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석 칼럼] 내일이면 나는 황제를 죽일 것이다

며칠 전 대구에 들러 시집 한 권을 받았다. 멀쩡한 새 책이 아닌 “시집 판매 9,000원”이란 손 글씨 라벨이 붙은 견본을 그나마 서둘러 챙긴 것이다. 제목은 <잘 가라, 버디 홀리>, 지난해 대구에서 췌장암 투병으로 한창나이인 47세에 돌아가신 최창윤 시인의 1주기 유고 시집이 그것이다. 시인과 동갑내기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술자리의 전력과 사연이 많은 친구였는지라 간만에 꼼꼼히 그의 문장 속에 푹 빠져 이렇게라도 소심하게 그를 추모하고픈 생각으로 책장을 펼쳐 들었다. 소심한 추모 그것이 문제였다. 펼쳐진 책장에는 역시나 그의 소심한 칼날이 소심한 추모를 하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승달 떠오르는 역수강가의 저녁, 버드나무 아래 술상에서 모래 바람 맞으며 붉은 술을 마신다 내 친구 고점리가 켜는 축의 가락은 오래 전 함께 별을 보았던 여인의 울음소리를 닮았는데 덜 익은 개고기 속에선 그저 비린 털만 씹힌다 이제껏 살았던 날의 기억들은 강 안개 속 취기처럼 흩어지고 나는 두루마리 지도 속 숨겨진 칼끝만 만질 뿐, 찌르고 찔러 한 치만 닿을 수 있다면 이 모든 번민과 두려움 함께 끝날 것인데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물은 차가워라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지금 부르는 노래는 여러 세상을 다른 몸으로 살아왔던 한 사내가 칼을 안은 채 태산에 올라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 수레 속 궤짝에선 번오기의 목이 소금에 절여지는데 내일이면 나는 황제를 죽일 것이다 거대한 세상을 무너뜨릴 것이다 목숨이여 인연이여 한평생 뜨거웠던 혈기여 내게 두려움 없는 용기를 다오 내게는 단 한 번뿐일 절정을 위해 저 수레에 실린 술단지들이나 오늘 밤 비울 일인데 이번 삶의 형형한 뜻 어찌 이 작은 칼끝에만 머물렀으리 수만 번 몸 바꿔 다시 살아도 나는 그저 외로운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일 뿐

그 오랜 억겁의 윤회 속에서 나는 언제쯤 시라는 칼로 세상을 찌를 수 있을까 찔러서 닿을 수 있을까 평온해 질 수 있을까 한때 형가로도 살았던 내가 이제는 시라는 칼을 움켜쥐고 보이지 않는 노래의 심장을 겨냥 중인데

「인생이여 만세」 전문

시인의 시집에 해석을 붙인 정지창 문학평론가는 이 시가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에 대한 기록과 연유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시라는 칼로 세상을 찌르려 했던 자객 최창윤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형가는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으로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형가는 개백정 노릇을 하며, 축을 잘 타던 고점리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으며 진시황의 자객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비옥한 곡창지대인 독항의 땅을 바치고, 진왕의 노여움을 산 번오기란 인물을 설득하여 그의 목을 소금에 절여 받치기 위해 왕궁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두루마리 지도에 숨겼던 형가의 칼은 아슬아슬 진왕의 옷소매만 끊고 오히려 진왕의 긴 칼에 온몸이 산산이 토막 나는 처형을 당하고 만다.

시로써 세상을 찌를 수 있다는 또는 시와 예술이 세상의 칼이 될 수 있음을 어찌 무능한 위정자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지금의 어지럽혀진 세상의 꼴이 최창윤이란 시인이 찌르고자 한 진왕처럼 그 대상이 점점 가시화 된 지 오래다. 단지 이제 최창윤의 시에서처럼 예술이 고전 매체에서 노닐지 않고 예술 행동과 직접 대중을 만나 들어가거나 대중이 빈번하게 오가는 장소를 상대로 펼치는 적극적인 저항이 득세 할까 권력은 두려운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국가의 임무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정책의 대 전제인 지원을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문화예술의 경비를 국가에서 지원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작품을 생산하는 창작자의 자유로운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최종 책임자가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수호자의 책무와 지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부는 국가운영의 원칙이나 정치의 원칙으로 삼고 수호해야하는 헌법의 가치까지 모조리 어긋 내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으니, 이 정부는 국민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을 더 쌓이게 하는 원흉이라 해도 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예종 교수이기도 한 박근형 연출가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 ‘개구리’를 연출한 것 때문에 ‘찍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작품 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한예종 교수이기도 한 박근형 연출가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 ‘개구리’를 연출한 것 때문에 ‘찍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작품 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의혹이 일었다.ⓒ양지웅 기자

이 정부는 권력의 요직에 자신들의 사람으로 가득 채워 꼭두각시처럼 뻔뻔하게 조정하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다. 큰 권력에 의지하여 임명된 공직자들은 더 작은 권력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하여야 할 공직의 의미에는 관심과 사유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융성이란 이런 것이고 이제 국가의 돈은 그들 패거리 융성을 위한 노획물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저들의 천박한 노름과 시간 싸움을 하여야 하거나 스스로 자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문화연대에 의하면 201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대략 2년 동안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진 검열과 배제의 사례들만 해도 20여 건이 넘는다고 한다. 고심 끝에 문화예술인들은 <예술 검열 반대와 문화민주주의를 지키는 문화예술인 만민공동회>를 이달 27일에 개최하기로 하였다. 말과 상식이 안 통하는 시대에 탄압과 검열을 지켜보는 예술가들은 이제 너도나도 모여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우성이다. 결사와 자객을 오히려 양성하는 이상한 문화융성의 시대, 이것도 어두운 시대의 문화라면 기꺼이 융성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이번에는 형가의 칼끝을 조금 더 길게 하여 자객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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