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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교의 인문학 교실] ‘스승의 날’에 부치는 넋두리

편집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안부를 잠깐 묻더니 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데 글 하나 써주지 않겠냐는 타진打診이다. 고개를 아무리 갸웃거려 봐도 무슨 특별한 얘깃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교육 문제가 크게 불거져서 교사들의 존재 [또는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얘깃거리가!1) 하지만 근래 들어 ‘민중의소리’에 글을 써 보내지 않은 게으름의 전력前歷이 좀 켕긴 탓에 ‘없다’고 대뜸 퇴짜 놓지는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스승, 아니 교사들과 관련해 쓸 거리가 있기는 있다. 무슨 특별한 사회적 계기는 없지만 개인적인 감회는 있다는 말이다. 정년퇴직을 석 달 앞두고 있다 보니! 그 넋두리를 쬐끔 늘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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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뉴시스

가르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요점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 젊을 적에는, 그러니까 한 세대[30년] 전에는 좋은 교사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눈먼 입시교육의 굴레에서 애들을 조금만 일으켜 세워주고, 용기 있게 민주주의를 말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스승’이라고 찾아오는 옛 제자들을 맞이하는 것이 그런대로 떳떳했다. 그때는 돈[촌지]을 밝히지 않기만 해도 선생한테서 사람의 향취가 났다. 스승이라 추어줄 만하다. 모리배謀利輩 같은 학교 재단과 맞서 (해고를 감수하고) 투쟁을 벌이는 선생은 존경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옛 담임이 (전교조 결성과 관련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학생이 자기 옛 담임을 찾아가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오래전부터 ‘스승의 날’이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2)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만큼 훌륭하게 선생 노릇 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얘기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그렇게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조무래기 독재자[곧 학교행정의 중간관리자]들도 많이 양순해졌으니 그들과 고함을 지르며 싸울 일도 별로 없다. 입시 교육에서 벗어나기? 사교육[학원]이 든든히 똬리를 틀고 있어서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입시철폐’의 구호는 오히려 빛이 바래버렸다. “학교에서 일부 교사들이 입시 경쟁과 동떨어진 교육을 하겠다고? 냅둬라. 다들 학교가 파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가는데 뭘! 걔네가 ‘그래 봤자’다.”

개인적인 일화를 하나 들춘다. 십여 년 전 어느 여중女中에 있을 때 담임을 맡은 중3 아이들과 학급 야영을 한 적 있다. 한밤중에 복도를 걸어가노라니 두 놈이 다가오는데 술 냄새가 폴폴 났다. 몰래 학교 밖으로 나가서 술 한 잔 걸친 모양이다. 한 놈이 내게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은 좋으시죠? 부자이니까. 우리 집은 가난해요.” 저 녀석, 얼마나 마셨냐고 동행한 녀석한테 물었더니 소주 세 병을 마셨단다.3) 다음 날, 그 녀석한테 “너, 어젯밤에 이상한 얘기 하더라”하고 일깨워 줬더니 부끄럽다고 고개를 돌린다. 그때 그 여중女中 아이들은 중산층 자녀가 다니는 이웃 학교 가시내들과 때깔[=생김새와 얼굴빛]이 완연히 달랐다. 나는 ‘참교육의 과제’를 생각할 때에 그 애를 더불어 떠올리곤 한다. 그 애는 술에 빠졌을 때라야 자기의 사회적 소외감을 털어놓았으니[→선생과 학생 사이에 놓인 사회적 골이 무척 깊었으니] 이는 그동안 내가 인간해방교육을 변변히 감당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부당 후속조치 철회, 참교육 전교조 사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 복귀 거부 전임자 삭발투쟁 기자회견에서 삭발을 마친 조합원들이 투쟁 머리띠를 하고 있다.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부당 후속조치 철회, 참교육 전교조 사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 복귀 거부 전임자 삭발투쟁 기자회견에서 삭발을 마친 조합원들이 투쟁 머리띠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비상벨을 울려라

최근에 몇 백명의 전교조 교사들끼리 돌려 읽는 ‘회보’에 소감문 하나를 써냈다. 제목이 ‘비상벨을 울려라’인데 요지는 이렇다. “전교조가 법외 노조가 되었다지만 간부 몇을 쫓아내는 것 이상으로 더 큰 탄압을 겪을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끝끝내 버틸 힘을 마련하는 것인데 전교조 간부들은 이를 웬만큼 낙관하는 것 같지만 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전교조 신문에 조합이 벌이는 투쟁과 행사, 교육당국과 실랑이 벌이는 얘기 말고 세상사에 관해 깊은 앎을 던져줄 다른 얘기가 변변히 실리지 않는다. 분회 모임에도 나올 생각을 않고, 조합비만 억지로 내는 소극적인 조합원들한테[→학교를 옮길 때 탈퇴한다] 그나마 전교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교육문제와 세상일에 관해 길라잡이가 돼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제목만 건성으로 훑고[→자기들은 조합비만 내므로 그 소식들이 남의 일이다] 곧바로 밀쳐버릴 조합원들한테 신문을 (억지로) 배달해야 하는 일이 퇴직 말년까지 분회장 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의 고달픔[서글픔]이다”

