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엘리엇 분쟁에 한미FTA가 변수라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야 정상인데 잘못하면 생선들끼리 싸움에 고래등이 터질 판이다. 삼성그룹과 벌처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엘리엇 측이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ISD는 말 그대로로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내는 소송이다. FTA 체결 당시부터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평가받으면서 야권 뿐 아니라 보수적인 법조계에서도 격한 비판을 받았다.

ISD는 ‘해외 투자자가 상대 국가의 법령이나 정책 등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국제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미 미국계 헤지펀드인 론스타가 “한국의 부당한 제도와 불합리한 과세로 손실을 입었다”며 2012년 5조 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아랍의 거부 만수르가 이끄는 석유회사 하노칼도 부당한 세금 추징을 이유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1800억 원 규모의 ISD 소송을 걸어놓은 상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는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이번 주 중반부터 ISD 가능성을 언론에 흘리며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벌처펀드인 엘리엇은 각종 국제 소송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린 ‘소송의 달인’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경우 그 명분을 두 가지로 본다.

론스타가 5조원 규모로 제기한 ISD소송이 시작된 지난달 14일, 민변은 론스타 ISD 쟁점설명회를 열고 ISD규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론스타가 5조원 규모로 제기한 ISD소송이 시작된 지난달 14일, 민변은 론스타 ISD 쟁점설명회를 열고 ISD규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제공: 뉴시스

가능성 1:자본시장법 자체가 잘못됐다는 주장

엘리엇이 “한국의 부당한 법체계, 혹은 한국 정부의 부당한 행위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목은 합병 비율을 산정하는 자본시장법이다. 대부분 선진국들은 합병을 할 때 합병 비율을 주가 뿐 아니라 두 회사가 보유한 순자산을 계산해 함께 기준으로 삼는다. 미국도 이 기준을 따르고,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한국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시가총액만을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한다.

이런 법 조항 때문에 이번 합병에서 순자산 규모로는 제일모직에 비해 두 배 반가량이나 큰 삼성물산이 거꾸로 제일모직에 비해 3분의 1의 가치로 평가된 것이다. 시가총액이란 결국 주가로 결정되는 것인데, 주가는 인위적인 조작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주가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경계한다. 따라서 엘리엇이 이 대목을 소송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국내 법조계에서는 자본시장법이 ISD 소송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엘리엇이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낮은 편으로 본다.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식을 매집하던 시점에 법이 변경됐거나, 한국 정부가 특별한 변화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엘리엇도 한국의 자본시장법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투자를 결정했기 때문에 뒤늦게 이 법 조항을 문제 삼기가 옹색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가능성 2:국민연금의 결정이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라는 주장

그런데 삼성과 엘리엇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국민연금의 결정이 향후 ISD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게다가 자본시장법을 걸고넘어지는 것보다는 이 방식이 엘리엇에게 한결 승산이 높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음달 17일로 예정된 주주총회에서 삼성그룹과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숙명의 표 대결을 벌여야 한다. 백기사 KCC의 도움으로 삼성그룹은 일단 합병에 찬성하는 지분을 20% 가까이 확보했다. 반면 7%를 웃도는 지분을 확보한 엘리엇 측은 소액주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12일 세계 2위의 연기금인 네덜란드 APG 그룹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식화했다. APG의 삼성물산 지분은 0.3%에 불과하지만 전체 운용자산이 4860억 달러에 달해 외국인 투자자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표 대결의 향방은 사실상 2대 주주인 국민연금(보유지분 9.79%)의 결정에 따라 갈라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국제적 투자 자문기관인 서스틴베스트가 합병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번 반대 의사가 국민연금의 자문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이 회사가 과거 국민연금의 자문기관이었고 지금도 비정기적 자문을 수행하는 점에서 비중이 적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실상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한다면 엘리엇으로서는 충분히 “한국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할 명분을 얻는다.

사법주권 침해하는 ISD의 문제점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함구로 일관 중이다. 법무부, 외교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 관련 부처는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ISD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지금으로서는 대답하기 어렵다”고만 답한다.

하지만 ‘소송의 달인’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사태를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ISD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승소 가능성과는 별개로 최대한 문제를 확대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미FTA체결 당시 시민사회 및 농민단체 회원들이 서울광장에서 한미FTA 전면재협상 및 ISD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및 108배를 벌였다.(지료사진)
한미FTA체결 당시 시민사회 및 농민단체 회원들이 서울광장에서 한미FTA 전면재협상 및 ISD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및 108배를 벌였다.(지료사진)ⓒ이승빈 기자

ISD는 FTA 체결 당시부터 반대론자들로부터 “반드시 재협상을 해야 하는 조항”이라는 지적을 숱하게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ISD는 전 세계 2500여 개 투자관련 국제협정에 규정된 국제표준”이라며 이를 밀어붙였다.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도 2013년 3월 법무부 장관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서에서 “한미 FTA의 ISD가 사법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통상위원회 김종보 변호사는 “승소 여부를 떠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나 자본시장법 내용 자체가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소송 대상이 ‘상대 국가의 법령이나 정책’으로 워낙 광범위해 전례 없는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례가 없다보니 정부 차원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 김 변호사는 “엘리엇이 ISD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으나, 바로 그 ‘전망이 확실치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ISD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한국의 사법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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