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gory Elich 칼럼] 비탄에 빠진 세계 : 유고 전쟁 16주년(5)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나갈 때,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이 경계를 넘어 쏟아져 들어왔다. KLA는 독립된 코소보에서 다른 모든 외국인들을 몰아내는 그들의 꿈을 실현 시키는데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이 민족 혐오주의자들의 예봉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 중에는 보통 집시로 알려진 이들도 있었다. 나토 코소보 평화유지군(KROR, Nato’s Kosovo Force)의 비호아래, 코소보 해방군은 아무 제약 없이 그들의 손아귀에든 비 알바니아계와 분리주의에 반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구타, 고문, 살해하는 학살 프로그램에 착수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 나는 코소보의 고향에서 내몰려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사절단의 멤버가 됐다. 우리는 언제나 수수방관하는 나토 평화유지군 앞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공격이 가해졌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반면 나토 평화유지군과 외국인 혐오증에 걸린 코소보 해방군의 관계는 서로 매우 따뜻하고 협조적이었다.

다민족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던 알바니아인들과, 심지어 우체부처럼 기존 정부기관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공격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우리는 나토 평화유지군이 오기 전까지 코소보의 유고슬라비아 정부기관에서 일했던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 그는 15만 명의 극단주의적 관점을 거부하는 알바니아인들이 쫓겨났다고 말해줬다. 벨그라데(Belgrade)에서 얘기를 나눈 알바니아인은 안전만 보장된다면 코소보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분노보다 큰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침입한 코소보 해방군의 기관총 세례에 목숨을 잃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잊혀진 피난민들

일반적으로, 서방세계는 ‘잘못된’ 인종주의에 의한 피난민들에 대해 무지했다. 이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우리는 벨그라데의 황폐한 변방에 있는 제문(Zemun)에서 ‘세르비아 공화국 집시 연합(Assocation of Romani Organizations of the Rupublic of Serbia)’의 총재 요반 다미야노비치(Jovan Dmajanovich)를 만났다. 열정적인 남자인 다미야노비치는 그들 공동체가 코소보 해방군 치하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줬다. 집시들의 상황은 끔찍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서방세계의 가혹한 수탈에 착취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전쟁에서 생겨난 수천수백의 피난민들은 물론 갑작스레 유입된 또 다른 수천수백의 피난민들에 직면했다.

우리는 도시의 변두리 제문 폴리에(Zemun Polje)에 있는 집시 정착촌으로 이끌리어 갔다. 집시지역 거주민들은 5천명 이상의 피난민들을 그들의 집에 수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형편에 크나큰 부담을 줬다. 그들은 그들 곁으로 몰려온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차가 정착지 끄트머리에 세워졌을 때 수많은 군중이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는 코소보에서 피난 온 집시들과 이집트인들을 인터뷰했다. 테피크 크라시치(Tepiq Krashich)는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오블리치(Oblich)에서 이곳으로 데려왔다. 두달동안 그들 가족은 이 지역의 가족들이 자리를 내줄때까지 잠잘곳도 없었다. 그들은 피난처를 얻었지만 삶은 여전히 어렵다. “우리는 음식이 없어요” 크라시치는 말했다, “우리는 굶주리고 있어요. 우리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구걸하고 있어요”. 푸초 레제자(Puzho Rezhezha)도 위협 때문에 그의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푸초의 형제가 살해당한 뒤로, 코소보 해방군은 그의 가족이 코소보를 떠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우리는 몇 명을 더 인터뷰했지만 그들의 사연은 대개 비슷했고 곧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들은 이성을 잃었고 다미야노비치가 급히 인터뷰를 중단시켜야 했다. 우리의 차가 정착지의 진흙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아이들은 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재미있게 우리들의 뒤를 쫓아왔다. 우리는 두 소년이 주먹을 치켜들면서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구호를 외칠 때 속도를 높여 지나쳤다.

코소보 피난민 엘라스 라크마니(Elas Raqmani)
코소보 피난민 엘라스 라크마니(Elas Raqmani)ⓒ제공: Gregory Elich

다음날, 다미야노비치는 제문의 중심부에서 인터뷰 할 수 있게 준비해 줬다. 우리는 카메라를 세팅하기도 전에 피난민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분노에 찬 채 그들의 애기를 들려주고 다른 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려 했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덥고 군중들이 우리를 둘러싸면서 나는 등에 땀이 쏟아졌다. 집시 연맹의 부총재인 에스트레프 람다노비치(Estref Ramdanovich)는 코소보의 집시 15만 명 중 12만 명이 코소보 해방군에 쫓겨났다고 알려줬다. 그는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은 알바니아인 외에 코소보에 다른 민족 집단을 원하지 않았어요”라고 설명했다. 람다노비치도 20명이라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안으로 들이는 엄청난 희생을 한 사람이다.

