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gory Elich 칼럼] “우리에겐 살아갈 권리가 있다” : 유고 전쟁 16주년(6)

1999년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기 전, 코소보 해방군(KLA)은 코소보에서 다른 민족을 내쫓고 알바니아인들이 지배하는 분리 독립 캠페인을 진행했다. 1998년 10월, 코소보 해방군 대변인 바르딜 마흐무티(Bardhyl Mahmuti)는 그들의 비전을 발표했다:“우리는 절대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코소보의 독립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우리는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이 방법은 제외다.”

나토 전쟁이 끝나가자, 코소보 해방군은 코소보 내에서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온 모든 비(非) 알바니아계 주민들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코소보 해방군은 수천 건의 약탈과 방화, 죽음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두 달 뒤, 나는 벨그라데(Belgrade) 인근 아발라 산 위에 있는 호텔을 찾았다. 코소보에서 쫓겨난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호텔에 수용돼 있었으며 내가 찾아간 곳은 세르비아인 난민들이 있었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비참함이 내 온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은 울고 있고, 방들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와 동행한 두 명의 대표단은 세 개의 층을 모두 돌아보았고 그곳은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난민들의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코소보 해방군에게 잃었다. 그들의 집과 재산도 모두 빼앗겨 버렸다.

아발라 산의 호텔에 수용된 코소보 피난민
아발라 산의 호텔에 수용된 코소보 피난민ⓒ제공: Gregory Elich

처음엔, 우리와 대화한 난민들 중 하나는 비웃는 톤으로 “당신들이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이런 오해는 난민들 중 일부가 우리를 나토 평화유지군 사령관 웨슬리 클라크가 보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가 빠르게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자, 그들은 좀 더 우리와 대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 난민들은 이전에 만난 서방 방문자들의 거만하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우리와 대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특히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가 독설을 퍼붓고 공격적이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몇몇 난민들은 대화를 매우 불편해했다. 한 여인과 그 아들의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들이 받아온 모든 고통을.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 그 곳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7명의 가족들이 우리가 멈춘 첫 번째 방에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 두 개의 침대에서 5명이, 바닥에서 2명이 잔다고 했다. 고란 조르제비치(Goran Djordjevich)는 그의 가족이 6월 13일 코소보를 떠났다고 했다. “우리는 도적떼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죽인다고 위협하고 그래서 떠났어요. 나토가 온 순간 우리는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는 이전에 코소보 해방군에 쫓겨 온 집시들과 친 유고 알바니아인들과 대화를 나눈 뒤라 이들의 사연이 익숙했다.

“우리는 집뿐만 아니라 농장과 재산도 가지고 있었어요.” 조르제비치는 계속했다. “우리는 소들을 풀어주고 도망쳤어요. 나는 우리 마을에서 벨그라데까지 4박5일 동안 트랙터를 몰았어요. 우리 군대가 떠나고 나토가 들어올 때, 우리는 군대를 따라갔어요. 알다시피 알바니아 도적들은 마을을 둘러싼 숲에서 나토가 전진해 올 때 까지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과 합류해 테러를 시작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총을 쐈지만 우리는 다행히 군대와 함께 있어서 괜찮았어요. 그러나 나중에 떠난 사람들은 위험에 처했죠. 우리가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그들은 전체 마을을 태우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모든 것에 불을 지르고 평평한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20살의 남성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미국 지도자는 정말 나빠요. 그는 정말 많은 아이들을 죽였어요. 정말 많은 폭탄을 썼어요. 정말 많은 노인들을 죽였어요. 그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 유죄에요. 나는 미 공군이 폭격으로 아이들을 죽일 때 코소보에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 병사들이 아닌 우리 아이들을 죽이기 원했어요. 그들은 우리 사람들을 죽이려 했어요. 그들에게 이것은 단지 게임이었어요.”

젊은이가 나토 평화유지군(KFOR)을 만났을 때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병사들이, 우리 아이들이 코소보를 나갈 때 나토 평화유지군이 들어왔어요. 처음 들어온 병사들은 미국인과 독일인 병사였어요. 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무기를 가져갔어요.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을 죽이도록 했어요. 우리가 다 봤어요.” 내가 물었다 “나토 평화유지군이 코소보해방군에게 무기를 건네주는 것을 봤나요?” 젊은이가 대답했다 “맞아요.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에게 줬어요.”

