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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부터/과거부터 전환
최신부터/과거부터 전환
    과거 오랜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누군가는 독재의 힘을 누렸고 누군가는 그에 맞서 싸웠다. 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고 후자는 박래군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박근혜 대통령과 박래군 위원은 국가보안법과 통합진보당 해산, 세월호 참사를 두고 격돌했다.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있던 박래군 위원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죄’로 7월 17일 구속됐다. 박래군 위원은 평소 대중 강연에서 자신에 대해 ‘별이 11개’라고 소개하곤 했다.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을 거치며 쌓은 전과가 그만큼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월호 참사로 별 하나가 더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과 방패는 언제라도 방패와 창으로 바뀔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두 사람의 상반된 인생을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 1963년 월 일
    박근혜 - 청와대에서 자란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퍼스트 레이디로 어린이들과 시간을 함께하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퍼스트 레이디로 어린이들과 시간을 함께하는 모습ⓒ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삶을 살았다. 장기집권을 꿈꿨던 아버지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또 1970년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전자공학과(서강대)를 택해 대학에 진학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1974년 세상을 떠난 뒤 5년여 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로 살기도 했다. 그의 청와대 생활은 1979년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15년 만에 마감됐다.

  • 1979년 월 일
    박근혜 - 전두환에게 받은 6억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후보는 2012년 대선 당시 후보 TV토론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전두환으로부터 6억원을 수령한 사실을 폭로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후보는 2012년 대선 당시 후보 TV토론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전두환으로부터 6억원을 수령한 사실을 폭로했다.ⓒ뉴시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차지하게 됐다. 군사독재의 연속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했다며 당시 6억원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12월 대선후보 TV토론회 때 이 문제가 제기되자 “아버지께서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과 살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경황없는 중에 받았다. 나중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여세를 냈느냐’는 지적에는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의 처리를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이 알아서 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다”고 해명했다. 결국 증여세나 취득세 납부 여부 자체를 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받았던 6억원은 지금도 환원되지 않았다.

  • 1986년 월 일
    박래군 - 군사독재에 맞선 열혈 대학생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이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이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1986년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박래군 위원은 5월 30일 광주항쟁 주간을 맞아 ‘군사독재’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에 항의하고자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농성’을 벌였다. 그때 내건 구호는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였다. 광주 학살의 공범인 미국에 대한 노동자의 분노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때 박래군 위원은 ‘선동’ 역할을 맡아 창틀에 올라가 주로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가 경찰에 밀려 2층에서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장면이 전국적으로 TV를 통해 방영됐고, 시골의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 일로 구속됐다가 다음 해 6월항쟁 덕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1988년 월 일
    박래군 - 동생이자 동지인 박래전의 죽음
    박래전 열사의 형인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박래전 19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박래전 열사의 형인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박래전 19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전문수기자

    박래군 위원에겐 우애 깊은 두 살 아래 동생 박래전 씨가 있었다. 형제는 함께 거리로 나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는 동지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던 1988년 6월 어느 날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동생 박래전 씨가 학교 옥상 위로 올라가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시너를 부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동생은 병원에서 붕대에 싸인 채 눈을 감았다. 당시 동생은 스물여섯 살이었고, 형인 박래군 위원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는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옆에 동생을 묻으며 “네 몫까지 독하게 마음 먹고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박래군 위원은 그 사건 이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 1994년 월 일
    박래군 - 한국사회에 분 인권운동 바람
    1일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48~1970)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1929~2011) 1주기를 맞이해 고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머니' 추모상영회에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어머니 포스터를 보고 있다.
    1일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48~1970)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1929~2011) 1주기를 맞이해 고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머니' 추모상영회에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어머니 포스터를 보고 있다.ⓒ김철수 기자

    유가족이 된 박래군 위원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권유로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찾아가 1993년까지 4년간 사무국장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2012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과 정책실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박래군 위원장은 당시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인권운동사랑방은 한국의 인권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성장했다. 그는 2013년 민간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소장을 맡아오고 있다.