요반 다미아노비치는 감정이 솟구쳐서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나 많은 피난민들이 길거리에, 버스 정류장에, 기차역에, 공원에 있습니까!” 그는 의료구호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곧 겨울이 닥칩니다. 국제기구들은 더 이상 그들의 발밑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대해 장님과 귀머거리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대재앙입니다. 코소보 해방군은 집만 불태우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들만 쫓아내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인종이 청소된 코소보를 원합니다. UN을 기반으로 한 국제사회가 인간성이 남아있고 문명이 남아있다면 뭔가를 해야합니다. 우리는 국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염산을 뿌리고 아이들을 살해한 코소보 해방군

내게는 소위 “국제사회”-세계 대부분의 인구를 배재하고 미국과 서유럽의 이해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을 말하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진 이 난민들을 계속 무시한다는 것이 놀라울 게 없었다. 제문을 방문한지 일주일이 조금 지나서 우리는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카(Kosovska Mitrovica)에 있는 집시 사회의 리더인 누르셋 사이티(Nurset Saiti)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세 채만을 남기고 99퍼센트가 넘는 집시들의 집이 불탔다. 코소보 해방군이 건물 재료를 무너진 집들에서 골라내고 있었지만 나토 평화유지군은 그들을 멈추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토가 점령하고 일 년 반 동안 800명의 집시가 사망하거나 실종됐지만 서방 당국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코소보에서는 대부분의 집시들이 지역에서 쫓겨나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원시적이고 허술한 피난민 캠프가 보호속에서 세워졌다.

우리는 피난민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코소보에서 철수하자마자 코소보 해방군이 나타났다고 그들은 말했다. 바로샤 아메티(Bajrosha Ahmeti)는 분노에 불타며 말했다. “코소보 해방군이 내딸 에니사(Enisa)를 강간했어요. 밤에 우리가 집에서 자고 있을 때, 그들은 쳐들어와서는 내 딸을 끌고 가서 강간했어요” 코소보 해방군 패거리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짐도 싸지 못한 채 집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내가 가진 단벌옷이에요. 나는 식량도 없고, 잘 곳도 없어요”그녀가 말했다. “내가 길거리에서 자야 하나요? 아이들은 밤에 깨어나서 ‘엄마, 어마’를 불러요. 그들은 잠자지도 먹지도 못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줄게 없어요”

아드난 베리샤(Adnan Berisha)와 그의 아내는 코소보 해방군에게 고문당했다. 그는 얼굴과 팔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의 아내를 가리켰다. 그녀에게는 염산이 뿌려졌다. 그러나 그것의 가족의 비극의 끝이 아니었고 코소보 해방군은 베리샤 부부의 12살 아들을 살해했다. 아이를 죽인 다음 코소보 해방군은 그들 부부와 손자를 집밖으로 던진 다음 그들 가족들이 가진 것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코소보 해방군은 우리가 집을 떠나는데 3시간 밖에 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30분이라도 더 늦으면 우리를 죽일거라고 했어요. 3시간 만에 코소보를 떠난 후 나는 군인들이 나를 죽일까봐 돌아갈 수 없어요” 돈이나 자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지역을 떠난 여행은 힘들었다. 손자를 보면서 아드난은 말했다. “3개월 밖에 안된 이 어린아이가 알바니아인 구역을 벗어나는 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우리는 니쉬(Nish)로 갔지만 아기에게 줄 물과 음식이 없었어요” 아드난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 그의 아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살해당한 소년의 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고통스런 정적이 흘렀다. 아드난은 작지만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슬퍼요. 슬픈 세계에요”.

