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삼성반도체 난소암 사망’ 산재 최초 인정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난소암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의학적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열악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판단해선 안된다는 취지의 판결로, 반도체 작업장을 다니다가 발생한 ‘난소암’을 산업재해로 인정한 첫 판결이다.

서울행정법원 제2행정부(부장판사 박연욱)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난소암으로 사망한 이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28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어도 업무상 질병 인정 가능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와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가 서울 중구 광화문 광장부터 명동까지 사망한 삼성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삼성규탄의 연대를 다지는 플래시몹을 선보이는 모습(자료사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와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가 서울 중구 광화문 광장부터 명동까지 사망한 삼성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삼성규탄의 연대를 다지는 플래시몹을 선보이는 모습(자료사진)ⓒ윤재현 인턴기자

재판부는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의 목적 등에 비추어봐야한다”면서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에 관하여는 증명책임에 있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다.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근로자 측이 입증하도록 하고, 인정되지 않으면 업무상 질병으로 보지 않던 형식적인 판단을 벗어나 공적보험제도의 취지와 근로자들의 현실에 비추어 실질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이를 전제로 재판부는 “망인에게 난소암이 발병한 원인 및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근무하면서 유해 화학물질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상당기간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면서 피로, 스트레스가 누적된 것으로 보이고, 유해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좌측 난소의 경계성 종양이 발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난소암의 특성도 함께 고려했다. 재판부는 “망인에게 발병한 점액성 난소암은 난소암 중에서도 발병률이 낮은 질병이고 발병원인이나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질병”이라면서 “발병률이 높은 질병, 의학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질병에 비해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의 정도가 완화된다”고 보았다.

이씨는 1993년 만17세에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만6년 2개월간 일하다 건강이 악화돼 1999년 퇴사했다. 2000년 난소의 경계성종양. 2004년 악성종양 진단을 받은 후 2011년 난소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투병생활 12년 끝에 난소암의 전이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입사 당시 이씨는 다른 질병 기록없이 건강했고 암 관련 가족력도 없었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삼성의 자료은폐와 왜곡, 역학조사의 문제점

한편 재판부는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역학조사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근로복지공단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역학조사에서 “망인이 일한 곳에서 난소암 관련 유해물질이 취급되지 않아 업무관련성이 낮고 작업장에서 발암물질에 노출됐다는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취지로 결론을 내렸다.

소송과정에서 망인이 업무 중 사용한 접착제와 세척제의 유해성 여부가 중요한 쟁점이었다. 유족 측이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망인이 사용했다고 확인한 접착제와 세척제는 발암물질이 포함된 것이었지만, 삼성은 해당 접착제와 세척제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삼성이 사용했다고 주장한 접착제를 기준으로 조사결과를 작성했다.

그러나 삼성에 접착제와 세척제를 공급한 업체를 통해 삼성의 자료은폐 사실이 드러나게 됐고, 역학조사 당시 유해화학물질의 농도,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도 실시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을 고려해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올림 “삼성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노숙농성장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노숙농성장ⓒ민중의소리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판결은 반도체 산업에서 난소암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최초사례”라고 평가하면서 “12년간의 투병 끝에 36세에 생을 마감한 고인과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이 판결을 통해 반도체 공장의 안전보건관리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소송 중에도 자료은폐와 왜곡으로 유족들의 산재인정을 방해했다”면서 “유족들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보상절차에서 ‘난소암’이 3군질환으로 분류된 점을 지적하면서 “반올림은 산재 인정여부에 따라 보상내용에 차등을 두는 것은 산재인정에 어려움을 겪어온 피해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이고, ‘사회적 부조’에 맞게 보상을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삼성의 일방적 거부로 보상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판결은 삼성의 독단적인 보상절차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라면서 “삼성전자는 노동자들을 병들고 죽게 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 보상에 대한 반올림과 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책임있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앞에서 115일째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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