홀의 끝에는 8명의 식구들이 한 방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매트는 방의 끝에서 끝까지 차례로 놓아져 있었다. 80살의 노인이 매트위에 누워있고 매트 옆에 그의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그의 침묵은 깊은 슬픔의 분위기를 전해줬다. 미트라 드라구티노비치(Mitra Dragutinovich)는 6월 11일 코소보를 떠났다고 했다. “우리는 코소보에서 유고 군대가 떠나면 코소보 해방군이 들어올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테러리스트들은 협박하고, 죽이고, 총을 쏴댔어요. 많은 사람들이 다쳤어요. 제 사촌은 소아과 의사였고, 한 알바니아계 여성이 아이와 함께 들어오더니 바지에서 총을 꺼내 그를 쐈고 그는 신장을 잃었어요.” 그녀는 80살의 노인을 가리키며 “다친 소아과 의사는 바로 그의 손자에요”라고 말했다.

“왜 미국인들과 독일인들이 온 거죠? 왜 왔냐고요?”

미트라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감정이 격앙된 날카로운 톤으로 말했다. “왜 미국인들과 독일인들이 온 거죠? 왜 왔냐고요?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러 온 건가요 아니면 우리를 학살하러 온 건가요? 우리를 집에서 내쫓고 우리 여성들을 구타하고 아이들을 죽이러 온 건가요? 나는 3개월 동안 24시간 내내 우리에게 폭탄을 퍼붓고 나서 우리를 보호하러 왔다고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클린턴이 왜 최소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과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나라에도 아이들이 있나요? 그들은 어리다는 게 무엇인 줄이나 아나요? 우리도 복수할 수 있다는 걸 알아두세요. 우리도 테러리스트들을 조직해 미국 어린이들을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절대, 절대, 미국 어린이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나는 마을이 폭격을 당하는 동안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최악이었어요. 우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의 나라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땅 위에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땅위에 있지 않아요. 그들이 누구이던, 미국인이던, 영국인이던, 독일인이던, 프랑스인이던 제발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고 이곳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여긴 우리나라니까요.”

우리는 1층으로 돌아왔고 로비에 작은 무리가 있었다. 니콜라 체코(Nikola Cheko)는 오라호바치(Orahovac)에서 가까운 벨리카 호차(Velika Hocha)에서 왔다. 그는 공격적인 태도로 말했고 그가 하는 말들은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는 인상적인 것들이었다. “우리는 3월 24일 공격 이 시작할 즈음에 포위당해 있었어요. 우리는 알바니아인들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전기도, 물도, 빵도 없었죠. 삶을 위한 어떤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누구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어요. 나토 평화유지군도 그 누구도! 그들은 가난한 세르비아인들을 도와줄 필요가 없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멍청한 농부들로 생각했겠죠.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것이고 나토는 우리를 간단히 잊었어요. 이것은 수치에요. 이것은 나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에서 강한 힘을 가졌다는 나라들의 수치에요.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 국적이나 인종이나 종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은 먼저 사람다워야 합니다. 진정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줄 아는 거예요. 나토 평화유지군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유고슬라비아 대표와 UN 대표가 쿠마노보(Kumanovo)에서 서명한 ‘1244 평화협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소보에서 이것은 비단 벨리카 호차만의 문제가 아녜요. 수많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우리가 인간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방 안의 감정이 격해지자 나는 다른 사람들도 얘기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조용히 거부당했다. 우리의 통역관은 그들이 나토의 웨슬리 클락 장군이 우리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통역관이 그 문제를 명확히 얘기해 줬음에도 사람들은 말을 꺼내는 것에 끌리지 않았다.

코소보 피난민 도스테나 필리포비치
코소보 피난민 도스테나 필리포비치ⓒ제공: Gregory Elich

30대의 한 여성이 소리쳤다. “어차피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 남자형제 두 명이 납치당했어요.” 그것은 시작이었다. 나는 미국인들이 이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인터뷰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빌리야나 라지치(Bilijana Lazich)였으며 소핀(Sopin)에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좀 더 편안히 얘기했다. “우리는 모두 검은 옷을 입어요(조의를 표하기 위해). 코소보가 세르비아의 일부였고 우리 군대가 있을 때, 코소보 해방군은 내 남자형제들을 잡아 가뒀어요. 그들은 농부였고 그들은 납치당했어요. 우리는 1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유고 적십자와 국제 적십자를 통해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다 해 봤어요. 국제 적십자는 우리에게 남자형제들이 살아있고 교환될 수 있다고 알려줬어요. 이것이 작년 7월이었고 열흘이 지나서 그들은 감방에 갇혔어요.”

