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10답] 토니 블레어와 이라크전에 대한 칠콧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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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칠콧 보고서에 여론을 바꿀만한 새로운 내용이 있나?
  2. 블레어 전 총리는 이라크 전이 실수였음을 왜 인정하지 않나?
  3. 블레어는 비밀리에 미국에 참전을 약속했나?
  4. 블레어는 후세인이 WMD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을 속였나?
  5. 전쟁은 불법적인 것이었나?
  6. 전쟁은 막을 수 있었나?
  7. 동맹군은 왜 전후에 대한 준비가 그처럼 미흡했나?
  8. 이라크전이 ISIS(이슬람 국가)의 발흥을 낳았나?
  9. 이라크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무엇이 달라졌나?
  10. 이라크 전과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할 수 있을까?
Voice of the World / 편집 : 이정무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6-07-13 13:47:48
  • CARD 1/

    칠콧 보고서에 여론을 바꿀만한 새로운 내용이 있나?

    이라크 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지 않은 한, 2백6십만 단어 분량의 칠콧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일은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작업이다. 영국군이 이라크 전에 투입되어 주둔했던 기간은 6년인데, 보고서 완성에는 7년이 걸렸다. 이미 대중 - 침공 초반에 사담 후세인 축출을 지지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 은 이라크 침공의 근거들이 애초부터 조작되었다는 점과 침공 이후에 대한 계획의 부재로 인해 이라크가 황폐화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칠콧 보고서 출간의 의미는 크다. 여기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자료를 포함해 방대한 양의 관련 문건, 증언들, 그리고 무엇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 부시 대통령 간의 사적 대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책입안자들과 미래의 역사가들에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 CARD 2/

    블레어 전 총리는 이라크 전이 실수였음을 왜 인정하지 않나?

    블레어는 영국 전몰장병들과 이라크 민간인의 희생에 대해 여러 차례 조의와 유감을 표한 바 있다. 칠콧 보고서 출간 후 있었던 장시간의 기자회견에서도 시종일관 참담한 표정이었고 답변 도중 목이 메기도 했다. 또 일부 사항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침공의 근거로 사용했던 ‘정보’의 진위여부를 좀 더 철저히 살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했다.

    칠콧 보고서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회견하는 블레어 전 영국총리
    칠콧 보고서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회견하는 블레어 전 영국총리ⓒAP/뉴시스

    하지만 그가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침공의 근거가 될 정보의 진위여부를 철저히 검토하지 않았던 이유가, 당시 그가 ‘미국을 따라 이라크를 치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침공을 정당화 할 구실이 절실하게 필요해서’라는 점이다.

    블레어는 사담 후세인의 축출 이후 이라크 재건을 위한 사전 준비가 없었던 과오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영국이 참전하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블레어가 영국참전이 실수였음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그의 자기기만, 현실부정, 허영심을 꼽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블레어가 전쟁이 실수였다고 시인하는 순간, 전몰장병들의 죽음은 어이없는 정책과오가 가져온 헛된 희생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CARD 3/

    블레어는 비밀리에 미국에 참전을 약속했나?

    칠콧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가장 큰 관심이 된 문건은 2002년 7월 블레어가 부시에게 보낸 서한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당시 이 메모를 본 영국 외무관료들은 블레어가 미국 대통령에게 이 같은 백지수표를 써준 것에 대해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이는 이라크전을 주제로 한 책들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알려진 바 있다. 사실 블레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후세인의 제거를 위해 미국이 충족해야 하는 일련의 조건들을 미국 측에 제시했었다. 침공으로 이어지는 기간 내에도 이 같은 요구는 몇 단계에 걸쳐 계속되었다.

    블레어가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쓴 의도는 부시의 전적인 신뢰를 얻고 영향력을 키우고자 함이었다.

    칠콧 보고서가 발표되던 날 행사장 바깥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사진은 시민들이 들고 나온 블레어 전 영국총리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의 인형들.
    칠콧 보고서가 발표되던 날 행사장 바깥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사진은 시민들이 들고 나온 블레어 전 영국총리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의 인형들.ⓒAP/뉴시스

    그러나 문제는 블레어가 그렇게 약속한 때부터 미국은 영국의 참전을 당연시하게 되었고 영국이 제시한 참전 조건의 충족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었던 앤드류 카드는 2002년 크로포드 목장에 있었던 부시와 블레어 간의 회담 이후부터 부시는 영국의 참전을 기정사실로 여겼다고 했다.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도 영국 참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 CARD 4/

    블레어는 후세인이 WMD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을 속였나?

