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창의 철학산책] 심플레가데스의 해협 -영화 ‘미스 줄리’를 보고
영화 미스 줄리
영화 미스 줄리ⓒ영화 미스 줄리 스틸 컷

1)실내악적 영화

배우 리브 울만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녀는 세계적 감독인 잉마르 베리만의 애인이며, 그의 수많은 영화들의 주역이었다. 베리만의 영화 가운데서도 특히 ‘안나의 열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는 애착을 그녀가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잊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영화 ‘미스 줄리’(2014년)의 감독이라 한다. 급히 찾아보니, 그녀는 이미 1992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녀는 2000년에는 ‘트로로싸(faithless; 불륜)’이라는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적이 있다 한다. 그녀가 1938년 태생이니, 영화 ‘미스 줄리’는 그녀가 70세가 거의 다 되어 만든 영화이다. 그녀가 겪은 삶의 모든 체험이 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애인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오래 동안 호흡을 함께 했던 탓인지 그녀의 영화 곳곳에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흔적이 배어있다. 특히 잉마르 베리만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연극적 영화 또는 ‘실내악적 영화’의 특징은 그녀의 영화에서도 완연하게 드러난다. 간결한 상징적 무대, 제한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 소수의 인물이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 전개하는 심리적인 갈등이 바로 실내악적 영화의 특징들이다. 이런 실내악적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갈등의 토대가 되는 사건 예를 들자면 근친상간이나 불륜과 전쟁 등은 그저 어느 구석에 조그맣게 암시될 뿐이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세계적인 극작가 스트린드베리는 같은 스웨덴 출신이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자신의 실내악적 영화라는 개념이 스트린드베리의 실내악적 연극이라는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미스 줄리’의 원작 역시 스트린드베리가 실내악적인 방식으로 창작한 작품이니, 리브 울만이 이 영화에 부여한 실내악적 영화라는 개념은 원작의 분위기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2)오필리아를 닮은 자살

영화 ‘미스 줄리’에는 원작에 없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덧붙여 있다. 프롤로그에서 소녀는 어머니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소녀는 꽉 닫힌 집을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소녀는 숲 속에 흐르는 개울에 이르러 꽃잎을 따 물에 흘러 보낸다. 프롤로그의 이 장면은 에필로그에서 반복된다. 미스 줄리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어 나온다. 그녀가 닫힌 문을 열자 밝은 빛이 쏟아진다. 그녀는 숲 속으로 들어가 개울가에 이른다. 개울 물 위에는 떨어진 꽃잎이 물을 따라 흐른다. 고요히 개울물을 따라 떨어진 꽃잎이 흐르고 그녀의 손목에서 나오는 핏물이 번지는 가운데 영화는 끝난다. 그녀의 자살은 마치 섹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자살 장면과 닮았다.

이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작품에 대한 리브 울만의 해석을 암시한다. 숲과 꽃, 개울로 표현된 자연은 밝고 고요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장소이다. 이 자연은 사건의 무대가 되는 남작의 집 그리고 부엌과 대비된다. 두터운 문으로 닫혀 있으며, 어둡고 칙칙하게 묘사된 부엌은 굴욕적인 세계이며 억압된 욕망이 꿈틀거리지만 잔인하게 제거되는 야비한 현실의 세계이다.

감독 리브 울만은 이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두 세계를 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원작 ‘미스 줄리’에 대한 리브 울만의 해석이 과연 적절한 해석인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추가된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어머니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의 충동’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의 작품 세계는 흔히 네 가지 시기로 구분되는 것 같다. 네 가지 시기란 소위 자유주의 개혁사상 시기(1872-1875)와 인민주의 시기(1875-1885)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작품의 시기(1886-1889)와 상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작품의 시기(1890-죽음)이다. 이런 네 시기 가운데 ‘미스 줄리’는 세 번째 자연주의 시기의 작품이며 따라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흔히 자연주의적 작품이라면 억압적인 현실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간의 내적 근원적 욕망을 그리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원작 ‘미스 줄리’ 역시 두 주인공인 장과 줄리의 억눌린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영화 ‘미스 줄리’는 이런 자연주의적 요소에 덧붙여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라는 요소를 중첩시킴으로써 아주 복합적인 미스 줄리의 성격을 창조했다고 생각된다.