그러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라지치의 어머니는 미국이 파견한 유럽안보협력기구(OCSE) 코소보 조사국의 책임자 윌리암 워커를 방문했다. OSCE의 표면상의 목적은 유로슬라이바 보안군과 코소보 해방군의 충돌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서명된 합의안은 유고슬라비아에만 적용됐다. 코소보 해방군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었고 멋대로 거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워커는 CIA 요원과 함께 임박한 나토 공격에 대비해 공격목표물을 정하고 코소보 해방군에 군사훈련을 제공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코소보를 떠나기 직전에 그들은 코소보 해방군에 통신과 위성위치식별 장비를 넘겨줬다.

워커는 탄원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빌리야나는 말했다. 그는 “요점을 피하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폭격이 계속되는 동안의 삶은 “최악, 최악이었어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우리는 코소보 해방군이 쏘는 포탄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어요. 전쟁과 폭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웃들과 사이가 좋았어요. 그러나 폭격이 시작되고 우리는 코소보 해방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물건들을 감춰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는 아이들을 절대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모두들 안에서 문을 잠갔어요. 우리는 아이들이 바깥에서 놀게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특히 아이들 때문에 무서웠어요.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우리는 최소한 아이들이라도 구하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라지치는 그의 시어머니 도브릴라 라지치(Dobrila Lazich)를 소개시켜줬고 그녀는 코소보 해방군이 1998년 9월 그의 남자형제의 13살 난 아들에게 한 짓을 말했다. “걔는 친척들을 보러 왔어요. 그 아이는 고모와 고모부네를 찾은 다음 다른 고모네 가족을 보러 갔어요. 두 집 사이에서 그 아이는 납치당했고 살해당했어요.” 그 아이의 어머니는 마지못해 우리에게 말했다. 친척들이 그녀를 재촉하자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스타나 안티치(Stana Antich)였고 그녀는 윌리엄 워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때, 빌리야나는 한발 앞으로 나와 끼어들었다. “그 아이는 겨우 13살 이었어요. 걔가 누구에게 죄를 지은 거죠? 걘 겨우 13살이라고요. 내 제부 중 한명도 드라고빌리예(Dragobilje)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유럽공동안보행동 코소보 조사국은 그들이 감방에 들어가 있고 잘 살아 있다고 전해 줬어요.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들의 시신을 받았어요. 다른 친척은 살아 돌아왔지만 의식이 없었고 심하게 얻어맞은 상태였어요.”

일부 정직한 사람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CIA와 연계된 유럽공동안보행동 조사국 직원들의 리더십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거의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유럽공동안보행동 조사국이 이 살인자들에 대해 반응했는가? “아무것도요” 빌리야나가 대답했다. “아무것도요. 그들은 그냥 편안히 앉아서, 그들이 두들겨 패고 죽일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들은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니에요. 그들은 코소보해방군을 도와주러 왔어요.” 빌리야나는 어떻게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사라지고 죽임을 당했는지 말했다. “전 세계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코소보 해방군의 범죄를 처벌하길 원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모든 비난을 세르비아 경찰에게 돌렸어요. 여전히 그들이 알바니아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몰아세웠어요.”