  • 1998년 월 일
    박근혜 - 정치에 입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모습.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모습.ⓒⓒ민중의소리 한승호

    박근혜 대통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아버지 후광’을 뒤에 업은 그는 정치권 입문 이후 한나라당 선출직 부총재, 당 대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1998년 4월에는 대구 달성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됐으며 이후 내리 4선을 지냈다. 19대 국회에선 비례대표로 등원, 5선에 올랐으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사퇴했다.

  • 2001년 월 일
    박근혜 - 탈당과 복당, 그리고 당 대표 선출
    2012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서울통일연대 주최로 열린 한반도 평화 수호, 남북 대화협력 촉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게 평화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2012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서울통일연대 주최로 열린 한반도 평화 수호, 남북 대화협력 촉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게 평화협상을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2001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그때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 대선을 준비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200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2002년 5월에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대선 후 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던 의원 중 한명이었다)과 ‘차떼기 파문’ 등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한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 대표로 선출됐다.

  • 2002년 월 일
    박래군 - 다시 ‘거리의 인권운동가’로
    노동, 법률, 문화, 학술, 종교, 정당 등 각계 희망버스의 송경동 시인이 출발에 앞서 인권운동가 박래군 소장과 인사하고 있다.
    노동, 법률, 문화, 학술, 종교, 정당 등 각계 희망버스의 송경동 시인이 출발에 앞서 인권운동가 박래군 소장과 인사하고 있다.ⓒ이승빈 기자

    박래군 위원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국 국장을 지냈다. 그는 매일 사무실과 현장을 오고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1년 만에 스스로 의문사위를 나왔다. 당시 의문사위에서 함께 활동했던 고상만 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의문사위 국장 한 달 월급이 인권운동가 1년 치 월급보다 많았다. (박래군 위원은) 달콤한 유혹에 젖을까 무섭다며 그만 두더니 다시 거리의 인권운동가를 택했다.”

  • 2004년 월 일
    박근혜 - 국보법 폐지 막는데 당력집중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 막는데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 막는데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다.ⓒⓒ민중의소리 한승호

    한나라당 대표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국가보안법 폐지 여부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기자회견을 열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을 철회하라”며 “저의 모든 것을 걸고 국보법 폐지를 막아내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를 폐지하겠다는 것은 무장해제인 동시에 이념갈등과 국론분열을 부추기는 것”이라며 “한나라당의 당력을 집중해 국민과 함께 반드시 국보법 폐지를 막아내겠다”고 밝혔다.

  • 2004년 월 일
    박래군 - 국보법 폐지 위한 총력투쟁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민중의소리 김철수

    반대로 박래군 위원은 당시 국보법폐지국민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으며 국보법 폐지를 위한 총력투쟁을 벌였다. 박래군 위원은 “더 이상 우리는 국보법에 의해 구축된 냉전수구, 반인권, 반민주 질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무기한 노상 단식투쟁’과 ‘전국 도보행진’ 등을 벌였다.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보법은 끝내 폐지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 2006년 월 일
    박래군 -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하다 구속
    평택 대추리에서 용역업체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평택 대추리에서 용역업체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박래군 위원은 2006년 5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현장을 지켰다. 어느 날 새벽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이 국방부와 경찰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택 대추리를 공격해왔고, 대추리 투쟁의 거점인 대추분교에서 저항하는 학생,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면서 끌어냈다. 다음해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대추리 마을을 뜰 수밖에 없었다. 박래군 위원은 2006년에만 두 번 구속됐다. 그의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다.

  • 2007년 월 일
    박근혜 - 첫 대권 도전
    박근혜 이명박 대권후보 시절.
    박근혜 이명박 대권후보 시절.ⓒ월간 말

    박근혜 대통령은 처음으로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는 세종시 수정안 논란 등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때때로 대립하기도 했다.