네 명의 코소보 해방군 병사가 엘라스 라크마니(Elas Raqmani)의 집에 어느날 아침 6시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둘은 소총으로 둘은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은 집에 있던 모든 가구들을 가져갔어요”그가 이야기했다. “내 스토브와 세척기, 냉장고, 냉동기를 가져갔어요. 우리는 보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알바니아 인들이 내 눈앞에서 내 것들을 가져가는 것을 쳐다볼 수 없었어요” 침입자들은 그후 그들 가족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라크마니는 불과 얼마 후에 많은 숫자의 이웃이 살해당한 것을 알았다. 라크마니는 그가 50년 동안 일했으며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매우 잘 살았다. 그의 아내는 이제 매일 시장에 가던 횟수도 줄이고 팔다 남은 채소를 찾아다닌다.

라크마니가 분노를 표현하면서 얘기하자 분노의 감정이 군중들 사이에 일어났다. “우리는 코소보를 빼앗겼어요. 나는 미국인들에게 반감이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 결정에 대해서는 미친 것 같은 분노를 일으켜요. 모든 사람들-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 집시-의 권리는 사라졌어요.” 앞에 있는 탁자를 치면서 라크마니는 외쳤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들, 군인들, 그냥 앉아 있었어요. 당신들은 여기 도우러 왔나요 아니면 이 서커스가 계속되는 걸 구경하러 왔나요? 지금의 사건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어.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한 일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들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면, 그들이 도와주고 있는지 한 번 보여줘요.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면 세르비아 인들과 집시들은 모두 짓밟힐 거에요! 그들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요!”

코소보 피난민 바료사 아메티(Baryosha Ahmeti)
코소보 피난민 바료사 아메티(Baryosha Ahmeti)ⓒ제공: Gregory Elich

아즈샤 샤틸리(Ajsha Sahtili)는 그녀의 어린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물러난 지 불과 며칠 뒤인 6월 19일 그녀가 쫓겨났던 일을 말해줬다. “코소보 해방군은 내 아이들을 집밖으로 끌어내고 가구들을 모조리 가져갔어요. 나는 영국인 나토 평화유지군 3명을 도와달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오기만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단지 ”울지 마세요, 다 잘될 거에요“라고 말할 뿐이었어요. 그녀의 아들이 약탈을 막으려고 하자 병사들은 등에 칼을 찔러 부상을 입혔다.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은 가져가고 싶은 것을 다 꺼내고나자 나토평화유지군이 멀뚱멀뚱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집을 불태웠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녀는 코소보에서 쫓겨나올 때 입고 있던 옷 한 벌 만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도, 그녀의 친척과 친구들 모두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코소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녀는 설명했다. 만약 코소보를 탈출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물어보자 샤틸리는 고통에 가득찬 울부짖는 목소리로 답했다. ”모두가 죽었을 거에요! 모두가!“

다섯명의 코소보 해방군이 하심 베리샤(Hashim Berisha)의 집으로 쳐들어와 유고슬라비아 병사인 그의 형제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하심은 그의 형제에 대해 실토하지 않으면 모든 가족이 죽는다고 협박받았다. 그는 그의 자매의 집으로 찾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 그의 자매는 곧바로 영국 나토평화유지군 사령부로 뛰어가 사건을 고발했지만 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녀가 죽지 않으려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알려줬을 뿐이다. 다음날, 하심은 몰래 그의 집으로 가 봤고 집이 불타 쓰러진 것을 봤다. 코소보 해방군은 결국 하심의 형제를 찾아냈고 무참하게 두들겨 팼다. 그는 무사히 목숨은 건졌다. 이후, 하심의 형제는 프리쉬티나(Prishtina)에 있는 나토 평화유지군의 사령부로 가 그의 얘기를 말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의 통역자는 코소보 해방군의 동조자였고 통역 중에도 그의 얘기에 전혀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가족들을 모아 코소보를 떠나야했다.

코소보 해방군이 우로셰바치(Uroshevac)의 모든 집들을 약탈하자, 압둘라 셰픽(Abdullah Shefik)은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셰픽은 11명의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모아 최소한의 짐과 함께 그의 밴 안에 우겨넣었다. 그는 코소보를 벗어나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지만 코소보 해방군의 도로차단벽과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코소보 해방군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밴에서 모두 내리도록 했어요. 나토 평화유지군은 근처에 서 있으면서 내 밴이 강탈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어요.” 그들은 미군 소속 부대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도 아무 말도 안했어요.”