노동조합 신문에 어떤 얘기가 실려야 하는가? 이를테면 작년 가을, 세 살짜리 꼬마 아일란 쿠르디[→시리아 난민]의 주검이 터키 바닷가에서 발견됐을 때, 그 아이 얘기가 실렸어야 한다. 난민이 급증한 데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세계대공황 및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동돼 있다]과 칸트와 레비나스의 환대론[→고교 윤리책에 소개돼 있다]에 대한 짤막한 풀이와 더불어! 한국 민중도 더 이상 ‘난민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지 말아야 진취적인 사회운동의 기풍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알파고가 이세돌을 꾀어서 한 판 붙었을 때는 인공지능의 개발이 현대 사회에 초래할 영향에 대한 해설 기사가 실려야 한다. 이것,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지 않았는가. 일간신문들도 그 얘기로 도배질했지만 민중의 삶에 끼칠 부정적 영향[=실업 초래] 문제는 진보개혁언론만 신경 써서 다뤘을 뿐이다. 그것도 막연한 해설이었지 ‘파국적인 영향에 어찌 맞설까’ 하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이 뒤따르지 않았다. 영국의 한 연구팀이 예측하기로는 이것, 일자리의 절반을 사라지게 만든다는데 중고교 사회공부의 절반은 지금의 자본체제가 떠안고 있는 위기 양상들과 씨름하는 데에 할애돼야 하지 않는가?

내가 맡은 중1 학생들한테 그 예측을 소개해 주면서 “그래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을 때 너희, 어찌할래?”하고 추궁했더니 다들 꿀 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는데 한 녀석이 불쑥 내뱉는다. “자살해야지요!” 또 한 녀석도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열을 냈다. “이런 한심한 놈들! 왜 스스로 일자리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죽을 생각부터 하냐! 너, 00 구청장 선거에 나가라. 그리고 너[→그 옆엣 놈], 서울시장이 돼라. 너[→또 그 옆의 놈]는 대통령이 되고! 그래서 자기 일자리부터 챙기고 다른 사람들 일자리도 최대한 마련해내라.” 그러고서 그 녀석들을 몰아치듯이 교단 앞으로 불러냈다. “지금부터 구청장[과 시장과 대통령] 후보로서 지지자를 모아내는 연설을 시작해라!” (여럿 앞이라) 입을 떼지 못하는 녀석은 한구석에 벌을 세웠다. 아이들 관심을 끌려고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사회교과 시간도 아니고, 더군다나 코흘리개 중1인데 더 자세한 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자리 문제가 아주 심각하고, 이것은 국회의원들[정당]이 대신 해줄 일이 못 된다는 것, 스스로 문제제기하는 민중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만큼은 얼마든지 전달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혁명하자!’는 얘기 말고 아이들한테 어떻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수만 명의 조합원 가운데 학생들한테 이 얘기[=민중정치 없이는 미래가 없다]를 열렬하게 전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합 신문이 현실을 열렬히 파헤치지 않고서 어찌 교사들이 능동적인 현실참여자로 바뀌기를 바랄 수 있을까.

주목해야 할 세상일은 쌔고 쌨다. 작년 초, 어느 초등학생의 시를 놓고 ‘잔혹 동시’라며 마녀사냥이 벌어졌는데 이것,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느냐는 문제[→시도 소설 못지않게 허구적인 이야기라는 것], 또 표현의 자유가 대관절 뭐냐는 문제[→싫은 소리도 참고 들으라는 윤리적인 명령], 그리고 사람대접의 문제[→아이라고 아이 취급하지 말라]를 두루 들이대는 작지 않은 교육문제였다. 교사들이라면 당연히 숙고해야 할 사건인데 참교육을 표방하는 단체의 신문에 마땅히 실렸어야 하지 않는가? 교육자를 교육시키지 않고서 어찌 세상의 변화를 바라랴.