  • 2009년 월 일
    박래군 - 용산참사에 항의하다가 구속
    용산범대위 박래군, 이종회 공동집행위원장과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 수배자 3명이 검찰 자진출두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용산범대위 박래군, 이종회 공동집행위원장과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 수배자 3명이 검찰 자진출두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박래군 위원은 이명박 정권 초기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용산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철거민 편에 섰다. 당시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과 명동성당 지하 영안실에서 1년여간 수배 도피 생활을 했다. 그는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재판 내내 범정에서 형의 감경이나 선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의 태도를 보고 개전의 정이 없다고 검찰은 질타해왔습니다. 왜 제가 반성해야 하는 건가요. 평화적인 방법으로 용산참사에 항의하고, 용산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편에 서고, 힘없고 가난한 철거민들의 입장에 선 게 죄라면, 저를 단죄하십시오.” 그는 또 구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권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시위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에 앞장섰고, 2012년엔 서울시 인권위 부위원장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집행위원장,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재심촉구 국민연대 집행위원장 등을 맡으며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 2012년 월 일
    박근혜 - 당 비상대책위원장에서 대통령으로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이날 밤 새누리당 당사 종합상황실을 찾아 캠프관계자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이날 밤 새누리당 당사 종합상황실을 찾아 캠프관계자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지휘봉을 잡은 지 보름 만에 또다시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2004년 ‘차떼기 파문’의 악몽이 되살아나던 때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종북몰이’와 ‘아버지 후광’을 업고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당선됐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곧바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에 휩싸였고, 계속되는 인사실패로 정국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 2013년 월 일
    박근혜 -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 해산
    박근혜 대통령이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자료사진.ⓒ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1월 법무부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을 청구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 2주년이기도 했던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숨은 목적’이 있다며 진보당을 단숨에 해산시켰다. 국내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됐다. 진보당 해산은 국가정보원이 만들었던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의 연장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재의 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헌법 파괴와 우리 사회를 혼돈에 빠뜨리는 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헌법수호 의지를 담은 역사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 2013년 월 일
    박래군 - 진보당 해산 반대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국정원 내란음모 대책위가 연 '내란음모 조작사건 검찰구형규탄 기자회견'에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이석기 의원과 구속자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국정원 내란음모 대책위가 연 '내란음모 조작사건 검찰구형규탄 기자회견'에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이석기 의원과 구속자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박근혜 대통령에 맞서 박래군 위원은 ‘통합진보당 해산반대 원탁회의’에 참여해 민주·진보세력을 한 데 모으는데 나섰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이석기 전 의원 구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정원 내란음모정치공작 공안탄압대책위’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당시 수원지법에 보낸 탄원서에서 이석기 전 의원 등의 무죄 석방을 요구하면서 “정부와 국정원의 마녀재판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려울 때일수록 같이 방어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섰던 것”이라고 말했다.

  • 2014년 월 일
    박근혜 - ‘골든타임’ 놓친 세월호 참사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7일 오후 지난 16일 침몰한 고교생 등 477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의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 방문 가족들과의 대화를 갖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7일 오후 지난 16일 침몰한 고교생 등 477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의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 방문 가족들과의 대화를 갖고 있다.ⓒ김철수 기자

    박근혜 대통령에게 다시 큰 위기가 찾아왔다. 2014년 4월 16일 온국민을 비통에 빠뜨렸던 세월호 참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실한 초기 대응으로 사고의 여파를 더 키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8시간 만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드냐”는 엉뚱한 말을 하거나,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유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등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 2014년 월 일
    박래군 -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하다 구속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7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노동자·서민 살리기 2차 총파업을 진행하며 결의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7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노동자·서민 살리기 2차 총파업을 진행하며 결의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박래군 위원은 세월호 유가족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항상 함께 있었다. 그는 시민사회단체의 힘을 모으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최근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폐기하고 다시 논의할 것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으로 몸무게가 7㎏이나 빠지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1주년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또 한 번 경찰에 구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래군 위원은 “구속이 두려웠다면 지금까지 싸워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몇 명을 구속한다고 해서 끝날 싸움이 아니다.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다“며 오히려 남아 있는 모든 이에게 힘을 실어줬다. 50대인 그는 그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건강도 악화된 상태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갇혀 있는 그 순간에도 꺾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