그리고 5.76%에 이르는 자사주까지 매입해 삼성의 뒷배를 봐주기로 했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재벌그룹의 지배구조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재벌들이 ‘가재는 게 편’ 식으로 구원투수를 자청해 위기를 넘겨 왔다. 이런 전통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전통의 재계 라이벌 현대가문 정 씨와 삼성가문 이 씨가 극적으로 손을 잡은 것이다.

물론 KCC가 제일모직의 주요 주주이기도 해서 합병을 성사시키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높이기 때문에 나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위해 KCC가 들여야 하는 돈은 자그마치 6000억 원이 넘는다. 삼성은 "KCC가 먼저 자사주 매입 요청을 해왔다"고 밝혔지만, 이 정도 규모의 거래가 '윗선의 합의' 없이 이뤄지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재벌의 재벌 지키기'라는 '재벌 연대'가 재현된 것이다. "자사주 매각은 없을 것"이라고 밝혀왔던 삼성은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감수하고 정 씨 가문에 도움을 받은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다는 뜻이다.

반면 재벌 가문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으면서, 삼성물산 지분을 2.05%나 들고 있는 일성신약은 엘리엇 지지를 공식화했다. 일성신약은 '재벌 연대'에 가담하는 대신 당당히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는 편에 섰다. 삼성-KCC의 재벌 연대가 성사됐지만 아직도 판세가 기울어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성그룹은 인맥을 총동원해 방어전에 나섰다. 삼성물산 최치훈 사장은 5일 직접 홍콩으로 날아가 주요 기관투자가인 네덜란드연기금(APG) 등 삼성물산에 투자한 장기투자 성향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을 접촉했다.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과 윤주화 제일모직 사장 등 그룹 내 재무통들도 때 아니게 여의도를 누비며 주요 기관투자가들의 설득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네덜란드연기금이 엘리엇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게다가 1% 내외로 삼성물산의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주요 자산운용사들이 공교롭게도 재벌 계열사가 아니라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주요 기관투자가인 베어링자산운용, 맥쿼리투자신탁운용, 슈로더투자신탁운용 등은 외국계 회사다. 트러스톤자산운용과 마회이다스에셋자산운용도 재벌의 이해관계에 얽매일 일이 없다. 주주총회의 표 대결이 오리무중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인트 3:‘이재용의 삼성’에 생채기가 나다

이런 복잡한 정황 탓에 늘 나오던 “결국 삼성이 이길 것”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편법을 쓴 놈’ vs ‘시비 걸어 돈 챙기려는 놈’ 사이의 싸움이 한국 사회에 던진 본질적 화두는 다른 데에 있다. 삼성은 돈을 아껴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고, 엘리엇은 그 틈에서 자신의 이해를 챙기려 했다. 그런데 이 ‘쩐의 전쟁’은 뜻밖에도 한국 사회에 “그래서, 삼성그룹이 이재용의 것이기는 한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져 놓았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관전 포인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호텔신라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임 임원 및 사장단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자료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호텔신라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임 임원 및 사장단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자료사진)ⓒ정의철 기자

‘이재용의 삼성’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상식에 가까웠다.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를 통해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에버랜드를 단돈 60억 원에 이재용 부회장에게 안겨주었을 때에도, 올해 삼성SDS를 상장해 이 부회장 3남매가 수 조원을 챙겼을 때에도, 심지어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등장하기 전 13조 순자산의 삼성물산을 5조 순자산의 제일모직과 1대 3의 비율로 합병하기로 했을 때에도, 세간의 민심은 “고약하긴 하지만 ‘이재용의 삼성’은 대세”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미국 국적의 벌처펀드 등장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제대로 세금도 내지 않고, 경영 능력도 검증 안 된 3세에게 한국의 대표 그룹을 통째로 넘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표 대결을 앞둔 삼성그룹은 무슨 짓을 해도 이 분위기를 막기 어려워졌다. 상장기업인 삼성물산이 회사 재산을 뒤로 빼돌려 엘리엇과 뒷거래를 할 수도 없다.

합병 비율을 재산정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일모직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합병 비율을 다시 조정한다는 자체가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이 불평등한 꼼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산정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앞으로 삼성그룹이 주도할 모든 합병에서 비슷한 저항을 받아야 한다.

삼성이 처한 이 모든 불편한 상황은 사실 제대로 된 납세 없이 그룹 경영권을 이재용 부회장에게 넘기려 한 탓이다. 이번 일전(一戰)으로 국부의 상당액이 미국계 벌처펀드에게 이전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졌다. 뼈아픈 일이지만 이제 그 일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부 유출의 아픔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국부를 유출하고도 잘못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공정한 방식으로 투명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삼성그룹과 한국의 재벌들은 막강한 실력으로 중무장한 벌처펀드,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등장으로 한국 사회도 스스로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질 의무가 생겼다. “과연 삼성그룹이 이대로 이재용의 것이 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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