3)자서전적 요소

평론가들은 스트린드베리의 원작은 자서전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작에서 하인 장과 미스 줄리의 사이는 하녀의 아들인 스트린드베리와 귀족의 딸인 시리의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현실에서 스트린드베리가 시리에 대해 집착을 보였던 반면 연극에서는 줄리가 하인 장에 의해 파멸된다. 그런데 영화 ‘미스 줄리’에는 스트린드베리의 또 다른 자서전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스트린드베리의 생애에 관한 여러 저서들에 따르면, 스트린드베리는 어릴 때 형들에 대해 적대감을 자주 표현했다 한다. 더구나 병약한 어머니는 그가 열세 살 때 폐결핵으로 죽었다. 어머니 사후 그의 집안의 집사로 일했던 계모에 대해 그는 심한 반감을 가졌으며, 사업의 실패 이후 집안의 폭군이 된 아버지에 대해서도 증오감을 가져 나중에 의절하기도 했다. 이런 스트린드베리의 개인적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갈망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갈망은 후일 그가 시리에 대해 집착한 이유나 시리와 헤어진 이후 편집증에 걸린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브 울만은 스트린드베리의 생애에 나타나는 어머니에 대한 갈망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것이 그녀가 원작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인 이유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미스 줄리의 역을 맡은 배우 제시카 챠스테인의 연기이다. 주인공 줄리는 다양한 모순적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줄리는 귀족의 무기력함과 신분적 우월감,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자유롭고 독립적이고자 하는 욕망, 여성으로서 보호받으려는 욕망과 지배하려는 욕망 등을 지닌다. 이런 복합적인 모순적 성격을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챠스테인은 이런 성격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스테인의 용모에는 창백함과 섹시함,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마도 그녀가 지닌 이런 이중적이며 다면적인 용모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연기 가운데 특히 마지막 시컨스에서의 연기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인 장이 줄리가 들고 온 새를 난도질 한 이후 줄리는 온몸의 거친 동작으로 격렬한 분노와 증오를 쏟아낸다. 그때 하녀 케서린(원작에는 크리스티)이 들어오자, 태도가 돌변한 줄리는 케서린을 향해 자기들과 함께 도주하자고 말한다. 이때 줄리는 자신도 믿지 않는 이런 계획을 마치 들뜬 것처럼 말하다가 점차 스스로 주저하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간다. 이런 줄리의 내면의 변화를 챠스테인은 반쯤 감은 눈과 더듬거리는 대사로 표현한다. 케서린이 결국 교회로 가버리자 줄리는 절망에 헤어나지 못하면서 장에게 자기에게 명령을 하라고 말한다. 이때 챠스테인의 대사는 거의 분열증적으로 단편화된다. 이런 챠스테인의 연기에 관해 신들린 듯한 연기라고 말하는 것 더 이상으로 표현할 말이 없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의 끝에 줄리가 어두운 통로를 거쳐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장면을 보라. 감독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에서 점차 멀어지는 줄리의 뒷모습을 찍었다. 이때 챠스테인 은 오직 걸음 거리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챠스테인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면도칼을 쥔 손을 떨면서 죽음을 향해 걸어 나간다. 그녀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줄리가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어떤 환한 빛을 향해 나가는 듯한 줄리의 단호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5)새의 장면

영화 미스 줄리
영화 미스 줄리ⓒ영화 미스 줄리 포스터

사건은 단순하다. 세례 요한의 축일 전야제에서 하인 장이 귀족의 딸 준리를 범한다. 그 결과 줄리는 자살하게 된다. 이런 사건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는다. 우선 사건을 계급관계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하인인 장이 귀족의 딸 줄리를 넘보았다는 사실이 신분질서가 억압적으로 작용했던 시대에서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장의 내면에 억압된 욕망이 비극을 야기한 원인이 될 것이다. 줄리는 순진한 존재로 그려지며 이런 욕망의 비참한 희생물이 된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페미니즘의 입장에 선 해석이다. 이 경우 줄리는 적극적으로 장을 통해 자신을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런 욕망은 억압된 육체적 욕망일 것이다. 줄리의 적극적 행동은 여성을 억압했던 시대에서는 필연적으로 파멸을 낳지만 줄리는 기꺼이 파멸을 감수한다. 반면 장은 현명하게 현실을 택한다. 그로서는 현실을 즐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밖에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리브 울만의 해석은 줄리의 어머니에 대한 갈망과 이로부터 나오는 죽음에의 충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기왕의 자연주의적 해석과 무리 없이 결합될 수 있을까?

줄리의 죽음에 대한 충동은 원작에서도 여러 번 암시되었다. 우선 줄리의 하강하는 꿈이다.