도스테나 필리포비치(Dostena Filipovich)는 60대 정도로 보였으며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녀의 세 자녀의 안전을 위해 어떻게 코소보에서 내보냈는지를 말했다. “내 남편과 나는 나이든 사람이라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았어요. 그때까지 세르비아 인중에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이 몇 명 있었어요. 알바니아인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하고 창문 앞에서 총을 쏘기 시작하자 우리는 떠나기로 했어요. 우리는 손에 들 수 있는 짐만 챙기고 소는 이웃 마을로 보냈어요. 우리는 입고 있던 옷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가축이 많았고 소도 많았어요. 우리는 그것들을 풀어놓지 않았어요. 우리는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그것들을 헛간과 닭장에 넣었어요. 당신은 내가 다른 세르비아인 마을로 가기로 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거예요. 하지만 거기 도착하고 나니 그곳 사람들도 역시 도망치고 있었어요. 길들이 너무 막혀서 우리는 프리즈렌(Prizren)에서 빨리 우리 목적지인 브레코비차(Brecovica)로 이동하지 못했어요. 나토 평화유지군이 프리즈렌에 있었지만 코소보 해방군은 그곳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 행렬에 불을 질렀어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나토 평화유지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요?” 필리포비치의 목소리는 아직 그녀가 그날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알려줬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냥 쳐다보고 웃고, 쳐다보고 웃고 있었어요.”

세르비아인 피난민 행렬은 결국 다른 세르비아인 마을로 방향을 틀어 그곳에서 밤을 새려 했지만, 새벽 3시 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떠나기로 했다. 그들은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은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으로 붐볐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세 명의 코소보 해방군 병사들이 서로 다른 색의 모자를 쓰고 나토 평화유지군과 함께 다가왔어요.” 그럼에도 난민들은 그 마을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초를 세우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어요. 지역의 알바니아인들만 보초를 세울 수 있었어요. 나토 평화유지군은 모든 세르비아인 남자들을 불러 그들의 무기를 인도하도록 했어요. 나토군은 그리고 그 무기를 모두 코소보 해방군에게 갖다 줬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난민들은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토군은 우리 행렬을 조정하고 맨 선두와 후미에 탱크 한 대씩을 배치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알바니아인들로 가득 찬 트럭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 이웃이었어요.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를 약탈하려 했어요. 솔직히, 나토군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요. 우리는 정직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이웃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고 양심적으로 깨끗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토군이 모든 무기를 수거해 갔기 때문에 우리는 쉬운 먹잇감이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코소보 해방군은 내 삼촌을 죽였어요. 사실 그들은 도끼로 그를 죽이고 시체를 버려두고 갔어요. 그들은 삼촌을 묻어주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삼촌을 토막 내 버렸죠. 나토군은 코소보 해방군이 하는 짓을 전혀 막지 않았어요.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집에서 쫓겨났어요. 우리는 무기가 없었죠. 우리는 코소보 해방군의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나토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어요. 그들에게 무기를 줬죠. 우리에게서는 무기를 가져갔어요. 우리는 발가벗겨진 영혼 외엔 아무것도 없이 집을 떠났어요.”

코소보 지역에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 난민들
코소보 지역에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 난민들ⓒ제공: Gregory Elich

나는 다른 이들에게 인터뷰 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지만 모두 관심이 없었다. 방 안에 12, 3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사람들은 코소보 해방군이 그 소녀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말을 해보라고 했지만 소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소녀에게 다시 물었고 소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고 서럽게 흐느끼며 소녀는 현관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고 누군가 나를 흔들어 소녀를 데려올지 물어봐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소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그냥 놔두라고 했다.

보제 안티치(Bozhe Antich)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말하기 전부터 그에 심각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어요” 그가 말했다. 우리는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말하기가 참 어려워요. 저는 수바 레카(Suba Reka) 지역의 소핀 마을에서 왔어요. 코소보 해방군이 내 사촌을 죽였어요. 그는 42살이었어요. 그들은 그가 세르비아인이기 때문에 죽였어요. 그들은 레샤네(Ljeshane) 마을에서 온 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정비사 란첼 안티치(Ranchel Antich)도 죽였어요. 그들은 수바 레카의 건강센터 책임자인 보반 북사노비치(Boban Vuksonovich) 박사도 죽였어요. 그들은 내 며느리의 32살 난 형제도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죽였어요. 그는 그의 집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죽었어요. 그들은 정치인도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한 노동자, 기술자였어요. 그들은 수도원의 기계를 고쳐주려고 갔었고 길에서 폭격을 받았어요. 그들은 14세기에 지어진 ‘성삼위일체’ 수도원으로 향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기계를 고치기 위해 수바 레카를 떠났어요. 수바 레카에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죠. 그들은 매복하고 있다가 운전사부터 죽였어요. 그리고 차를 절벽으로 밀어버렸죠. 탑승객 몇 명은 부상을 당했어요. 테러리스트들은 운전사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의사와 내 사촌도 죽였어요. 그들은 차 안에 있던 모두를 죽이고 싶어 했어요. 굴러 떨어진 자동차가 언덕 바닥에서 멈추자 차를 따라가서 내 조카마저 죽였고 그 아이 몸속에 16발의 총알이 박혔죠.”