    이라크 침공 이후, 수많은 반대 시위와 플래카드, 인터넷 포스터는 블레어를 블라이어(‘Blair’와 ‘Liar’의 합성어)라고 비난했다. 그가 영국 참전의 주된 근거로 삼았던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알았던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사전 정보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고 대부분이 조작된 것으로 판명됐다.

    조작된 정보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중 한 예로, 명령 후 45분 내에 발포가 가능하다는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는 허구였다. 알고 보니 이라크군은 그런 무기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이라크 침공이 있었을 즈음에 이라크 군이 보유했던 과거의 대량살상무기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1990~1991년에 있었던 1차 걸프전 이후 후세인이 독자적으로 파괴한 것으로 추측된다.

    블레어는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칠콧 보고서는 그렇지는 않다고 결론 내린다.

    칠콧은 블레어와 측근들이 2002년 가을에 공개된 그 악명 높은 문건(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블레어의 파병 노력을 정당화했던)을 ‘조작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블레어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일관된 칠콧 보고서 전체에서 그나마 그의 손을 들어준 몇 안 되는 대목이다.

    칠콧은 국민 오도의 책임을 영국 비밀정보부(MI6)에게 돌린다. 비밀정보부는 이라크에 대한 자신들의 정보수집 능력을 과신했다. 칠콧에 따르면, 이라크 공격이 있기 얼마 전 그들은 정보원으로 받은 첩보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나 이를 국민뿐 아니라 블레어에게도 숨겼다.

    물론 블레어에게 경고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행정부 일부 각료들은 후세인을 임박한 위협으로 단정짓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취약하고 의심쩍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충고했었다. 그러나 블레어는 충고를 받아들여 증거를 더 면밀히 검토하는 대신, 감성에 호소하는 그 특유의 연설능력을 이용해 후세인이 실질적이고 위급한 위협이라고 국민을 오도했다. 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 마땅하다.

  • CARD 5/

    전쟁은 불법적인 것이었나?

    칠콧 보고서는 이라크 침공의 법적 근거를 “전혀 만족스럽지 않음”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침공 직전에 피터 골드스미스 당시 법무장관이 기존 입장에서 선회해 이라크 침공의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수뇌부에 권고했음에도 블레어가 이를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칠콧은 침공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위원회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판단을 자제했다. 어찌되었건 이라크 침공은 유엔의 인가 하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블레어는 부지런히 외교전을 펼쳤지만 이라크 침공을 위한 2차 결의안을 확보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유엔 2차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려 했으나 일부 국가의 기권과 거부권이 예상되자 표결을 피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유엔은 침공이 있었을 당시 이를 규탄하지 않았다. 또 침공 후에는 이라크 재건의 틀이 될 동맹군의 전후 대책안을 안보리에서 승인함으로써 사실상 동맹군 주둔을 승인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형사재판소 역시 이라크 전의 적법성을 판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재판소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한, 전범 처벌의 권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부 이라크전 전사자 유가족들은 블레어의 형사처벌을 원하고 있는데, 이 경우 19세기의 영국법인 “공직자 위법행위” 처벌법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영국의 민족주의 정당들은 1806년에 마지막으로 발동했던 의회의 탄핵절차를 부활시켜 블레어를 형사 기소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 CARD 6/

    전쟁은 막을 수 있었나?

    침공이 있기 직전까지도, 내각 주요인사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행동을 취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존 프레스콧 부총리,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잭 스트로 외무장관 같은 경우, 사임을 통해 전쟁 개시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다.

    지금 모든 비난의 화살이 블레어에게 향해 있지만, 전쟁을 막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당시 대부분의 고위 각료들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고한 외무장관 로빈 쿡만이 당시 유일하게 사임했다. 그의 했던 사임 연설에서 제기한 이슈의 많은 부분이 결국 근거 있는 것이었음이 이후 밝혀졌다. 나머지 각료들은 적극적이었든 마지못해서였든 블레어의 뒤를 쫓았고, 그 중에는 클레어 쇼트(이라크 전 당시 영국의 국제개발장관. 이후에 블레어의 이라크 문제 대응방식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외무부, 군, 정보부의 수뇌 역시 모두 전쟁에 동조했다. 그 중에서도 비밀정보부는 훗날 자신들의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시인했지만 전쟁 준비 당시에는 동맹군 내에서 영국군의 역할을 극대화하려고까지 했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침공 당시 대부분의 보수언론과 다수 주류여론은 후세인의 제거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부시의 결심이 이미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 CARD 7/

    동맹군은 왜 전후에 대한 준비가 그처럼 미흡했나?

