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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의 미술이야기] 나는 그들의 미학이 궁금하지 않다

‘카카오톡’ 채팅방 목록 중에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로 구성된 방이 있다. 우리들은 같은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각자 다른 미술대학을 다녔지만 현재 미술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 채팅방에서는 종종 고등학교 동창의 전시 소식을 공유하며 ‘누구 기억나? 작가가 되었네’라는 대화가 오간다. 학창시절과 청년기를 ‘미술’과 함께한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우리와 비슷한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을까? 전공자들에게조차 ‘작가’의 길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외딴 곳에 오솔길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창작’과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의 균형은 어려운 문제고, 물질적으로 부유하든 가난하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자발적 의지와 동력 없이 창작의 길을 계속 걷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시장에서 벗어나 문화와 예술이 있는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로 생존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마음이 동의하는 일을 하면서 자존을 지키는 것에 더 많은 삶의 무게를 둘 뿐이다. 최근 1970년대에 제작된 단색화 작품들이 해외시장에서 억 단위로 거래되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큰 동요나 감흥이 없는 이유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수천만원 혹은 수억원대의 미술작품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 그 주변에서 모조품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예술작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의 환원가능성은 곧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다양한 계급과 층위의 사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가치를 논할 때 그것이 어떠한 맥락으로 어느 계급의 사회와 소통하고 있는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데 시대를 구성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아울러 공감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특정 사회 내에서만 생산되고 유통되는 작품도 있는 것이다.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감동과 의미의 비중은 달라진다.

김환기(1913~1974), <무제 27-VII-72 #228>, 1972년
김환기(1913~1974), <무제 27-VII-72 #228>, 1972년ⓒK옥션

1970년대의 단색화

한국의 단색화가 태동한 1970년대는 한국현대사의 암흑기다. 총과 명령으로 움직이는 독재정권의 한복판에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은 언제나 불법이었다. 검열이 일상인 사회에서 추상화가 대두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 아니었을까.

당시 서양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앵포르멜(informel, 비정형)미술, 잭슨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단순함을 추구) 등이 등장한다. 세계2차대전쟁을 경험한 예술가들로부터 탄생한 이들 미술사조의 공통된 경향은 작품자체만으로 시공간적 맥락을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품 그 자체의 실존과 그것을 갑자기 마주한 관람객의 직관을 중시하기 때문에 관람 후기는 극과 극이다. 다시 말해 관람자가 어떤 해석과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가치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진다.

한국의 추상미술 역시 세계적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한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독재가 장기화되는 시기에 주로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하거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의 다양한 해외활동을 했다. 이들은 귀국 후 대부분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 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고 1961년 발족한 한국미술협회(이하 미협)의 이사장 등의 직책에 있었다. 미협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예총)의 미술 분과 성격의 단체인데 해방 직후 1945년 미군정 하에 창설된 조선미술협회를 모태로 한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6월, 54억원으로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무제 27-VII-72 #228(면에 유채, 세로264x가로208cm, 1972년 제작)”의 주인공 김환기(1913~1974) 작가는 미협의 창립 구성원이자 2대 이사장이었고, 박서보(1931~)는 70년대 말 미협의 10대 이사장과 예총 부회장을 역임했다. 최근 대두되는 단색화가들의 연혁을 살펴보다가 등 뒤의 서늘함을 느꼈다. 이들이 한국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며 전성기를 이루던 1970년대. 당대의 권력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였을 것이라 연상하는 것은 나 뿐일까.

단색화의 정신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로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원로작가들의 모습을 보며 단색화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된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한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단색평면회화 혹은 모노크롬(Monochrome)회화가 아닌 한국어 단색화(Dansaekhwa)로 처음 표기하여 단색화를 한국현대미술의 한 사조로서 고유명사화 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단색화의 독보적 가치는 ‘한국적인 것’에 있다. 여백의 미학,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주변과의 조화를 꾀하는 겸손함, 해외 사조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지만 한국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사조로서 단색화에는 정신과 기운이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작품제작 과정의 반복적 행위는 일종의 수행으로 고도의 정신적 성취를 낳는다는 주장이다.

단색화가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평생을 변함없는 철학으로 창작활동에 매진해 왔다.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견고한 물성을 통해 어떤 정서를 구축했고, 마침내 서구 수집가들의 마음에 닿아 미술시장을 휩쓸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과연 그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정신의 깊이,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논하는 것과 같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조선의 흰 옷, 백자, 백설기, 화선지 등의 문화적 양식과 더불어 진경산수를 창시한 겸재 정선, 서화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를 호출하여 빗대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하는 ‘백색’의 정신, ‘한국적인 것’은 ‘조선적인 것’이라 말해도 무방해 보인다. 하지만 단색화 작품들에서 조선의 국가 철학이었던 성리학이 추구하는 높은 도덕성과 자기성찰, 청빈한 생활과 의를 중요시했던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가. 지금 주목받고 있는 단색화가들의 삶이 과연 평론에 언급되는 그 정신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1972년 미협이 주최한 1회 ‘앙데팡당’전시에 이어 ‘서울현대미술제’(국립현대미술관, 1975), ‘에꼴 드 서울’(국립현대미술관, 1976) 등의 전시는 단색화가 당시 미술계의 주류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장이었다. 하지만 ‘앙데팡당’은 1884년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전에 낙선한 작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명칭이고, ‘에꼴 드 서울’은 파리에 모였던 외국인 예술가 집단의 명칭 ‘에꼴 드 파리’의 변형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색화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전시에서 ‘한국적인 것’,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한 고민이 매우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나뿐인가. 더욱이 이 전시들은 국제전에 참가할 작가를 선발하는 것에 주요 목적을 두고 있었는데, 모두 미협에서 창설하고 개최했다. 당시 미협의 이사장은 박서보, 전시 심사위원은 이우환이었다. 그들은 당시 미술계의 막강한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우환, 〈점으로부터 No. 780217〉, 1978년
이우환, 〈점으로부터 No. 780217〉, 1978년ⓒK옥션

오늘의 단색화

한국과 일본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미술작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해 온 이우환 작가는 일본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과 프랑스의 미술대학에서 교수로도 재직했다. 1970년대 한국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활성화에 기여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비움의 미학과 그의 삶은 어긋난다.

그는 이런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강의에서) “1970년대의 단색화는 저항운동의 표현이었다.” 과연 그의 점과 선에서 시대에 대한 비판, 아니 고민이라도 읽어 낼 수 있는가. 과연 그는 부조리에 저항한 경험이 있던가. 세치 혀를 놀려 민중미술운동의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뻔뻔함.

‘치유와 비움의 예술’을 말하는 박서보 작가는 어떠한가.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 내내 쉴틈없이 자화자찬을 하는 사람이다. 제자들에게는 ‘역사에 부채의식을 느끼지 말라’고 교육했다. 1962년 31세에 대학 강단에 선 이후 무려 35년 간 교수직과 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고 1994년부터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언제나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의 풍요로운 인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을 비우며 살아왔는가? 단 한 번이라도 타인의 상처를 돌아본 적이 있을까.

계속되고 있는 단색화 열풍, 한국추상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국민들에게 자부심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원인을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이 주는 감흥을 반감 시키는 그들의 삶의 궤적, 역사와 타인을 대하는 오만한 태도.

나는 그들의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미학이 궁금하지 않다.

박민희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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