“나는 둥근 기둥 위에 올라가 앉아서 이제는 다시 내려갈 가망이 없게 되었어. 밑을 내려다 보면 눈이 어지러운데, 그래도 내려가기는 해야 하고, 그렇다고 떨어져 볼 용기는 나지가 않아.”(원작)

또한 장이 해외로 도피하여 호텔을 경영하자고 제안할 때도 줄리의 죽음에의 충동이 드러난다. 줄리는 장의 계획을 듣지만, 그 계획에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런 부르주아적인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줄리는 대신 이렇게 제안한다.

“나하고 같이 죽지 않을 테야?” (원작)

이렇게 죽음의 충동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이런 죽음의 충동이 어머니에 대한 갈망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새의 장면에 있다. 줄리가 도주하기 위해 아버지의 서랍을 깨서 돈을 훔치고, 오직 새가 든 조롱 하나만 들고 장이 있는 부엌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장의 분노가 솟구친다.

이 장면에서 원작에서는 줄리가 새를 건네주면서 “그래 줘, 그렇지만 아프지는 않게 해! 아니 안 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장에서 새를 꺼내 키스를 하는 도중에 장이 새를 빼앗아 식칼로 난도질 한다. 영화 속에서는 장이 줄리로부터 바로 새를 빼앗아서 난도질하지만 원작과 의미상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새가 난도질당하자 줄리의 태도는 격변한다. 줄리는 장에 대해 분노와 증오를 쏟아 놓는다. 그것은 그저 새를 살해하는 데서 장이 보여준 난폭함 때문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도한 분노와 증오를 이해하기 위해 이 장면에서 새가 줄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자.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빌리자면 새는 줄리에게 ‘팔루스’에 해당된다고 말 할 수 있다. 팔루스 곧 남근이란 뜻이지만 실제의 남근이라기보다 심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런 팔루스란 아이가 자기 몸에서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팔루스는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자기의 보물이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면서 이런 팔루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아이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 오이디푸스 국면에서 팔루스가 거세됨으로써 아이는 이런 성인의 길로 나간다.

따라서 팔루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제거하고 싶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제거된다면 자신의 보물을 상실하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 드는 대상이다. 줄리가 들고 온 새는 원작이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줄리는 이 새를 제거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동시에 이 새가 제거되자 엄청난 분노를 터뜨린다. 이런 이중성은 팔루스에 대한 아이의 이중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줄리에게서 새는 곧 자신의 팔루스이며, 줄리의 분노와 증오는 자신의 팔루스에 대한 상실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줄리의 분노와 증오는 오래 가지 않는다. 곧 이어서 케서린이 들어오자, 줄리는 케서린에게 함께 도주하자고 설득한다. 물론 자기 자신도 믿지는 않지만 마치 들뜬 듯이 여행과 호텔 경영의 즐거움을 쏟아낸다. 줄리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하는 것을 보면 줄리의 분노와 증오가 팔루스의 상실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7)심플레가데스의 해협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줄리가 아버지를 무기력한 자로 묘사한 것이 이해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거세의 능력을 상실한 자이다. 아버지의 무기력은 어머니에 대한 갈망을 더욱 야기한다. 반면 장은 난폭한 힘을 가지고 줄리의 새를 제거함으로써 줄리가 내심으로 원했던 거세를 수행한다. 장이야 말로 진정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두 세계 속에서 부유한다.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합리적이지만 쾌락이 상실된 세계이다. 이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이다. 다른 세계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아이가 자기를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쾌락의 세계이며 곧 죽음의 충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간은 쾌락이 결여된 법의 세계 속에 살아갈 수도 없다. 동시에 나르시시즘이 지배하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살 수도 없다. 영원히 두 세계 속에서 방랑하면서 두 세계 사이를 빠져나간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의 배이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두 암벽이 부딪히는 심플레가데스 해협을 지나가는 배이다.

영화에서 줄리는 이미 장이 말한 달콤한 사랑이 거짓이며 장이 그려낸 활기 있는 삶이 부르주아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장이 그려낸 세계가 난폭한 폭력이 지배하며, 장이 그 속에 노예적인 근성을 가지고 붙어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으로부터 그녀는 어머니의 갈망과 죽음에의 충동이 지배했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최종적인 노력을 포기한다. 그녀는 자신을 지배해온 죽음의 충동을 고요하게 받아들인다. 줄리의 이런 내면의 변화는 챠스테인이 연기한 분열증적 동작과 대사와 일치한다. 햄릿의 대사를 연상시키는 줄리의 마지막 대사는 인간 삶이 심플레가데스 해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뉘우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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