    불타는 영국군 전차를 피해 달아나는 이라크인들. 영국군은 이라크 바스라 지역에서 고전했고, 결국 불명예스럽게 퇴각했다. 사진촬영은 2005.9.19.
    불타는 영국군 전차를 피해 달아나는 이라크인들. 영국군은 이라크 바스라 지역에서 고전했고, 결국 불명예스럽게 퇴각했다. 사진촬영은 2005.9.19.ⓒAP/뉴시스

    이라크에서 재래식 전투는 손쉽게 동맹국의 압승으로 끝났다. 사상자도 적었고 과정도 신속했다. 사담은 한 달 만에 제거되었다.

    하지만 재난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블레어는 이 같은 상황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그러나 칠콧에 따르면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사담 정권이 사라짐으로써 종파간 갈등이 촉발될 것은 불을 보는 뻔한 것이었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자기가 침략한 나라의 상황에 대해 어이없을 정도로 무지했던 부시는 전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블레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알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라크전이 있기 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사석에서 블레어에게 경고한 적이 있다. 그는 이라크 민중이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블레어는 보좌관 쪽으로 몸을 틀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크 저 친구 말이야, 도대체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구먼.”

    상황 파악을 못한 이는 시라크가 아니라 블레어와 부시였다. 전후에 이라크 내 질서를 바로잡고 기본공공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동맹군 불패의 신화는 무너졌고, 이라크 민중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동맹군들에게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권력 공백을 틈타 극단적인 무장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란이 개입하게 되었다. 동맹군이 이라크 군대를 해체함으로써 40만명의 장병들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면서 이들의 불만이 증폭했다.

    칠콧은 영국군의 활약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초기에 이라크 남부를 장악한 것에 만족하고 방심한 채로 있다가 결국 남부 바스라에서 처참하게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이 있었다.

  • CARD 8/

    이라크전이 ISIS(이슬람 국가)의 발흥을 낳았나?

    현재 중동지역 전역에 퍼지고 있는 내전과 유혈사태를 촉발시킨 것이 이라크 전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에 대해 블레어는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과 그의 자식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해도 이라크 내 분열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아랍의 봄(2010년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운동) 이후 중동지역에 있었던 독재반대 민중봉기가 이라크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민중봉기가 일어난 곳이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였던 점을 보면 그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칠콧 보고서는 이라크 전이 ISIS의 탄생을 촉발했고 시리아 내전에 불을 붙였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중동 전문가인 마틴 츌로프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한다. “시리아 내전은 ISIS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랍인들의 의식이 깨어난 것,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진 것이었다. 아사드(시리아의 대통령)는 사태 진압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민중봉기가 국제적인 지원을 받는 글로벌한 지하디스트들에 의해 주도된 것인 양 꾸몄다. ISIS는 바로 이 같은 혼란을 틈타 등장한 세력이다. 말하자면 ISIS는 아사드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아 커지기 시작했고 이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괴물이 되었다.”

  • CARD 9/

    이라크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무엇이 달라졌나?

    영국수뇌부는 칠콧 보고서 내용을 초반에 어느 정도 입수했고, 문제 시정을 위해 일련의 개혁을 실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허위정보는 영국 정보부 역사상 최악의 실책이며, 냉전 초기에 비밀정보부에 침투했던 캠브리지 5인방(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5명이 MI6나 외교부 간부로 일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보다 더 심각한 실패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콧 보고서는 대부분의 책임을 당시 비밀정보부의 수장이었던 리차드 디어러브에게 돌렸다. 그는 오로지 상관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자신이 보기에 ‘HOT’하다고 여긴 정보를 충분히 검토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올렸다. 영국 정보부는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에는 정보 수집과 분석 업무를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분리하고, 정보원과 정치인 간의 차단벽을 새로 도입했다.

  • CARD 10/

    이라크 전과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할 수 있을까?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의 군사 개입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두 번 모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고, 그간 입은 전쟁의 상처와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두 전쟁 모두 전략적으로 대실패였다.

    이라크에서의 실패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은 리비아에서 카다피에 의한 집단 학살 위협이 있었을 때 군대 파견 대신 공군력 투입으로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소규모 군사개입 역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고 난 영국은 이제 개입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시리아에서 아사드가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화학 무기를 발포했는데, 영국 의회는 영국군의 즉각적 개입을 반대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사망한 이라크인들보다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으로 사망한 시리아인들의 수가 더 많다.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개입한 것보다 희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 참전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는 칠콧경.
    이라크 참전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는 칠콧경.ⓒAP/뉴시스

    기사출처:Ten things that Chilcot’s verdict reveals about Tony Blair and the Iraq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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