문해력은 비판할 줄 아는 능력이다

초중 고등학교에서 ‘참교육’이 빌빌거리고 있다. 이것을 ‘문해력文解力’과 관련해 잠깐 살펴보자. 우리네 선생들은 모여 앉았다 하면 한탄한다. “아니, 시험 시간에 아이가 (문제지에 적힌) ‘경솔하게’라는 낱말 뜻이 뭐냐고 나한테 물어보는데 참 기가 막혀서...” 고등학생 선생이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중학교에서 낱말 좀 잘 가르쳐서 보내지, 애들한테 낱말뜻 풀이해주느라 시간을 다 보낸다오.” 벨기에 대학교수 페르하에허가 쓴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읽다가[→이것, 읽어봄직한 책이다] 걔네들 교육현실이 우리와 마찬가지라는 대목에 이르러 무릎을 쳤다. 거기도 동료 대학교수들과 넋두리를 주고받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애들이 낱말뜻을 몰라!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받아쓰기 시험을 봐야 할 것 같다.”는 게다. 이것,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는데 요즘은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문해력文解力, 곧 읽기공부 강좌를 여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한댔다. 어휘력만 문제가 아니고, 문해력도 문제가 된다. 어디 벨기에만 그럴까. 한국도 그럴 것이고, 미국도 그럴 것이다. 우리 애들의 문해력이 얼마나 낮은지, 연구 문헌들을 들춰보지 않았으니 자세히 넘겨짚기는 어렵지만 사람이 직관으로[대번에] 예단할 수 있는 게 있다.4) 한국의 교과서들을 들춰 보라. 교과서는 쪼가리 도막지식을 늘어놨고, 시험은 그것을 암기했는지를 묻는다. 그런 공부를 한 아이들이 어디 본때 있게 문해력을 길러냈겠는가.

문해력은 본래 비판적 문해력이다. 칸트가 ‘학문 = 비판’이라지 않았는가. 칸트 윤리학은 공리주의 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한 끗발 낮은 읽기 공부에도 ‘비판’이 내재해 있다. 그러니까 진보적 인문 교양과 문해력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5)
학생들이 진보적 인문교양을 변변히 쌓지 못했다면 문해력도 당연히 길러내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해야 마땅하다. 학교 성적 좋은 아이들 가운데 일베[일간베스트] 사이트에 들어가서 낄낄거리는 애들이 많다는데 그 애들은 문해력이 볼품없을 것으로 여겨도 된다. 국어 공부가 사회[+역사+도덕] 공부와 별개로 굴러간다면 어느 쪽이건 겉핥기 공부에 그치기 때문이다.

어휘력과 문해력과 진보적 인문 교양은 서로 긴밀하게 잇닿아 있는 문제다. 낱말 하나하나를 꼼꼼히 새길 때라야 글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고, 세상을 통찰하는 앎도 얻는다. 이 셋은 어깨동무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셋을 북돋는 혁신적인 교육개혁의 상像은 어떤 것일까? 여기가 긴 얘기를 읊을 지면은 못 되고, 상상력을 확 북돋울 수 있는 한 가지 그림만 내질러 보자.

4월 1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세월호 2주기 범국민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4월 1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세월호 2주기 범국민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교과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자

중1 국어책에는 ‘언어의 본질과 기능機能’을 해설한 대목이 있다[나는 국어를 가르친다].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능>은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기능’을 영어로 옮기면 function이다. 참고로, 독일어로는 Funktion, 프랑스말로 fonction, 일본어로는 機能, 중국어로는 功能. 그런데 function을 우리말로 옮기면? <기능, 역할, 작동, 작용, 행사, 함수>로 옮긴다. 우리말과 영어가 1 대 1로 대응하는 게 아니란다. 이 여러 낱말은 서로 뜻이 통한다는 얘기다. 함수가 뭐냐? y는 x의 함수라 하지? x가 바뀜에 따라 y도 바뀌어 가지? x는 y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학생들의 어휘력을 제대로 높이려면 국어와 영어와 수학 공부를 죄다 한 자리에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국어와 영어와 수학이 따로 논다. 서로 딴 교사들이 맡아서 가르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교육개혁의 큰 그림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교과의 벽을 (과감하게)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 교과의 벽이 단단하게 처져 있기 때문에 중등 교사들은 딴 교과 선생들과[→그들이 학교의 대다수요, 같은 교과 선생은 몇 안 되는데] 가르치는 내용을 놓고 토론을 주고받기 어렵다. 그럴 이유가 없어서다. 하기야 같은 교과끼리도 토론의 자리가 드물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과의 벽을 허무는 것’이 한갓 꿈같은 얘길까? 우리가 게을러서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 오지 못할 뿐,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그것을 실천에 옮긴 나라가 있다. 카리브해의 어느 섬나라[→국토의 넓이는 한반도와 비슷하고, 인구는 남한의 절반을 밑돈다]에서는 중학교 교사가 (초등 교사들처럼) 모든 교과를 다 가르치는 쪽으로 여러 해 전부터 옮겨갔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그러다가 애들 학력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고? 그 나라는 중남미 나라 중에 학력이 가장 높은 축이다. 교과의 벽을 허무니까 교사가 (자기가 맡은) 학급을 3학년까지 줄곧 담임으로 지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고등학교도 그런 쪽[=다 맡아 가르치기]으로 옮아가고 있다는데 중학교만큼 철저히 바꿨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정도가 돼야 교사가 학생을 ‘철저히 책임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교육자가 피교육자와 ‘전면적인 관계’를 맺는 것(=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것)은 그럴 때라야 가능한 것 아닐까?