살인 사건 후 범죄 조사관조차 살해한 코소보 해방군

사고는 나토 전쟁기간 중에 일어났다. 살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죄 조사관이 그 장소를 방문했지만 코소보 해방군은 그마저 죽여 버렸다. 안티치의 친구와 가족들이 향했던 성삼위일체 수도원도 비극적 운명에 처했다. 1999년 6월 중순 나토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들어오자 코소보 해방군은 수도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다음 달에는 아예 폭탄으로 파괴해 버렸다. 성삼위일체 수도원은 나토의 비호 아래 코소보 해방군이 몇 달간 날뛰며 파괴한 84개의 교회 중 하나였다. 많은 건물들이 중세 시대에 지어진 것이고 몇몇은 유네스코의 세계역사유적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결국 나토 평화유지군이 역사유적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됐고 몇몇 장소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간헐적으로 종교시설 파괴가 지속됐다. 2004년 3월, 알바니아계 극단주의자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학살과 파괴를 지향하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이 기간 중에 35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추가로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우리는 나토 평화유지군이 코소보 해방군의 살인행위를 보호하는 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보제 안티치가 설명했다. “그가 인간이라면, 최소한 어린 아이들이 죽어간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어린이는 종교, 인종, 민족에 관계없이 최우선이 돼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걔들은 집도 없어요. 지금은 다닐 학교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저쪽에 우리 재산이 있어요. 우리는 집도 있었어요. 땅도 있었어요. 나 같은 경우에는 33년을 일해 왔어요. 근데 지금 나는 거지에요.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우리나라 세르비아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해있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요. 우리의 미래가 뭐죠? 알바니아인들의 테러를 지원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직면하고 우리를 사람으로 봐야 해요. 우리는 진짜 사람이니까요.”

사바 요바노비치(Sava Jovanovich)는 코소보에서 파괴된 그의 집의 사진을 보여줬다. 벽에는 알바니아어로 ‘KLA(코소보 해방군)’를 뜻하는 ‘UCK’가 긁힌 글씨로 씌어 있었다. 다른 글씨는 “세르비아인들의 귀한은 금지됐다” 였다. 요바노비치와 그의 네 명의 형제들은 모두 이웃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6월 11일과 12일 코소보를 떠났다. “그것은 대탈출 이었어요” 사바가 회상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집을 지키기로 했어요. 나중에 떠나온 사람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그에 대한 어떤 소식도 못 들었어요. 정말 몰라요’라는 말만 했어요. 코소보 해방군은 밀을 포함해 모든 곡물을 가져가서 태워 버렸어요. 그들은 내 형제들에게서도 밀과 옥수수를 강탈하고 집을 불태워 버렸어요. 우리는 15마리의 소와 20마리 돼지, 많은 닭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어서 그는 절망에 빠졌고 그는 그의 가족들을 비극에 빠뜨리게 된 서방의 간섭을 비난했다. “제 아버지는 이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절 살았던 증조부님이 해 준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의 지배 하에서도 살았어요.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집에서 쫓아내지 않았어요. 우리가 집에서 쫓겨난 건 처음이에요. 그들은 오스만과 독일인들보다 나빠요.”

나는 그들에게 코소보 해방군이 코소보에서 새로 조직되는 경찰조직에 가담할 수 있다는 미국발 공식보도들을 알려줬다. 요바노비치는 깜짝 놀라며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들은 세르비아인들을 싫어하고 적대해요. 이건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됐고 코소보 해방군은 나토 점령지역 코소보의 경찰 병력으로 충원됐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 정도 지난 후, 나는 유고슬라비아 언론의 한 기사를 읽었다. 그 기자는 나처럼 아발라 산 인근의 많은 난민들을 취재했고 요바노비치의 인터뷰도 있었다. 그 기사에서 나는 요바노비치가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바니아인 도적떼는 집을 떠나기를 거부한 아버지를 현관에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더군요.”

Copyrights ⓒ 민중의소리 & vop.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