베솃 코테시(Bechet Koteshi)는 영국과 프랑스 나토 평화유지군이 그닐라네(Gnjilnane)로 진입한 이후,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이 도시로 들이닥쳐 세르비아인들과 집시들은 공격했다고 말했다. “평화유지군은 도시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러나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했어요” 코테시는 총격이 시작될 때 약국 안에 있었다. 그는 급히 그곳을 떠나 최대한 빨리 자전거를 몰았다. “나보다 300미터쯤 뒤에 다른 남자가 자전거를 몰고 있었어요. 코소보 해방군은 수류탄을 던져 그 남자를 죽였어요,” 몇 주가 지나고, 코테시는 몰래 코소보로 숨어들어와 아버지의 상황을 챙겼다. 그의 아버지는 코소보 해방군에 집이 불탄 후 텐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은 전기도 물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생활이 정말 힘들었어요.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이 캠프로 들어와 난민들에게 소리를 쳐댔어요. 그래서 난민들은 공포에 떨면서 텐트를 걷을 수밖에 없었죠.”

“왜 테러리스트와 나토군이 끌어안고 자축하나”

나토는 우리나 다른 단체들이 행한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테러 행위의 공범으로 입증됐다. 나토의 역할을 집시 활동가 샤니 리파티(Shani Rifati)의 피난민 인터뷰에 요약됐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폭격이 중단되고 나서, 우리 가족은 코소보로 돌아왔어요. 우리는 코소보 해방군과 나토 평화유지군 병사들이 코소보에 도착한 것을 자축하며 서로 끌어안는 것을 봤어요.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싶었어요! 왜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이 평화유지군과 포옹을 하는 거죠? 나는 이곳이 지옥이 될 거란 걸 깨달았어요. 3일 안으로, 모든 비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를 떠나야 했어요. 내 집은 평화유지군이 보는 앞에서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불탔어요. 나는 소위 외국에서 온 평화의 수호자란 사람들에게 내 집이 불탄 것을 알려줬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했어요. 내 친구의 자매는 알바니아인에게 강간당했고 평화유지군의 장교에게 신고했지만 그도 괜찮다고 했어요. 내 이웃은 아이가 납치당했고 그의 부인이 평화유지군에 신고했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했어요. 코소보 해방군은 내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을 데려다가 고문실에 보냈고 그 부인들이 그것을 신고했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했어요. 코소보 해방군과 알바니아인들이 집시들을 죽였지만 그들은 그것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게 진짜 괜찮은 건가요? 우리는 집에서 5분 만에 쫓겨났어요.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은 집으로 와서 5분 안에 집에서 나가라고 하곤 집을 불태워 버렸어요.

제문 폴리(Zemun Polje)에서 만난 집시 피난민
제문 폴리(Zemun Polje)에서 만난 집시 피난민ⓒ제공: Gregory Elich

집시 지도자 요반 다미야노비치는 코소보 해방군의 일련의 테러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외국군 주둔의 정당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50년 전 나치에 시나리오에 의한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 집시들의 대탈출이 오느날에도 계속 이어졌다” 다미야노비치의 호소는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행이 금지되고 해외계좌가 몰수되는 유럽연합과 미국의 제재대상에 추가됐다.

우리는 코소보 지역의 유고슬라비아 정부 관리였던 바이람 할리티(Bajram Haliti)를 만났다. 나토가 점령하기 전까지 코소보 정부에서 그의 역할은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정보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할리티는 신사적이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 학구적인 사람이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라고 묘사하는 것에 대해 호감이 갔다. 할리티는 시인이었고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집시 대학살을 다룬 『집시:가혹한 운명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연구서도 출판했다. 코소보에 있던 그의 집에 있는 서재는 이 주제와 관련 전 세계에 걸친 5백 권이 넘는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은 할리티의 집을 불태웠고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책들과 서재도 화염에 불타 없어졌다. “나는 그 서재에 값을 매길 수가 없어요” 그가 슬프게 말했다.

“집시들은 아주 힘든 상황에 있어요” 할리티가 말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1939년에 처한 상황과 같아요. 그 당시, 히틀러는 그의 영역 안의 모든 유대인을 박해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하심 타키(Hashim Thaci, 코소보 해방군의 리더이자 현 코소보 외무 장관)에게 당하고 있죠. 집시들의 집은 불타고 집시들은 코소보 해방군에게 쫓겨나고 있어요.” 1999년 5월 초, 할리티는 미 대통령 클린턴에게 전쟁종식을 요청하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오직 평화적인 수단만이 코소보와 메토히야(Metohija, 코소보 서남부)에 모든 민족 공동체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의 편지는 워싱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할리티는 첫 번째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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