설렁설렁 문제의식만 던졌다. 지금의 현실로 돌아오자. 한국의 중고등 교사들은 00교과만 따로 맡아서 가르친다. 학교의 분업 체계에 갇혀 그 밖을 넘겨다 보지 못한 채 지내다 보면 시나브로 눈길도 좁아 든다. “사회의 변화에 대한 공부? 그거, 사회과 교사가 맡는 것 아냐?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것은 역사과 문제.” 학교의 분업체계는 딴 교과 선생들이 사회정치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완강하게 묵인해 준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철옹성 같은 교과 체제 속에서 일한다.

하지만 그딴 것, 가벼이 여기고 전인全人으로 살아가자. 모든 교과를 다(!) 가르치겠노라고, 그거 어려운 일 아니라고 호기롭게 다짐하자. 그리하여 학생들과 머리 맞대고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을 애도하자. 알파고가 몰고 올 미래도 함께 살펴보자. 이른바 ‘잔혹 동시’도 함께 읽자. 45분 수업 중에 10분은 모든 교과에 다 열어 놓자. 또 앞으로는 어느 교과든 다 가르칠 수 있도록 밤잠을 반납하자.

그렇게 교사로서의 목표를 바꿀 마음이 생긴다면 ‘세월호 배지’를 옷깃에 꽂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리 없다. 그 배지를 여러 달 꽂고 다니다 보면 면식面識이 없는 학생이 다가와 “선생님, 그 배지가 참 멋있어요.”하고 격려도 해준다. 뭉클한 힘이 차츰 퍼져나간다.6)아이들의 영혼이 훨씬 섬세하다는 것을 그럴 때 느낀다.

선생이 먼저 바뀌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바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 그런 변화 없이는 민주주의 교사운동이 ‘버틸 힘’을 모아내기도 참 어렵다. 치고 나갈 힘을 키우기는 더 까마득하다. 비상벨을 울려야 한다.7)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응답하려면! 부끄럽지 않은 스승으로 교단에 서려면!

필자주
1) 조선소 노동자들을 비롯해 일터 잃은 사람들이 마구 늘어나고 있다. “교사들, 고생이 많다”고 덕담을 건넬 시절이 아니다.
2) ‘스승의 날’은 낱말부터 바꿔야 한다. ‘교사의 날’로! ‘스승’은 저를 가르쳐준 선생들 가운데 존경심이 절로 일어나는 분만 칭송하는 말로 한정돼야 한다. 30만 스승? 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3) 얼핏 생각하면 ‘노는 애’ 같겠지만 일진一陣과는 아무 상관없는 애였다.
4) 문해력 조사가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단편적인 연구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문해력’을 국어 교과에서 도맡는다고 여기는 것도 한가로운[속 편한] 통념이다.
5) 성서를 읽는다고 치자. 거기 적힌 말을 죄다 곧이곧대로 읽는[믿는] 근본주의자는 ‘문해력’도 볼품없다. 말뜻을 비판적으로 새기고, 이 구절과 저 구절을 꼼꼼히 견줘야 비로소 그 책을 제대로 읽어낸다. 평생 성서만 읽는 신학자들도 있지 않은가. 책 하나, 읽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6) 안산 단원고가 세월호 희생학생들을 제적처리하려다가 반발에 부딪쳐 철회했다. ‘(두려운 진실을) 잊자[외면하자]’고 부르꾀는 검은 세력의 힘은 아주 끈질기다.
7) 신문을 펼치면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뽑힐 가능성’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다. 그런데 힐러리가 월가에 대해 아부[아첨]한 물증이 나올 경우,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최악 아닌 차악次惡을 밀어주자’는 정치에 만족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갈수록 나빠질 것이다. 비상벨을 울려도 열두 번은 울려야 한다.


정은교 서울 강신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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